작가들은 수많은 표현과 생각을 책에 고스란히 써놓고 나면 텅 빈 껍데기가 될까, 아니면 비운만큼의 표현과 생각이 다시금 차오를까?
일상에서 떠오른 생각을 메모해놓고 적절한 문맥에 끼워 넣을 수는 있지만 책을 쓰는 중간에 이런 생각이 떠오를 것 같지는 않다고 딸아이가 말했었다. 나도 동감이고.
자동차를 운전할 때 운전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룸미러나 백미러를 통해 후방을 자주 확인한다.
룸미러나 백미러를 통해 후방을 자주 확인하는 것은 뒤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잘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고전을 읽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송재환 선생님의 [다시, 초등 고전 읽기 혁명]에서 나온 글이었는데 나와 딸아이가 경탄을 금치 못했던 비유였다. ‘이런 걸 어떻게 생각해내는 거야’로 시작해서 한참을 감탄하며 몇 번을 읽었다. 머릿속이 책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어느 날에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탁 하고 떠오른 비유일 거라고 우리끼리 결론지었다. 막힘없이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술술 써진 건 아닐 거라고. 이 비유를 써놓고 ‘음~탁월해’ 하며 스스로 뿌듯해하지 않았을까. 하며 궁금해했었다.
작가의 노트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을 가지런히 메모 해 놓았을까, 엉망으로 키워드만 휘갈겨 놓았을까? 등장인물의 이름도 몇 개 써져 있겠지?
정세랑 작가가 tvn 예능프로 ‘유 퀴즈’에 나왔을 때, 꿈을 꾸고 일어나면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써놓는다고 말했다. 그걸로 단편 하나 분량은 나온다며. [달러 구트 꿈 백화점]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예지몽을 쇼핑하셨을지도 모른다. 설렘과 흥분을 지불하고. 물론 정세랑 작가의 책에 담긴 작가적 상상력은 예지몽으로 커버되기에 너무 광활해 보이는 것이 많긴 하다. 이해하기 힘든 곳까지 뻗어나가 있으니 오히려 ‘달러 구트’가 두 손 두발 다 들었을지도.
‘달러 구트’란 이름이 이미예 작가님의 노트에 들어 있었을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궁금하다. ‘달러 구트’란 이름을 보고서는 한국 작가의 책일 거라고는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달러 구트 꿈 백화점]의 원래 제목은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 였다고 한다.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던 책 제목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처럼 상반된 두 가지를 넣어 제목을 쓰고 싶으셨다는데 [달러 구트]란 이름을 생각해낸 것만으로 작가님이 승기를 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너무 매력적인 이름이다.
이도우 작가의 [날씨가 좋으면 찾아겠어요]에서 ‘윤슬’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처음 듣는 단어에 이런 걸 뜻하는 단어도 있냐며 친구와 한참을 얘기했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봤다. “너 이 단어 알아?”하고.
네이버 어학사전에서 찾아보면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설명이 뜬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옛날 국어사전에 그런 단어는 없다.
이도우 작가님은 그 새로운 단어가 국립국어원에 등재될 때부터 작가 노트에 써놓고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윤슬이라니. 너무 예쁜 단어를 독차지한 기분에 꽁꽁 숨겨놓고 다른 이에게 알려주기 싫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이제 내 노트에도 쓰여있다. 윤슬!
한번 듣거나 읽게 되면 직접 써보고 싶은 표현이 있다.
느낌이 딱 오는데 외우기에 어렵지 않은 표현이다.
“엄마, 배가 계속 고프다는 말을 ‘제 속에 걸신이 상주하셔서’ 란 표현을 써. 천재적이지 않아? “
딸아이는 내게 저 말을 한번 한 이후로 배가 고프다고 할 때마다 저 표현을 써먹는다.
“또 배고파?”
“내 배에 걸신이 상주하셔서.. “
[갯마을 차차차]에서 나온 말이란다.
나도 써먹는다.
얼마 전, 9살 초2인 아이에게 문제집을 내밀며 멋진 척 말했다.
“엄마는 네가 천천히 걷길 바래. 뛰지 않아도 돼.
걷다가 뛰는 건 할 수 있지만, 멈춰있다가 뛰려면 힘이 많이 들어. “
이런 멋진 말을 작가는 만들기도 하는데 나는 외워서 하면서도 혼자 흐뭇해한다.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에 나왔던 표현인데 나는 매일 꾸준히 문제집을 풀자는 뜻으로 써보았다. 천선란 작가는 내가 아는 한 표현 제조기다. 책 한 권에 메모해 놓고 싶은 표현이 수두룩해서 띠지가 모자랄 정도이다.
작가들의 작업실은 사계절 풍경이 고스란히 내비치는 멋진 방이지 않을까.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책이 주인인 듯 꽉 찬 책장 속에 끼여 앉은 작가.
제인 오스틴처럼 셀본 숲을 산책하진 못해도 여의도의 그 좁은 길을 요리조리 다니며 사색하는 작가.
멋지다. 작가의 이름을 가진 그들이.
수많은 표현과 이야기를 품고 살아가는 그들이.
나는, 그저 가까이하고 싶다.
다가갈수록 감동적인 그들을.
Picture by Marcos Paulo Prado i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