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싶은 나는 고양이 가면을 쓴다.
(영화, A WHISKER AWAY, 2020, 사토 준이치 감독)
미요라는 유독 밝은 성격의 소녀가 있다.
미요는 고양이 가면을 쓰고 고양이 타로로 변한다.
미요는 고양이 타로로 히노데를 보러 간다.
항상 웃고 있지만,
항상 괜찮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하고픈 말은 못 하는 미요.
미요는 고양이 선인에게 사람 가면을 내놓고
고양이로 살라는 설득을 또, 강요를 받는다.
하지만 고양이가 되겠다는 말을 하자마자 떨어진 자신의 사람 가면에 머뭇거린다.
미요는 점점 고양이로 변해간다.
히노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의 사람 가면을 쓴 고양이를 지켜본다.
미요는 다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미요는 사람이 되려고 고양이들의 세계로 간다.
하지만 늦지 않게 돌아와야 한다.
자신의 자리로.
울고 싶은 나는 내 가면을 띄운다.
(상상, Float away, 2021, 윤진진)
내 안의 밑바닥에 착 가라앉으면
그동안 떠 다니던 먼지 부유물들의 움직임에도
시선이 꽂힌다.
느리지만 춤추듯이 움직이는 먼지.
수많은 하얀 점들.
울고 싶다.
울컥하는 마음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턱끝을 당겨 눌러본다.
가면이 내게서 멀어진다.
나는 점점 작아져 커다란 가면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웅크리고 앉아 내 몸을 감싸면 내 손이 닿은 곳까지
나는 안전할 것 같다.
가면을 통해 세상을 본다.
가면 밖에서 사람들은 의미 없는 인사를 건네고
멀어져 간다.
가면은 줄곧 웃고 있다.
가면은 작은 주름을 만들어 멈춰있다.
고요하다.
한바탕 감정을 끌어올려 토해놓은 바닥은 질척인다.
녹아들면 안 된다.
오래되어도 안된다.
잠시 있다 돌아가야 한다.
내 얼굴이 일그러지기 전에.
맘껏 슬퍼하고 싶을 때 가 있습니다.
정확이 이것 때문이다 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대충 이것 때문인데, 이것이 전부는 아닌듯한 느낌.
나의 슬픈 이유를 제쳐두고
다른 이유로 울 수 있는 장면이 가득한 슬픈 영화를
일부러 찾아서 한바탕 울고 나면 몸은 나른해지지만
쏟아낸 슬픔만큼 가벼워진 느낌이 듭니다.
거울에 비친 빨간 눈이, 눈 주위가 얼룩진 자신을 보고 있으면, 피식하고 웃어주게 됩니다.
내 자신에게 보내는 작은 위로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유독 사람의 감정을 시각화하려는
시도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사람의 감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이겠지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하울이 우울해하며 몸이 녹아내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우울감이 온몸 안팎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내딛는 걸음마다 날 놓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들러붙는 느낌.
단순하지만 우울함을 이이상 더 잘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장면입니다.
‘마음이 외치고 싶어 해’의 준의 마음은 계란 안에 갇힌 것으로 표현됩니다. 부모의 잘못을 아이의 탓으로 돌리자 자책하는 아이에게 계란이 나타납니다. 계란은 아이의 입을 봉인해 버리고 이후로 아이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아이가 말이 아닌 노래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계란도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준이 목소리를 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계란이 깨집니다.
상처 입은 아이의 마음을 계란에 갇힌 마음으로 표현하면서 계란은 하나의 갇힌 공간과 하나의 등장인물,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에반게리온’이나 ‘도쿄 구울’에서 마음은 하나의 공간으로 표현됩니다. 지금은 많이 보는 표현방법이긴 하지만 처음 접했을 때는 무척 놀라웠습니다. 텅 빈 공간에 목소리만 들리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장면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지요.
에반게리온의 신지가 EVA와 싱크로율이 정상치를 넘어서자 신지의 몸이 사라지는 장면은, 정신이 육체의 형태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했습니다.
‘귀멸의 칼날’에서는 이 공간을 환각과 섞어 묘한 경계를 만들어 놓았지요.
감정은 생각을 이끌고, 생각은 사람을 움직이게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잘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슬픈 나를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아픈 나를 내버려 두지 않고 살펴주어야 합니다.
미국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처럼 슬픔이의 역할은 적지 않습니다. 꾹꾹 눌러놓은 슬픔이 터지는 순간에 라일리의 가족은 아이의 마음을 알게 되고, 보듬어 줄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맘껏 슬퍼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전해주고 있지요.
맘껏 슬퍼하되
사람의 가면은 잃지 말고
꼭 돌아오세요.
우린 또 기뻐도 해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