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화
나는 말하지 못하는 아이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배워본 적이 없었다. 내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는 상상으로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말 이외에 다른 소통 수단을 고려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완벽한 구조의 문장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짜릿한 희열을 느낀다. 조사의 변주만으로도 미묘하게 바뀌는 말의 뉘앙스, 언어유희는 만족감을 주었다. 나만의 취향은 아니겠지만, 나는 말을 잘 구사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매료되곤 했다. 내 남편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감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나와 다르게 그는 이성적이고 절제된 언어를 사용했다. 나의 언어는 자주 막다른 골목에 막혀 주체하지 못하고 흘러넘치기 일쑤였다. 반면에 남편의 언어는 늘 목표한 바를 향해 미로 속에서도 곧장 출구를 향해 내달렸다. 나는 그와의 대화에서 말문이 막힐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면, 다짜고짜 씩씩 거리며 대화의 판을 고약스럽게 뒤엎어버리기도 했다. 신혼 때 겪었던 무수한 다툼은 대화의 방식을 조율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남편을 통해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
기쁨, 슬픔, 위로, 다정, 근심, 아픔 등 형체 없는 모든 감정들이 말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물론, 인간 사회에서 비언어적 표현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언어를 뒷받침하는 보조 수단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아이와 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은 큰 절망이었다.
화음이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수화(手話)’를 차선으로 생각했다. 수화는, 일본어나 독일어처럼 습득이 가능한 제2의 언어 중 하나다. 그러나 문제는, 수화를 습득하려면 일정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갖추어야 했다. 뇌로 이해한 언어를 몸짓으로 풀어내야 하니 지적 능력뿐 아니라 몸 근육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화음이는 세 살이 되어서까지도 옹알이 수준의 소리만 낼 수 있었다. 대근육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의 모든 소근육 사용에도 한계가 있었다. 음성 언어도 결국에는 혀 근육이 탈없이 작동할 때 가능한 것인데, 화음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언어로도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소통할 수 없는 아이였다. 화음이의 언어치료사도 음성 언어의 발화(發話)는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방식, 일테면 그림이나 녹음 기계등을 사용하는 단순화된 방식으로 아이에게 접근했다. 나는 아이의 언어치료를 따라다니면서 ‘커뮤니케이션’은 비단 언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그러면서도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기적처럼 아이의 입술이 열리고, 일상의 사소함을 종알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올 날을 매일 바랐다. 그 바람은 당연하게도 간절한 기도가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걸음마를 시작하지 못한 세 살의 화음이가 주방에 있는 나를 향해 기어와 싱크대를 붙잡고 흔들흔들 겨우 몸을 일으켜 나를 올려다보았을 때, 그 맑고 깊은 눈동자 속에 담긴 아이의 사랑이 얼마나 순전한지를 보았다. 아이의 눈 속에는 완전한 신뢰와 무한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나는, 미소를 머금고 옹알이를 하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사랑이 눈물로 차오르는 충만감을 느꼈다. 나는 그때 나조차도 놀라버린 생각, 내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는 생각을 했다. 언어 그 이상의 것이 우리 사이를 교통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그동안 초조하게 매달렸던 기도의 제목을 접고, 대뜸 ‘하나님, 화음이가 말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저는 어쩐지 아이의 마음이 다 들리는 것 같아요.’라고 기도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인의 초대로 친하게 지내던 몇몇 가정들이 모이는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준비해 간 부스터 의자에 화음이를 앉혀두고 그곳에 모인 분들과 유쾌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 벅적한 소음 속에서도 낯설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화음이가 ’ 엄마!‘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나와 남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도 들었어? 내가 들은 게 맞아? “
화음이의 ‘엄마’ 소리는 그날 다시 반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들은 것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옹알이였을 뿐인데 사람들의 소리와 겹쳐 ‘엄마‘로 들렸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전에 분명 하나님께 아이가 말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했었는데 막상, 아이가 ‘엄마’라고 불렀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쿵쾅거리고 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기껏 시작된 발화가 풀이 죽어 사라질까 봐 그날 저녁 내내 아이에게 재차 확인하며 물었다.
”화음아, 방금 뭐라고 말했어? 내가 누구야? “
며칠을 더 지켜본 결과, 아이의 입에서 나온 ’ 엄마‘는 분명한 발화가 맞았다. 아이는 그 이후로, 수시로 나를 불렀다. 화음이가 부르는 ’엄마!‘에는 모든 감정들과 모든 필요가 들어있었다.
놀이터에서 만난 미국인 엄마에게 화음이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다만 ’ 엄마‘라는 말을 할 뿐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을 때,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 엄마‘는 마법의 단어예요! 그 말이면 다 되죠. “
정말 그랬다. ’ 엄마!’라는 말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족되었다. 나는 문득,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다. 주저리주저리 많은 말을 쏟아내지 않아도 ’ 아버지’ 하고 부르기만 하면 그분은 나의 모든 감정과 필요를, 나조차도 명명할 수 없는 나의 깊은 내면까지도 다 이해하신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하나님을 부를 때, 그분이 나의 속속들이 다 주목하여 보시는 것처럼 나도 그분의 마음을 닮아가기를 바라본다.
화음이가 ’ 엄마!‘ 부르기만 해도 아이의 깊은 내면까지도 어루만질 수 있는 마법 같은 ‘아버지’의 마음이 나에게서 절대 사라지지 않기를.
*제목 이미지 출처: 유토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