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아 부모들의,
제 소원이 뭐냐고 물으셨죠? 초원이가 저보다 하루 먼저 죽는 거예요.
2005년에 개봉한 영화 ‘말아톤’에서 자폐성 장애를 가진 초원이의 엄마가 한 기자와의 인터뷰 도중 덤덤하지만 묵직하게 뱉어낸 말이다.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나는 지금의 남편과 한창 연애 중이었다.
우리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영화관을 서성였고 남편의 선택으로 ‘말아톤‘을 관람하게 되었다. 영화의 포스터가 예고하고 있듯이, 이런 류의 영화를 관람할 때에는 눈물 콧물이 빠질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입장해야 한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를 지나 후반부로 진입할 때쯤, 남편이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을 끝내 으으윽, 하고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지막한 흐느낌을 넘어서, 그야말로 극한의 오열로 이어졌는데 나는 그런 남편의 울음소리에 놀라 차오르던 눈물이 오히려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남편의 감정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 자막이 끝난 뒤에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나는 이미 밝아진 극장 안에서 남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어야 했다. 겨우 잦아든 감정을 추스르고 극장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나는 그에게 왜 그렇게 많이 울었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대전에서 학교 앞에 있는 작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임마누엘‘이라는 장애부서에서 봉사자로 섬기고 있었다. 어렴풋이 짐작하던 장애인 가족들의 외로움과 고뇌를 영화 속에서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되니, 그간 막연하던 그들의 고통이 더 실재적으로 와닿았던 것이다. 그날 흘렸던 남편의 눈물은, 연애 기간 내내 나의 놀림거리가 되었지만 나는 사실, 그렇게 눈물 흘릴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남편에게 한번 더 반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가 자신보다 먼저 죽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만, 영화 속 초원이 엄마가 뱉어낸 대사는, 대부분의, 아니 어쩌면 모든 장애아 부모들의 마음을 대변한 현실적이고 가장 절실한 소원일 것이다.
나 역시, 화음이의 장애를 알게 되었을 때, 결코 이 아이가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언젠가 반드시 일어나게 될 ’ 나의 부재‘가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우리는 종종 뉴스를 통해 아이의 장애 진단에 비관한 어머니가 아이와 함께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사건을 접한다. 그 누구도 아이의 엄마를 비난할 수 없다. 그 뉴스에 달리는 댓글들은 이 비극 앞에서 사회적 시스템의 구축을 촉구하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3분짜리 뉴스에서 느꼈던 고통은 30분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이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젠가, 우리가 기대하는 사회적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충분한 보호막이 제공되는 이상적인 세상이 도래한다고 해도, 제 몸 하나 제대로 닦아내지 못하는 다 큰 어른에게 부모만큼의 애정과 인내를 베푸는 ‘돕는 이‘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의 이 같은 두려움은 종종 꿈속에서 형체화 되었다. 화음이의 지독한 뇌전증 전쟁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나에게 ’ 죽음’은 어느새 내 삶 속에 그 길고 짙은 그늘을 선연하게 뻗어내고 있었다. 그저 막연하게 멀었던 죽음의 순간이, 이제는 어느 때고 일어날 수 있다는 자각이 생긴 것이다.
어느 밤엔가 꿈을 꾸었다.
평소 물을 좋아하는 화음이와 수영장 파티에 참석했다. 우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모였다. 웃고 떠드는 무리들 속에서 나는 조금 들떠 있었고 주변은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어느새 화음이의 존재를 잊고 사람들 속에서 파티의 분위기에 젖어 큰 웃음을 웃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사방이 조용해졌고 내 몸의 감각들이 서늘하게 식으며 등 뒤가 오싹해졌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느린 모션으로 수영장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깊은 수영장 바닥에서 마치 잠자듯,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화음이를 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옴짝달싹 할 수 없이 굳은 몸으로 깜깜한 물속에 누워있는 화음이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다행이다... 너가 나보다 먼저 죽어서.‘
이 꿈은, 반복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잠에서 깬 나는, 내 옆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는 화음이를 끌어안고 엉엉 울곤 했다.
반복되는 꿈은 숨겨진 내면의 불안과 갈망의 표출이었다. 나는 어떻게, 나를 이토록 꽁꽁 옭아매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 불안은, 내가 살아있는 한 영영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