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king with Jesus
나의 오랜 친구 중 한 명이 나의 기록들을 가만 들여다보다가 어느 날 문득 카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예전 일들을 떠올릴 때, 너의 마음이 그때로 돌아가 어지럽고 또 아팠겠다.”
친구의 그 말이 마음에 닿자,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바싹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제야 느껴졌다. 마치 친구가 물리적 거리를 초월해 내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쉬이 쉬이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 나는 보이지 않는 친구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지난 12년의 시간들을 짧은 글들로 풀어쓰면서 나는 생각지도 못한 괴로움과 마주해야 했다. 나는 내가 그 시간들을 잘 지나왔고 건강하게 해석해 냈으며 마침내 아픔을 기쁨으로 승화시켰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내 주변의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 한 켠에 웅크린 두려움과 의심, 후회와 원망이 아주 없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때는 나의 그런 이중적인 마음이 더러운 오물처럼 느껴져 감추고만 싶었다. 나 스스로도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내가 쓰는 글과 내 마음의 모순을 혐오스럽게 지적했다. 나는 정말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을 감사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나는 지금도 가끔 ‘왜 나여야만 했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 내가 둘째를 가질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따위의 생각들을 하곤 한다. 그런 생각들은 나를 찌르는 가책의 부메랑이 되어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몹쓸 가정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나는 어느 다큐에서 장애아이의 부모가 ‘저는 한 번도 이 아이를 낳은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저 말이 진심일리가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던 적도 있다. 나는 숭고한 희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나는 차라리 모태를 저주했던 예레미야나 욥에게서 위로를 얻는다.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예레미야서 20:17 RNKSV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할 것이라면 왜 나를 모태에서 살아 나오게 하셨습니까? 차라리 모태에서 죽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나 않았더라면, 좋지 않았겠습니까? -욥기 10:18 RNKSV
나는 소리를 지르고 발악을 하고 제 머리칼을 쥐어뜯는다.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내면서 벽을 쾅쾅 내리친다. 남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나의 밑바닥을 나는 매일 목도한다. 저질스럽고 추악한 내면을 매일 마주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없다. 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지켜보면서도 여전히 꼿꼿이 버티고 있는 교만을 발견할 때마다 지긋지긋한 자기혐오에 기함한다. 내면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 완전히 패배한 패잔병으로서 결국 나는 터덜터덜 다시 예수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분 이외에 나를 구원할 그 어떤 방법도 이 땅에는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읽은, 팀 켈러의 [고통에 답하다]에는 원망과 울분을 가감 없이 토로했던 욥이 어떻게 하나님의 눈에 ‘의인‘이며 하나님께 오히려 영광이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하나님은 마침내 욥이 이겼노라고 하셨다. 그렇게 슬퍼하고, 노하고, 의심하는 걸 지켜보시고도 여전히 “네가 이겼다”라고 말씀하시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욥의 행위가 다 괜찮아서, 그러니까 욥의 마음과 동기가 늘 합당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얼굴과 임재를 찾은 욥의 근성은 고난을 통해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더 가까이 나가게 되었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나를 향해 ‘그놈의 뻔한 종교 타령!’이라며 혀를 찰지 모르겠으나, 유일한 소망이요 구원인 그분이 나의 삶을 운행하고 계심을 침묵으로 부정할 수 없으므로 나는 터져 나오는 그의 생명을 하찮은 글로나마 고백할 수밖에 없다. 고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아 나섰던 욥의 끈질긴 근성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던 것처럼 부디 나의 삐그덕거리는 신앙의 여정도, 이 기록들도 하나님께 영광으로 드려지길 깊이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