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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명광 May 16. 2016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나는 똥이다 8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은 천하고 고생스럽게 살더라도 죽는 것보단 사는 것이 낫다는 속담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종교는 다양한 이름으로 죽음 이후의 행복을 이야기한다. 천국이나 천당, 극락이 이에 해당한다. 가끔 장례식장에 가면 듣는 얘기는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말이다. 결국은 현세에서 행복해야 한다는 말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세가 죽음보다는 낫다는 통념 속에서도 죽어선 천국을 가서 현세에 누리지 못한 행복을 누리려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물론 아직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두려움에서 천국에 가길 바라며 현세에서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인지상정일 거다.

그런데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사람들의 이중적인 태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마시고 죽자.. 먹고 죽자.. 죽자고 댐비면.. 죽어볼래.. 죽겠다..이런 말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세계 3대 거짓말 중의 하나도 아이고 나이 먹으면 죽어야지 한다는 노인의 푸념이다. 죽고 싶다는 푸념도 너무나 쉽게 들을 수 있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인가? 

뉴스를 도배하는 죽음에 대한 기사는 죽음이 사람들에게 너무나 쉽게 다가오는 단어도 아닌데 현실에서는 인사처럼 흔한 단어가 되어 버렸다. 최근의 많은 이슈도 죽음과 관련된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도 그렇고 해외의 테러 관련 뉴스나 음주운전으로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마저 망가뜨리는 뉴스들은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해 안녕하세요 만큼이나 흔하게 들려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죽음이 단순히 숫자를 세는 방법으로도 사용된다>

필자는 죽음이라는 것에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지만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맞은 첫 죽음의 소식은 많이 낯설고 어색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에야 죽음에 대한 관념이 없어서 슬픔이란 감정도 판단이 되지 않았던 것 같고 성인이 되어서 여러 장례식을 다니면서도 가족의 죽음이 아닌지라 그리 현실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와의 준비된 이별은 준비가 의미 없음을 알게 되었고 죽음이란 단어에 대한 성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단어가 주는 인생의 무게에 대해선 고민하게 만들었다. 

필자의 아버지는 젊어서 수많은 수술을 하셨고 병원에서도 사형선고를 받았었다고 한다. 필자가 어린 시절인지라 아버지의 병세가 삶의 태도를 바꿀 만큼의 철이 들게 하진 않았지만 파생된 많은 기억들은 가지고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이 시절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아마 너네 삼 형제를 데리고 죽어버렸을 것이다란 말의 무게도 필자가 부모가 되어서야 조금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맞이한 어머니의 죽음은 죽음이 단순한 이별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필자와 같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정도의 차이들은 있겠지만 죽음이 가져오는 현실적인 고민과 아픔은 정도의 차이와 별개로 항상 무겁다. 아무리 호상이라도 그렇다.

<출처 : http://pre.bookcube.com/>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하진 않는다. 아니 준비하고 싶진 않다. 그것이 나의 것이든 가족의 것이든.. 현진건의 할머니의 죽음에 나오는 자손들의 이중성을 누구나 안고 살아가고 있다. 죽음이 슬픔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귀찮음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슬픔을 함께 한다는 것은 정신적 교감을 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기쁜 일의 교감도 쉽지 않은 일인데 슬픔의 교감은 더더욱 그렇다.

죽음 중에서도 준비되지 않은 죽음을 대할 때는 너무나 힘들 수밖에 없다. 필자의 어머니가 그리 가셨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던데 왜 그리 준비 없이 가셨는지 처음엔 그 뜻밖임이 그리도 힘들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갑작스러움도 서서히 슬픔의 무딤으로 변화해갔지만 여전히 슬픔은 여전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충분한 준비도 없으면서 죽음에 대해서 너무나 관대하다. 예전처럼 자연환경의 역습이나 발전하지 않은 의학기술로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삶을 편하게 하는 것들을 만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내 삶의 영위를 위해 타인의 죽음에 대해선 거리두기를 한다. 

사람들은 현재를 즐기자고 하면서 불안한 미래를 걱정한다. 미래를 걱정하는 것인지 미래에 있을 걱정을 걱정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을지 모른다. 다가오지 않은 모든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두렵게 하는 아이러니다. 현재를 즐기자며 몸을 망치기도 한다. 마시고 죽자, 먹고 죽자, 피고 죽자, 달리고 죽자 기타 등등..

기업들은 미래의 불안을 팔아 현재를 영위한다. 당신이 죽으면 누가 가족을 먹여 살릴까요? 지금 마시는 물이 공기가 안전합니까? 연금 하나는 있어야지요. 자식이 당신의 삶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세상이 불안한 거뿐인데 누가 당신을 지킬 수 있나요? 

개개인 스스로는 죽음을 경시하고 있고 세상은 죽음을 빌미로 이익에 취해 있는 현실이다. 당장 죽음을 준비할 필요는 없지만 가족의 죽음이나 지인의 죽음으로부터 내 미래와 내 현재를 고민해 볼 만한 시점이다. 

굳이 개똥밭에 굴러다녀 보지 않아도 이승이 좋은 것은 당연지사이다. 

A single death is a tragedy, a million deaths is a statistic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명의 죽음은 숫자다라고 말한 스탈린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세상이 죽음을 경시하는 현실에서 한사람의 죽음을 뒤짚어 보거나 내 죽음을 미리 생각해 본다면 어제와 다른 오늘이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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