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슬프지만 아름다운 청춘의 노래

by 이상희

스스로도 죄책감을 느끼기를 즐겨하는 나로서는

떠올리는 것만으로 부채감을 느낄 만한 영화를 찾아가서 본다는 것이 쉽지 않다. 태양의 후예를 보면서 세월호를 떠올리는 게 일상이므로 자칫하면 영화 한 편 보고 한 분기를 내내 괴로워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데도 <동주>는 인터넷에 떠도는 광고만 봐도,

멈춰선 버스에서 잠깐 읽은 창 밖의 포스터만 봐도,

자꾸만 봐야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괴로워도 가서 봐야지, 내 등을 떠미는 내 안의 나.


아마 나는 처음부터 <동주>를

역사 영화나 위인 영화가 아니라

청춘의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거다.

그게 나를 지켜줄거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겠지.


그래,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동주>를 보는 내내 일제의 엄혹한 감시와 부당하고 끔찍한 처우보다는 동주와 몽규가 보여준 파란 청춘의 모습을 놓칠 수 없었다.



역사를 바라볼 때,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 중의 하나는 역사가 마치 하나의 꾸며진 이야기처럼 나와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여기는 태도이다. 예를 들어 나는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고도 전쟁 중에도 사람들이 장을 세워 물건을 사고 팔고 숨어지내면서도 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에 놀라 역사책에 대해 약간은 배신감마저 느꼈던 적이 있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그럼 대체 그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은 뭘 먹고 사느냔 말이다. 내가 겪어볼리 만무한 일일수록 역사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큰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지. 엄마의 어린시절을 상상해보라거나, 엄마도 여자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는 무딘 감성은 역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곤 한다.


윤동주 같은 인물에 대해서는 어떨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국민 시집의 저자, 앳된 유년의 사진들 몇 장, 독립운동 혐의로 고작 스물 네 살에 멈춰버린 영원한 청년 시인. 우리가 그에게 언제 한 번이라도, 쉽게, 감정이입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까. 그래서 영화는 동주의 친구이자 동반자였던, 그리고 라이벌이며 형제였던 몽규를 통해 우리가 한결 가까이, 동주에게 감정이입하도록 돕는다.



동주와 몽규의 삶에 흠뻑 빠져 두 시간을 보내고 나니, 영화 <동주>에 대해 내가 방점을 찍어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둘은 그 어떤 특별하지도 않은 '청춘'이었다는 것이다. 가족들의 묘한 경쟁심 속에 흔들리고, 질투심에 괴롭고, 꿈을 이루지 못해 속이 타고, 스스로를 의심하고 눈물 흘리는, 청춘. 사랑하고 떨리고, 그러면서도 서로를 지키기 위해 뜬 눈으로 밤을 새우던 청춘들. 그들의 서툰 걸음들이 위태로워 보이지만, 그런 서툰 시도들이 그들을 얼마나 크게 성장시켰는지, 영화가 끝나는 시점에서는 두 사람이 마치 한 목소리를 내듯이 일제에 저항하며 뜻을 굽히지 않는다. 영화는 마지막 취조 장면에서 동주와 몽규의 얼굴을 교차편집함으로써 그 둘이 결국 같은 곳을 보고 같은 꿈을 꾸었음을 보여준다.


십대 후반의 청소년들이, 이십대 초반의 청년들이, 처음부터 날카로운 정세 판단과 흔들림 없는 소신, 변하지 않는 정파를 가지고 행동했다고 말한다면 영화는 아마 억지스러웠을 것이다. 대신에 영화는 시도하고, 부딪히고, 도망치고, 변화하는 둘의 모습을 통해 처음에는 달라보였던 것들이 결국 하나로 화해해가는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 <동주>가 어둡고 무겁기만 할거란 생각은 오해다.


동주는 몽규의 방법이, 몽규는 동주의 방법이 못마땅하지만, 동주가 그랬듯 몽규도 가장 힘들 때는 늘 동주 곁에 머물고 싶어했음을, 그것은 이념도, 사상도 뛰어넘은 사랑이었음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태어난 땅을, 그리고 시와 조국을 뜨겁게 사랑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시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름 날리는 혁명가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시와 조국이라는 목적 그 자체를 사랑하는 그들의 모습은, 시대의 숙명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겁지만, 순수하고 자연스럽다.



영화 <동주>가 보여준 청춘은 그래서 슬프고도 아름답다. 청춘이란 내가 지금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슬프며, 그렇게 무모할만큼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가슴 뜨거운 시절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노량진과 독서실에 청춘을 저당잡아두고, 때가 되면 너희의 심장이 뛰는 일을 할 수 있을거라고, 그것도 아니면 심장이 뛰는 일에 청춘을 바치는 건 무모한 모험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일에 나 역시 은근히 동의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살아숨쉬는 청춘들조차 숨어버린 지금에, 우리는 또다른 동주와 몽규를 꿈꿀 수나 있을지. 반성하고 또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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