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희 Mar 14. 2020

나약함

습관적으로 ‘사는 건 원래 그래’ ‘나는 원래 그래’라고 말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 저 말 앞에서 다른 모든 가능성은 무너지고 저 말에 덧붙이는 모든 말은 그저 사족이 된다. 그럭저럭 흘러가던 대화도 저 말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단절된다. 힘을 빼앗기고 무안해진다. 


그 사람의 ‘원래 그렇다’는 말이 그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짐작하고 이해해보려던 때가 있었다. 자신의 나약함이나 타인을 배려하지 못한 모습이 부끄러워서 하는 자조적인 말이리라. 그래서 그가 ‘나는 원래 그렇다’라고 하는 내용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건 자신이 평소에 무슨 이유에서든 ‘별로’라고 여기는 것들이었다. 말로는 절대 안할 것 같던 그런 행동을 해놓고 그 사람은 사과나 인정 대신에‘나는 원래 그렇다’고 얘기했다. 그건 마치 ‘내 잘못은 내가 알고 있으니 너는 건드리지마!’라는 협박처럼 들렸다. 그에게 약점이나 잘못은 곧 무기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에는 그가 너무도 또렷하게 ‘그건 아니다’라고 말하고, 나아가 장황하기까지한 설명과 미사여구를 붙여 ‘나는 좀 달라, 나는 대단해’라고 말했다. 거기에는 아주 조금의 망설임이나 수줍음도 없었다. 그는 그저 오로지 자신과 관련된, 그 중에서도 자신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 나머지는 ‘원래 그런 것, 그러므로 말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못박았다. 그런 오기 앞에서 타인의 고통과 상처는 별 것 아닌 일이 되었다. 난 원래 그래 라고 뻔뻔하게 외치지 못하는 사람의 사정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자신보다 약해보이면 간단히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상처 받은 영혼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 이유는 나의 상처들 때문이기도 하고, 상처 받아 본 자로서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상처 받았음을 금방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살면서 자주 상처 받는다. 왜냐하면 상처는 꼭 내가 입은 피해에서만 비롯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떳떳하지 못한 선택을 하거나, 더 큰 힘에 굴복해서 나보다 약한 이를 지켜주지 못했을 때도 상처 받는다. 누군가의 억울한 죽음에도 상처 받고, 때로는 낡아버린 물건에도 상처 받는다.  


사는 건 상처를 허락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과정이라는 생각 마저 든다.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시간. 게다가 한 번 생긴 상처는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엷어지고 흐릿해지다가도 어떤 날은 또렷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상처받는 게 싫은 건, 그것과 내내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일 거다. 나도 상처 받기 싫다. 어떤 상처는 물리적인 고통을 느끼게 할 정도로 강렬하다. 그 일을 떠올리면 가슴 한 켠이 뻐근하다. 상처 받은 나를 바라보는 일도 서글프다. 내가 나약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분명 어렵다. 


하지만 살면서 피해야 할 일은 상처 받는 게 아니라, 상처 받지 않으려는 악다구니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었다. 그건 “난 원래 그래”와 “난 대단해”를 오가며 점점 무감각한 사람이 되는 것. 내가 나를 변명하고 감싸주기 위해, 혹은 상처를 피하기 위해 남을 공격하고 이용하는 사람이 되는 것. 여리고 약한 것들을 보듬고 챙기는 게 아니라 꼴도 보기 싫어하는 것. 시작은 분명 나약한 나를 챙겨주려는 것이었는데, 어느새 남의 고통에 눈 감고 남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황현산은 “잔인함은 약한 자들에게서 나올 때가 많다. 세상에는 울면서 강하게 사는 자가 많다.” 고 적었다. (황현산,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난다) 


삶이 나를 짓눌러 내 존재가 왜소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분명 있다. 용기가 부족해서, 혹은 이기적이어서 비겁한 선택을 하는 때도 많다. 사는 게 매일 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대부분이다. 그럴 때면 ‘뭐 어쩌라고, 난 원래 그래.’ 라는 말 뒤에 숨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저 말 뒤에 숨어 왜소해진 나도, 또 그 왜소해진 만큼을 어딘가에서 보상받으려는 나도 그저 나약하기에 괴로워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나약함을 탓하고 원망할 게 아니라 그런 순간에 조금이라도 다른 선택을 해 보는 건 어떨까. 미처 지켜주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마음을 낼 수도 있고, 나와 남을 비교하며 끊임 없이 분투하기 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고 의미 있는 가치에 몰두할 수도 있다. 나의 가치와 다른 이의 가치를 동등하게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순간순간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왜소하게 혹은 비대하게 만드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그래. 그렇게 노력해도 또 아플 것이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다시 상처를 주고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래 그렇다며 도망치는 그 비겁한 선택이 나의 태도와 가치관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남 위에 서는 게 아니라 여럿이 나란히 설 수도 있다는 걸 잊지 않고 싶다. “몰아치는 바람 앞에서도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꼿꼿하게 서 있다면, 그건 마음이 병든 나무일 것”이라는 김연수의 말을 떠올린다. (김연수, <지지않는다는말>, 마음의 숲) 그렇게, 내가 나약하다는 걸 받아들인다.


작가의 이전글 들어가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