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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Apr 24. 2020

시니컬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동' 해야만 하는 것이다. 무관심과 냉소는 지성의 표시가 아니라 이해력 결핍의 명백한 징후이다.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한길사)


'시니컬하다' 는 말이 유행이던 때가 있었다. 이런 편견에 따르면 시니컬한 태도 즉, 무관심하고 냉소적인게 이성적인 것이고, 이성적이지 못하면 지적이지 못한 것처럼 여겼다. 다시 말해 무관심하고 냉소적이어야 지성적이라는 말이다. 다분히 억지스럽다. 


지성은 인식의 지평을 의미하고 인식은 곧 대상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실은 굉장히 따뜻한 일이면서 동시에 차가운 일이다. 잘 안다면 함께 느끼되 섣불리 행동하지 않을 것이므로. 황현산은 그의 책에서 ‘민중 개돼지론’의 주인공인 전 교육부 정책 기획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문제의 회식 자리에서 한 기자가 그에게 묻는다. “기획관은 구의역에서 컵라면도 못 먹고 죽은 아이가 가슴 아프지도 않은가. 사회가 안 변하면 내 자식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거다. 그게 내 자식이라고 생각해봐라.” 그러나 기획관은 “그게 자기 자식처럼 생각이 되나”라고 되물으며, “그렇게 말하는 건 위선”이라고 잘라 말했다. 세상에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은 구의역의 수리공을 진실로 제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도 많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위선자가 아닌지 자문하는 사람도 많고,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많고, 비록 위선적일지라도 그 생각을 마음에 새기려고 애쓰는 사람도 많다. 그 많은 사람은 제 생각을 버선목처럼 까 보일 수 없다. 그 사람들과 나향욱들은 끝내 만날 수 없다. 그것이 충격적이다. (황현산, <사소한 부탁>, 난다) 


그러니 시니컬하다는 건 이해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거부하고 행동하지 않기 위한 핑계일지 모른다. 타인에 대해, 특히 타인의 고통에 대해 시니컬하다(“사는 게 다 그렇지” “세상이 그런 걸 어쩌라고”)는 건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저 말 안에는 나는 그 고통에 포함되지 않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 혹은 나는 절대 포함되지 않는다는 차별의 시선이 ‘이미’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은 절대 속하지 않을 어떤 계층이나 상황을 당연하게 상정한다. 그리고 얼마든지 시니컬해진다. 아마 할 수 있다면 그들과 자신 사이에 장벽이라도 세우고 싶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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