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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Apr 29. 2020

소외

다른 사람이나 어떤 사건을 하나의 전체로써 연관시켜 보기보다는, 우리에게 중요한 부분만을 분리시킴으로써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를 가진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는 식으로 현실을 두 개의 부분으로 분리시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자아에 있어서도 분열을 보이게 된다. (중략) 우리는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확인하기 위하여 우리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는 국면만을 강조하면서, 그 외의 국면에 대해서는 격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분리는 크면 클수록 우리 자신 가운데 나타나는 균열은 더욱더 깊어지는 것이다.  (김현, <행복한 책읽기>, 문학과 지성사)


인간의 소외에 대하여 언제나 고민한다.


사회나 타인들로부터 소외된 개인은 언제든 자신을 소외시킨 사회와 타인을 공격할 이유가 충분해진다. 그런데 슬프게도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그 타인의 내면도 황폐하지 않을 수는 없다. 구성원 각자가 소외되는 사회 구조가 건강하지 않은 건 물론이다.


중요한 지점은 여기다. 인간의 소외란 겉으로 보기에 타자에게만 행해지는 것 같지만 소외란 본질적으로 자신 안에서부터 싹튼다. 사람은 스스로를 보듯 타인을 볼 수밖에 없고 인간의 내면은 곧 외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인식은 사회적 지위나 사회적 규정들과도 아주 긴밀히 연결되는데, 타인을 강하게 거부하고 소외시키려는 사람일수록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만으로 자신을 재단하는 경우가 많다. 나를 바라보는 기준이 나에게 있지 않으니 내면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 대한 존중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려고 관계에서의 권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소외된 개인은 "내가 이것을 원해도 될까?" 라는 '도덕적 질문'에 대해 항상 "이것을 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니야.", "다른 것을 해야 했기 때문이야.", "나에겐 선택권이 없어." 와 같은 말을 한다고 합니다. 즉 소외된 개인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해야 했기 때문에 했어." 라고 말합니다. "바로 내가 그것을 원해서 했어." 라는 말이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에겐 복종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정혜윤, <삶을 바꾸는 책 읽기>, 민음사)


원치 않는 나를 나 자신과 분리시켜 외면하고, 맘에 안 드는 나의 조건을 미워하면서 자신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실수나 실패가 두려워서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 책임지느니 도망치는 게 낫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는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나로 한정될 수밖에 없는데 사는 일은 곧 실수와 실패의 연속이니 자신과 끝없이 삐걱거리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일부분을 외면해 버린다.


개인의 선택이 가져올 실패의 양이 지나치게 크다는 것도 문제다. 사회적 자원이 - 그것이 부든 기회든 - 소수에게 집중되다보니 내 인생을 통해 뭔가에 도전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내 인생에 '무책임' 한 걸로 느껴진다.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려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돼야 하는데 먹고 살기도 막막한 사람들이 스스로와 대화하며 자신에게 공을 들이는 일이, 나를 토닥이고 일으켜 세우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이런 세상에서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라는 건 더 이상 상투적인 문구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어려워서 현학적인 말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그러니 외로운 개인은 점점 늘어나는데, 혼자여도 괜찮다는 고독의 벗은 눈에 띄지 않는다. 혼밥 혼술은 자주 타인에게서 도망치려는 선택일 뿐 나 자신과 단둘이 있기 위한 능동적인 선택은 아니라서 서글프게 보인다.


혼자가 어색하니, 섞이면 더욱 곤란하다. 다양한 존재가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관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관계를 위한 만능 해법을 기대하지만 인간관계란 게 애초에 정답이 없는 일이다. 그러니 더 안달하고 옥죈다.


폭탄 돌리기 같은 대화, 책임 회피용 문자 메시지 속에서 문득 쓸쓸함을 느낀다. 하고 싶다, 하겠다는 말은 없고 누가 지시한 일이다, 나는 전달하기만 한다, 내 책임은 아니다 라는 말만 가득하다.


저이는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토록 두려워하고 있나. 나아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나. '나는 당신을 공격할 의지가 없다.' 고 설득하고 나니 이번엔 나를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 신경이 쓰인다. 순식간에 관계의 우위에 섰음을 이용하려는 시도 앞에서 애써 내민 손이 민망해서 거둬들이고 싶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후회는 늦다.


순수한 게 약점이 되고 속내를 터놓는 게 흉이 될까 두려워진지 오래인, 이 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외로울까.


우리는 인간관계의 네트워크에 우리 자신이라는 가닥을 엮어 넣어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우린 결코 몰라요. 우리 모두는 이런 말을 하라고 배웠어요.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스스로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이건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에 들어맞는 말이에요. 무척이나 간단하고 명확한 말이죠.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요. 모험이 뜻하는 바가 그거예요. 요즘에 나는 이 모험은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하곤 해요. 모든 사람이 가진 인간적인 것에 대한 신뢰 – 만들어내기는 힘들지만 꼭 필요한 신뢰 – 말이예요. 그게 없다면 그런 모험은 행해질 수 없을 거예요.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말>, 마음산책)


그 손 내밀기를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문득 마주치는 사려 깊은 문자 메시지, 원만하게 각자의 목적을 잘 드러내면서도 무례하지 않은 어떤 대화들을 만나면 그 순간을 붙잡고 싶을 만큼 소중하다. 그이도 나만큼 외로워봤고 아파봤을거야, 생각하면 심장 근처가 따뜻해지는 것 같고 세상이 살만하게 느껴진다. 그 모든 소외의 시도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냈다는, 그 모든 손 내밀기의 민망함과 허망함으로부터 지치지 않고 살아 남았다는 모종의 연대감.



스스로 생각하려 노력하고,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모순을 줄이려 애쓴 흔적들. 나의 부족한 면을 채워가는 과정을 사랑하고, 마음이 각박해지지는 않았는지 부단히 살펴온 그 시간들은 끝내 삶의 순간 순간에 반짝하고 하나의 별처럼 흔적을 남긴다. 드문 드문 박힌 그 별들을 가까스로 연결하며 우리는 이 넓은 우주를 여행한다. 나도 괜찮고 너도 괜찮은 어떤 지점은 분명히 존재해, 서로에게 알려주며 다시 또 자기만의 궤도를 걸어간다.

 

인간이 소외에서 벗어난다는 건 곧 인간의 해방일거다. 스스로를, 그리고 모두를 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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