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그만 힘들어 하라." 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처럼 울부짖는 모습이었다. 그만 힘들어하라고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그 당사자 보다 더 힘들어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만 힘들어하라는 사람의 얼굴이 짜증스러워보였거나, 무감각해보였거나, 귀찮아보였다면 나는 낯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 물이라도 부어버렸을지 모른다. 당신이 뭔데 그 사람의 힘듦을 착취하는가, 그의 슬픔에 왜 참견하는가. (그렇다고 그 말을 한 사실이 용서되지는 않는다.)
언제부터였을까, 상대의 힘듦이 나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하게 된 건. 모든 일을 이익과 손해로 계산하게 만든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 곳곳을 피폐하게 만들면서부터였을까. 운도 '옮는다'며 재수없는 사람하고는 가까이 하지 말라는 말이 진리처럼 통용되면서였을까.
박민규는 그의 책에서 "아무리 사랑해도 결국 타인의 고통은 타인의 고통일 뿐, 그것이 자신의 고통이 되기 전까지는, 어떤 인간도 타인의 고통에 해를 입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이다. 고통 받는 이를 두고 "내가 더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정말 '힘든' 사람 못봤다.
작가는 문화 전반에 대한 평론을 하고 있지만, 실은 결국 한 가지 이야기를 줄기차게 써내려가고 있다.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라."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려 한다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쉽게 봐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문명의 발달은 타인의 고통을 마치 전시장의 전시물인 것처럼 '이용'하지만, 그런 유혹 속에서도 결코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따뜻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기적, 이해와 연대라는 행위를 기억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섬세한 시선을 유지하며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작가의 말처럼 누군가를 혹은 어떤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 모든 행위는 폭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땀 한 땀 수 놓은 듯 써내려간 실로 품격 있는 언어들을 읽으며 이토록 마음이 뜨거워진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아름다운 말이 뜨거울 수도 있구나. 품격 있는 말이 하는 정확한 평가란 이런 거구나 배우면서 공감하면서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여전히 글을 쓸 때도, 다른 책을 읽을 때도, 공상을 하다가도 이 책을 뒤적인다. 아마 앞으로도 한참은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