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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Aug 05. 2020

한동일, <라틴어 수업>


고백하건데 나는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모범생으로 살았다.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 사춘기가 있긴 했다. 그런데 그 사춘기란 게 소름끼치게도 말수가 급격하게 줄고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 것이 주증상(?)이었다.


대학에 와서는 사정이 좀 달라졌지만, 아무튼 12년 간의 모범생 생활은 나에게 모범생의 삶에 대한 회의를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모범적인 아이들을 보면 무턱대고 좋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 아이들의 내면에 숨겨둔 열망이 뭘까 고민해보는 일이 많았다.




내가 지금 한국인 최초로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를 지내고, 현재는 대학에서 어렵다고 소문난 라틴어와 로마법을 강의하는 저자를 두고 모범생 운운하는 거냐고? 흠. . . 쓰고 보니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비유인가 싶지만.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이력, 필체에 나타난 온화함, 내용에 담긴 박식함을 보며 '모범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쯤되면,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모범이라는 말이 가진 이미지나 편견이 이미 작동하리라.


그는 분명 어떤 면에서 매우 모범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을 증명하듯 책에는 단순히 라틴어 문구 하나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고대 라틴어의 역사부터, 로마인의 삶과 철학을 아우르는 방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떤 사례는 물흐르듯 자연스러워서 마치 저자가 어린 시절 골목에서 겪은 일을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런 내공은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니다. 자신을 넘어서고 또 넘어서며 갈고 닦은 '모범적인' 삶으로만 얻어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저자는 모범적이라는 말로 이 책을 판단하려는 순간마다 늘 아주 부드럽게 그 생각을 배반(?)한다. 가령 그는 삶에 대해 말하면서, 살아가면서 내 손에 달리지 않은 일들이 끊임 없이 일어나서 나를 괴롭힐 거라고 말한다. 그것이 사랑하는 가족일수도, 사람들의 편견일수도, 현실이라는 압박일수도 있다고. 그럼 어떡하느냐? '쌩까고' 제 갈 길을 가라고,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꾸준히 해 나가라고 말한다. 다시 또 저런 것들이 나타나서 괴로우면? 그럼 또 쌩까고 제 갈 길을 가라고. 단지 그것만이 인생을 통해 지켜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과 내가 할 일의 구분' 그게 바로 라틴어의 "Dilige et fac quod vis(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의 진짜 의미라고.




그는 "봄날의 아지랑이(Nebula)를 보듯 자신 안의 진짜 '나'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강에 두고 가야 한다(Postquam nave flumen transiit, navis relinquenda est in flumine)." 고 담담히, 그러나 단호히 되뇌인다.


그래, 내 예상이 맞았다. 어떤 뜨거운 사람들은 차갑게 보인다. 어떤 강한 사람들은 부드러운 말을 한다. 그리고 어떤 모범생들은 실은 가장 반항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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