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기 고백적인 태도에 마음이 약해지곤 한다. 스스로의 단점이나 약점을 스스럼없이 털어놓는 사람을 보면 기본적으로 호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난 원래 그래' 라며 배째라는 태도로 저 말을 쓰는 사람이 있다. 너무 별로다.)
에세이도 좋아한다. 에세이란 게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전하는 장르이니까. 잘 쓰인 에세이는 문학 작품 만큼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동시에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일상 가까이에 있는 듯 하다가 정신차려보면 삶을 관통하는 멋진 비유가 된다. 매력적이다.
그런데 사회 비평 에세이는 그 위치가 좀 더 복잡하다. 우선 자칫하면 교훈적 마무리로 흐르기 쉽다. 이건 어떤 글이라도 피해야 할 결론이 아닌가. 또한 자기 고백적이기가 쉽지 않다. 아무 에피소드에나 자기 밥 먹은 얘기, 친구 만난 얘기를 끼워넣을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어쩌다 스스로를 고백한다 해도 그건 '나도 그랬을지 몰라.' 라는 말 한 마디로 면죄부를 획득하는 고급 스킬처럼 느껴지곤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 비평 에세이가 단순히 교훈적이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담백하게 자기 고백적이면서, 읽는 이에게 질문을 던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권석천의 에세이는 그 어려운 지점을 이뤄낸다. 그는 사회 현상을 비판하면서, 적절히 자기 고백을 덧붙인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지도 심하게 자기 비하 하지도 않고, 정확히 반성하고 성찰한다. 세상이 틀렸다고 말하면서도, 그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가슴 아파 한다. 어디로 가자! 고 외치기 보다는 어디가 좋을까? 물어본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라며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세상의 부조리에 물타기 보다는 세상이 뭐라해도 그러지 말걸 그랬다고 후회한다. 게다가 그는 때때로 유머러스하다. 배꼽잡는 개그를 친다는 게 아니다. 가감 없이 솔직한 말은 가장 깊이 있는 유머가 되기도 한다. 근엄하고 진지하기보다는 깔끔하고 정확한데 웃기기까지 한거다. 이쯤되면 '반칙'이다.
그가 내놓은 자기 반성 혹은 사회 비평의 글은 이상하게도 '나'를 돌아보게 한다. 다같이 모여서서 어딘가를 공격하고 비난하자는 선동이 아니어서, 이 놈의 세상 답도 없고 미래도 없다는 회의주의도 아니어서, 그럼 어디부터 시작해야하냐는 막막함 앞에선 한 인간의 고민이어서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는 읽는 이를 이토록 들었다놨다 해놓고는 이 모든 과정이 결국, '사람에 대한 예의' 일 뿐이라고, 실은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지 않느냐고 담백하게 갈무리한다.
어리둥절한 마음에 두리번 거리다 비로소 깨닫는다. 그가 나를 출발선에 세웠음을. 나는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까. 이상하게도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내가 원하는 어디로든 가도 괜찮다. 그 길에 사람에 대한 예의만 잃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