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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ul 21. 2020

고맙다는 말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백이(공효진)는 우울한 날이면 마을 기차역으로 간다. 그곳에서 동백이가 한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위안을 얻는데, 그곳은 다름아닌 '분실물 보관소'다. 용식이(강하늘)는 동백이의 그런 취미를 보고 이유를 묻는다. 그러자 동백이의 대답. "살면서 이런 저런 말은 다 들어봤어요. '미안하게 됐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고, '사랑한다'는 말은 뭐 대충 들었죠. 그런데 아무도 나한테 '고맙다'고는 안해요. (분실물 보관소를 가리키며) 저기 있으면 하루 종일 사람들이 찾아와서 고맙다고 하잖아요."


사람들은 확실히 잊고 있다. 고맙다는 말이 가진 기적과도 같은 힘을. 아니면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고 자기 마음 속에만 갖고 있는 것이거나.


"우여곡절 끝에 입안에 마취 주사를 네 군데나 놓는 동안 나는 겁에 질려버렸다. 20년 전 사랑니를 뽑던 순간의 극한 공포가 생각나 부들부들 떨렸던 것이다. (중략) 너무 겁을 냈던지 자꾸 나도 모르게 입을 오므리자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힘드신 거 알지만, 조금만 더 입을 크게 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내가 매우 소심하게 아, 하고 입을 벌렸더니, 의사 선생님은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 시간가량 치과에 누워 있는 동안 나는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무려 열 번 가까이 들었다. '고맙다'는 말이 마치 천사의 위로처럼 따스하고 달콤하게 들렸다.   -정여울, <마흔에 관하여>


고맙다는 말은 실은, 정말 고마운 어떤 상황을 따져가며 하는 말이 아니다. 상대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상황에서도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러니까, 고맙다는 말을 내뱉기 위해서 상대가 나한테 뭘 얼마나 잘해줬나를 따지는 순간 저 말은 쉽게 나오지도,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는다. 그저 상대와 내가 서로를 믿고 있다는 것, 우리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이 지구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고맙다는 말이 희귀하다. 어른이 아이에게 고맙다고 하는 광경을 목격하기란 쉽지 않다. 어른과 아이 뿐이랴. 사회적으로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고맙다고 하는 장면을 보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마치 고맙다는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의 권력(?)을 뺏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고마운 일을 '당연한 일'로 만들기 바쁘다.




동네를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 아파트 주차장에서 마주친 어떤 모녀의 대화다. 딸 아이는 이제 갓 유치원에 다닐까 싶은 나이.

"그래서 선생님한테 고맙다고 했어?"

"아니"

"그럼 어떡해! 선생님한테 감사하다고 해야지. 내일 가서 감사하다고 해!"

아이를 윽박지르던 엄마는 아이가 고사리 손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엄마가 짐을 들고 내리는 걸 기다리고, 그 작은 몸으로 문이 닫히지 않게 애쓰는 걸 보고도 빨리 내리라고 다그치기만 한다. 아이는 매번 엄마의 "고마워"를 듣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장화신은 고양이 눈을 깜빡이면서.




고맙다는 말은 힘이 세다. 자식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게 너무 가볍게 느껴져서, 그렇다고 그 큰 고마움을 표현해줄 다른 마땅한 말도 없어서 표현을 참기만 했었다는 엄마는 처음으로 내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나서 "고맙다고 말하고 나니 내 마음이 환-해지는 걸 느꼈어." 라고 한다. 고맙다는 말과 만난 엄마는 나날이 얼굴이 밝아진다. "딸, 이렇게 좋은 걸 난 왜 몰랐을까."


고맙다는 말은 그 자체로 사람을 북돋우고, 다 알 수 없는 괴로움을 보듬고,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을 치유한다. 고맙다는 말은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어서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고맙다는 말은 하는 사람에게도 듣는 사람에게도 행복함을 선물한다.


나는 이제 고맙다고 할 줄 모르는 사람과는 함께 일하지 않는다. 물론, 삶을 꾸릴 때도 가급적 그런 사람과는 거리를 둔다. 고맙다는 말을 할 줄 모르는 건 사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고맙다는 표현을 못하는 걸 넘어서, 상대의 노력을 제대로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언젠가는 내 모든 노력을 빼앗아갈 용의선상에 있다. 꼭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런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는 건, 내 존재를 부정하는 시선과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이중의 고통이다. 그런 고통을 감내해야 할 이유는 없다.


대신 소중한 이들에게는 더 많이 "고맙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이 가진 힘에 대해 쉼 없이 홍보한다. 민망하고 쑥스러워도 나부터 연신 고맙다고 외치고 쓴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주변 사람들이 달라진다. 그들도 더 많이 고맙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신기한 건, 그럴수록 고마운 일이 늘어난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께도, 전한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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