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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ul 09. 2020

그는 정말 화가 났던 걸까?


A는 자수성가한 부모의 외아들이다. 학창시절 공부를 빼어나게 잘했던 A는 명문대에 진학 후 행정고시를 패스했다. 같은 대학 출신의 아내와 결혼 해 한 명의 딸 아이를 두었다. 


야근이 일상인 생활이지만 만족스러운 결혼생활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이었을까, 사랑의 부재였을까. 아내는 때때로 다른 집 남편과 자신을 비교했고, A의 사회적 성취에 대해 늘 무시하는 말투로 응수했다. 야근이라도 며칠 이어지는 날이면 야근을 하는 게 마치 능력이 부족해서인 것처럼 대놓고 비난했다. 특히 딸아이에게 "아빠는 거짓말쟁인가봐. 오늘 일찍 오겠다고 했으면서 또 못온대." 라고 말하는 걸 듣고 있자면,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처음엔 투정이려니, 농담이려니 하며 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자신의 사회적 여건이 당장 좋아지지 않을 상황에서 반복되는 힐난과 비교를 계속 듣고 있기도 괴로웠다. 그렇다고 정색하고 말하려니 왠지 자신이 속 좁은 남자가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A는 평소 아내의 사소한 행동들을 트집 잡아 비난하는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 아내가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라는 걸 떠올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그 날은 오랜만에 야근 없이 퇴근하는 길이었다. 아내랑 딸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을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 지금 오고 있는 거야? 윗집 남편이 글쎄 케익까지 사가지고 우리 집에 인사를 왔어. 근데 당신이 집에 없으니 참 그러네. 빨리 와." 


아내의 말을 듣는 순간, 발걸음을 돌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윗집 남편과 자신을 비교할 아내의 날카로운 말들이 이미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모처럼만에 행복한 저녁 시간을 꿈꿨던 자신의 계획은 산산이 조각났다. 


집에 오자, 예상대로 분위기가 이상했다. 딸 아이는 케익을 들고 들떠 보였고, 아내는 쌩한 표정이었다. 아이를 돌봐주시는 시터님께 들어보니 평소 유치원에서 딸이랑 친하게 지내는 친구의 아빠가 자기 딸과 친하게 지내줘서 고맙다고 케익을 사온 거였다. 이제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한 딸은 반 년 뒤면 학교에 가게 될 걸 생각해서 친구에게 "그 동안 즐거웠어. 고마워." 라는 내용의 쪽지를 써보냈는데 그걸 읽은 그 아이의 부모는 이사라도 가는 줄 알고 부랴사랴 인사를 전하러 온 것이었다. 


평소 감수성이 풍부하고 섬세한 딸 아이다운 편지였고, 두 아이의 우정을 지켜주고픈 부모들의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이었다. 이사가는 줄 알았다는 다소간의 오해는 있었지만, 얼마든지 웃으며 넘길, 기분 좋은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들은 A는 딸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유는 이사간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사가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따졌고, 영민한 딸아이는 절대로 ‘이사’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다고 항변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엉엉 우는 딸아이를 두고 A는 방으로 들어갔다. 눈이 새빨개지도록 자신의 진실을 항변하던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묘하게도 자신의 기분이 나아졌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정혜윤의 <뜻밖의 좋은 일>에는 '리토스트(Litost)' 라는 체코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한 남학생이 동료 여학생과 함께 수영을 했다. 여자는 수영을 잘했지만 남자는 수영을 굉장히 못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홀딱 반했기 때문에 처음엔 천천히 수영을 했다. 그렇지만 물놀이가 재미있어지자 곧 반대편 물가를 향해 나갔다. 남자는 육체적 열등감에 사로잡힌 채 곧 리토스트를 느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병약해서 운동도 못하고 친구도 별로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왜 그래?" 하고 여자가 물었다. 남자는 건너편 강가는 물살이 세서 익사할 위험이 있으니 그쪽으로 헤엄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하고는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여자는 울기 시작했다. 그는 여자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보고 연민을 느끼고 그녀를 껴안았다. 그러자 그의 리토스트가 사라졌다." (중략) "그렇다면 대체 리토스트란 무엇인가? 불현듯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보는 데서 생겨나는 고통스러운 상태이다. (중략) 리토스트는 이중 모터처럼 작용한다. 고통에 복수가 이어진다. 복수의 목표는 상대방도 나처럼 비참해지는 것이다. 이때의 복수는 진짜 동기(네가 나보다 빨리 헤엄을 쳐서)를 말하지 않고 거짓 이유(네가 익사할까봐)를 내세운다. 리토스트는 비장한 위선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정혜윤, <뜻밖의 좋은 일>, 창비)


A가 정말 화났던 대상은 누구였을까. 시어머니에게 들은 핀잔과 비난을 자신에게 더 큰 비아냥으로 돌려주는 아내였을까. 아니면 아내를 지나치게 못마땅해하고 무시하는 어머니였을까. 그도 아니면 이런 상황을 타개하지 못함을 못났다고 여기는 자기 자신이었을까. 더 근본적으로, 그는 정말 화가 났던 걸까? 


그들 중 누구에게 화가 났든, 불행하게도 그 대상은 딸은 아니었다. 더구나 딸은 저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약한 존재다. 그런데도 A는 딸에게 화를 냈다. 그것도 '너를 위해서' 라는 위선까지 뒤집어 쓴 채로. 

리토스트는 인간이 느끼는 비참함의 감정을 위선적인 비장함으로 포장하는 태도다. 작가는 '절대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은 비참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태도는 '청춘이나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의 장신구'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차라리, '청춘이나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의 장신구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읽었다. 


우리는 과연 삶의 순간순간에 느끼는 비참함을 감추기 위해 나보다 약한 누군가를 이용하지 않았나? 나아가 그를 위한 일이라고까지 위선하면서? 


A의 딸은 평소에 입버릇처럼 말한다. "나는 세상에서 우리 아빠를 제일 좋아해요. 나는 우리 아빠를 150% 믿어요." 그는 정말 화가 났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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