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공무원을 퇴직한 어머니와 택시 운전을 하는 아버지 사이의 막내아들이다. 학창 시절 동안 교우 관계가 원만하고 성실했다. 서울 소재의 전문대학을 졸업했고, 사회 생활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부터 방에 갇혔다. 이건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그는 몇 년 째 엄마가 준 체크카드로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하루 종일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 때때로 그 카드를 들고 친구들을 만나러 나간다. 인터넷으로 게임 아이템을 팔거나 중고 상품을 판매해 약간의 돈을 벌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언제나 일시적일 뿐이다. 대학 졸업 후 벌써 10년이 넘게 이어진 그의 이런 생활을 두고 가족들은 처음에는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고, A의 나이가 삼십대 후반이 되자 드디어는 화가 났다. 참다 못한 A의 누나는 A를 따로 만나서 아르바이트라도 고정적으로 해야 하지 않느냐고 설득하지만 A는 묵묵부답이다.
독립하지 못한 길 잃은 자아들
청년들이 멈추고 있다. 독립을 했던 자녀가 사회의 벽에 부딪혀 다시 본가에 들어와 부모의 생활력에 기대 사는 걸 의미하는 캥거루족은 너무 많이 쓰여서 이제는 철지난 언어다. 그뿐인가. 결혼한 자녀는 으레 부모 곁에 집을 얻어 자녀 양육을 부모에게 기댄다. 맞벌이로도 감당하기 힘든 양육비와 집을 얻느라 받은 대출때문에 힘들다는 말을 듣고 자신들의 노동력을 내어주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 오죽하면 60-70대가 주를 이루는 산악회 등 모임에서는 “며느리가 아이를 낳으면 못봐준다는 말을 처음부터 해야한다” “은근히 멀리 하면 알아서 맡아달라는 말을 안한다"며 손자를 돌보는 일을 거절할 묘안을 주고 받는다고 한다.
인간은 어머니로부터의 탄생만으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어쩌면 어머니로부터의 탄생은 아주 작은 시작일 뿐이고 ‘자신’을 구축하고 만들어나가는 진정한 탄생이란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일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두고 “상징적 탄생”이라 명명하며 한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거듭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인간은 어머니가 그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날에 단 한 차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탄생을 해야 할 의무를 부여한다.” 고 말했다. 저출산을 걱정할 게 아니라, 한 아이가 어른으로 탄생하기 위해 이 사회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게 먼저라는 뜻이다. 지금의 세대가 두려워하는 건 아이를‘낳는 것’이 아니라 ‘기르는 것’이니까.
우리는 흔히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진짜 어른이 된다고 말하지만, 스스로 돈을 벌면서도 부모의 노동력에 기대는 많은 이들을 보면 경제적으로 독립하더라도 정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면 진짜 독립을 이룬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가정을 꾸린다는 건 가장 명확한 독립의 선언인데 그 가정의 중추적인 역할을 다시 나의 부모에게 기대도 된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 말이다. 몸은 다 자랐어도 여전히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혹은 벗어나길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독립을 이룰 수 있을까.
내 욕망의 주인이 되어, 독립된 어른으로
아이 한 명을 키우기 위해 드는 돈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거기에는 사교육비를 비롯해 그 아이가 '어엿한' 성인이 되기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의 비용이 고스란히 포함되는데 그 비용이 늘어난다는 건 아이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사회가 아님을 반증한다. 다시 말해 교육을 받고 스스로가 원하는 일을 탐색해서 준비하고,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리거나 혹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을 평생이라고 축약할 때 우리 사회는 저 모든 과정에 ‘타인의 시선’이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의미다. 공교육으로는 남들보다 나을 수 없다고 여겨 사교육에 투자하고, 아이가 원하는 일로는 남들에게 인정받기 어려우니 남들이 선호하는 직업을 고르게 한다. 배우자는 남들에게 꿀리지 않는 조건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고, 신혼집은 남들한테 주소를 불러줄 때 창피하지 않을 정도는 돼야 한다. 남의 기준에 맞춰 살려니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힘들다.
그런데 지금은 역사상 처음으로 부모 세대보다 자식 세대가 못사는 시대라고 한다. 지구는 성장을 멈췄다. 전 지구 면적의 14%에 나눠 살던 인류는 이제 지구 면적의 77%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면적에 ‘이윤’을 기반으로 한 농업 시설이나 산업 시설이 들어섰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안희경, <오늘부터의 세계>, 메디치) 이렇게 산업화로 급격한 경제적 성장을 이뤘던 부모 세대와 모든 경제적 성장이 마이너스로 돌아선지 오래인 자식 세대의 경제력은 엄청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남들보다’ 나아지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고스란히 부모의 노동력 혹은 부모의 경제력에 기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입시 위주의 우리 교육이 가진 가장 취약한 부분은 자신에 대한 탐색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교육은 말 그대로 가르쳐 키우는 일인데, 학력에만 치중한 교육은 아이를 성장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옭아매고 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가 짜준 스케줄 대로 이 차 저 차를 옮겨 타고 학교와 학원을 배회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 ‘취향’ ‘의지’ 보다는 부모의 생각과 취향과 의지를 눈치껏 파악하고 따르기 바쁘다. 현대의 가정에는 아이 대신 ‘고양이’만 있다고 한 과격한 표현이 떠오른다.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부모의 경제력에 겁먹은 채 그 설계대로 따르기 때문에 본인이 실패한 것에 대해 어떤 느낌도 갖지 못한다. 어차피 내 삶이 아니라 ‘부모의 계획’이었을 뿐이고, 내 실패가 아니라 ‘부모의 계획이 실패한 것’일 뿐이니까. 실패하면 다시 기다리면 된다. 부모가 새로운 계획표를 줄 때까지.
‘내가 겪은 고생, 내 자식은 안 겪게 하겠다'는 애끓는 부모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한 번 만 더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어떤 실패도 어떤 경험도 스스로 겪어보지 못한 당신의 자녀가, 당신이 필연적으로 부재할 그들의 나머지 인생에서 실패와 경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말이다. 당신이 가진 재산이나 권력으로 책임질 수 있는 건 실은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아, 내 생각이 짧았다. 아마 어떤 부모들은 자신의 경제력과 권력을 맹신한 채 되려 자식과 거래를 하려고 들지도 모를 일이다. “내 맘에 들게 행동해. 안 그러면 유산은 없어.”
A는 소심한 성격이다. 거절을 두려워하고 실패할까봐 무서워하는 일이 많았다. 그의 부모는 그가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실패할까봐 걱정하면, 그 일을 대신해주거나 안해도 괜찮다고 타일렀다. 만약 A가 한 번이라도,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자신의 실패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부터 뭔가를 배워봤다면, 자신이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모든 걸 걸고 도전해볼 기회가 있었다면. A는 그 소심함에도‘불구하고’ 멋진 어른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그를 감시하는 듯 옭아매는 ‘남보다 더’ 라는 시선의 폭력이, 동시에 내 자식이 고생하는 건 못보겠다는 비뚤어진 사랑이 그를 얼마나 움츠러들게 했을까. '너가 힘든 게 싫다'는 말은 삶에서 겪어야 할 수많은 좌절과 실패 앞에서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넘어진 그 자리에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말해줄 수는 없었을까. 정작 그의 실패가 힘든 건 그의 부모가 아니었을지.
그는 결국 '자신’을 찾을 방법조차 잃어버린 몸만 큰 어른이가 돼 버렸다. 이건 대체 누구의 실패고 책임일까. 불혹을 앞 둔 A에게 방문을 열고 나와 당당하게 생의 첫 실패를 경험하러 가자고 손 내밀 수 있는 사람은,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