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나는 시작하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워낙 의욕적인 성격이라 뭐든 덮어놓고 시작해버렸다. 그네가 좋아! 하면 그네 타기를 시작했고, 고무줄 놀이가 좋아! 하면 고무줄 놀이를 시작했다. 노트 정리가 재밌어! 하면 노트를 잔뜩 사와서 과목 별로 이름표를 붙이고 노트 장수를 세서 단원 별로 나눠놓았다.
어른들은 나무랐다. "으이그, 뭐든 끝을 봐야지, 어째 너는 시작하는 것만 좋아해." "성격이 왜 그리 급해, 좀 진득하게 이어가봐." 그런 말을 듣다보니 내가 정말 시작만 할 줄 알고 끝은 낼 줄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거기까지도 버틸만 했는데 어느새 내가 '시작' 하는 데 겁을 먹게 된 건 좀 곤란했다. 이젠 뭘 좀 해보고 싶어도 재고 따지면서 하면 안 될 것 같은 이유를 찾고, 해봐야 안 될 거라면서 지레 포기하고, 끝장을 볼 게 아니면 뛰어들지 말자 시간낭비야 라며 고개를 젓는 일이 많아졌다.
설마. 이런 게 어른이 되는 건가? 그건 너무 시시해.
나는 시작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열정이 많은 사람이고, 내가 끝을 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월등히 '많이' 시작해서이다. 나는 그 많은 시작 중에서도 정말 좋아하는 일은 꼭 이어나가는 사람이고, 어떤 일은 남들이 아무리 말려도 시작한다.
끝을 꼭 봐야 한다는 것도 강박적이다. 고무줄 놀이에 끝이 어디 있으며(수업 시작 종이 쳤으니 잠시 멈추는 것 뿐), 노트 정리에 끝은 어디 있나. 한 권의 노트를 앞 뒤로 빼곡히 채워야만 끝나는 거라면, 아무 노트나 한 권 집어서 아무 말이나 적으면 노트 정리를 '끝'낼 수 있다. 너무 가벼운 예라고? 더 진지한 예도 있다. 돈벌이에도 끝은 없고(너무 슬프다), 인간 관계에도 끝이 없고(지친다), 다이어트는 또 어떤가(쓰다 보니 요즘 사람들이 피곤한 건 대부분의 일이 끝이 없기 때문?)
에이 모르겠다. 그냥 자꾸, 또, 시작하는 어른으로 살자고 생각한다.
요즘 시작한 일은, 식물 가꾸기, 집 밥 자주 해먹기, 운동하기, 짜증 덜 내기, 이불 깨끗이 관리하기, 조용히 말하기, 꾸준히 글쓰기, 책읽기 등등 아주 많다. 그 일들 중 어떤 일은 순조롭게 잘 되지만 어떤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어렵다고 포기할까? 꼭 그렇지는 않다. 어떤 일들은 어려워도 계속 이어나간다.
나는 매일 변하고, 삶도 그렇기에 그때 그때 내가 바라는 무언가를 가볍게 시작하고 몰두해본다. 시작이라는 말이 주는 청량하고 활기찬 에너지를 그대로 느끼면서, 여전히 내가 무언가에 열정을 느끼고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기분 좋은 감정을 간직한다. 그걸로 충분하다. 시작이 꼭 성공이나 결과로 이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괜찮은 시작은 이미 그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는 마음이다.
그렇게 오늘도 세상의 모든 시작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