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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Oct 21. 2020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살면서 만났던 장애를 가졌거나 사회에서 정하는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다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그러다가 어쩌면 나도 저 '정상'을 벗어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 기준은 갈수록 세분화하고 좁아지고 있으니 어떤 면에서 나는 분명 정상은 아닐 거다.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를 보았던 날을 기억한다. 나는 문소리가 연기한 공주라는 캐릭터가 좋았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그녀가 자유로운 몸이 되어 춤을 추는 장면에선 눈물이 났다. 비틀린 몸으로 비질을 하는 공주 뒤로 햇살이 비추고 먼지가 춤추듯 나풀거리는 장면에선 그녀를 둘러싼 공기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도 좋아하는 영화다. 조제는 다리가 없지만 그녀를 통해 우리는 진짜 결핍이 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물론,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도. 왜냐하면 영화에서 끝내 사랑에 실패하는 건 조제가 아니라 사지육신이 멀쩡(하다 못해 부족이라고는 찾기 어려운)한 츠네오니까. 그가 조제와 헤어지고 나와서 아무렇지 않은듯 걸어가다가 끝내 오열하던 그 장면에서 아마 많은 이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을 거다.




남편이 사고 후 앞을 못 보게 되면서 나는 소수자 혹은 장애인과 더는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나는 내가 주류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남편 곁을 지키며 느낀 건 나 역시 나에게 부여된 조건들 안에 갇혀 살아온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는 무감각하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는 애닳아 했을 뿐. 어쩌면 나는 전적으로 소외되거나 실격당하기 전에 비주류라는 이름 뒤에서 나를 방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날이 가파르고 날카로워지는 '정상' '비정상'의 이분법은 언제나 나를 불편하게 했으니까. 하지만 이 지구에는 내가 모르는 고통이, 아직도 너무나 많다. 그런 고통을 알게 될 때마다 자꾸 고개를 주억거리고 울컥한다. 내 무지에, 실망한다.


그의 책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자처하지만 내가 읽기에는 그들이 지니는 '정체성' 혹은 '세계관'에 대한 꼼꼼한 보고서 혹은 안내서로 보인다. 정체성이나 세계관은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매순간의 선택의 결과다. 중증 장애아 둘을 키우는 루스의 말처럼 "그 아이들이 선물인 것은 자신이 그들을(혹은 그들의 장애를) 선택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정신승리적 믿음이 아니라, 그 아이들을(그 아이들의 장애를) '수용'하기를 선택하는 것. 그리고 그 수용의 실천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반에 걸친 윤리적 결단"이다. 논의가 여기에 이르니 스스로를 소수자라 여기지 않는다 해도 읽어볼 만한, 아니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내가 나를 어디까지 '수용'할지는 살면서 끝내 고민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할 문제니까. 이런 고민은 상대방의 존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걸 놓아버리면 책에서 말하는 '속물' 이나 '품격주의자'가 돼버리고 만다.




이 책의 저자처럼 어떤 지성적이고 빛나는 영혼은 불편한 몸에 담겨 살아간다. 어떤 이는 태어나자마자 질병으로 인한 엄청난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그저 남들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평생을 외톨이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가고 어떤 정신은 처음부터 병들고 비틀려 있다. 적어도 그들의 고통은 사람을 가려 찾아오지 않았다. 한낱 인간인 우리에게는 그저 그것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만 주어진다. 수용하고 살아가는 것. 정체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러니 누군가의 실존을 두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품격을 위해 그들의 존엄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신형철의 말을 빌리자면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일테니까. 무언가를 쉽게 판단하려는 그 모든 시도를 최대한 미루는 일이 모두를 살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는 어떤 정답이나 끝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계속되는 과정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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