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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Oct 22. 2020

변화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문제다.

변화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문제여서 구석구석 바꿔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현실은 완강한 데다가 선의조차도 관계 속에서 뒤틀리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근화, <고독할 권리>, 현대문학)


종종 우리의 믿음은 생활이라는 심판대 위에 선다. 아무리 강력한 믿음이라도 내 생활 속에서 실천되지 않으면 요란한 말로 사그라들고 만다. 생활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물을 얼만큼 넣고 밥을 해야 맛있다는 정보와 믿음이 아무리 강력해도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늘 점심은 없다. 이불은 2주에 한 번 세탁해야 진드기를 예방한다고 굳건하게 믿어도 막상 땀을 흘리며 침대 커버를 벗겨내 빨지 않는 한 진드기는 예방할 수 없다. 누군가를 이해하자, 이해하는 게 사랑이라고 가슴 절절하게 믿어도 막상 그를 만나서 나눈 한 두 마디 말에 이미 그를 미워하고 오해하고 있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맞벌이였던 부모님을 도와 어릴 때부터 빨래며 청소를 도맡아 하던 딸이었다. 명절이나 제사때는 엄마를 도와 온종일 부침개를 부치던. 그런데도 나는 집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어떤 면에서는 게으르고 무책임했다. 그 미묘한 감각의 차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과 '나의 일'을 한다는 것의 차이다. 그것은 일의 전체적인 맥락이나 흐름보다는 내 앞에 주어진 일만 해내면 되는 것과, 지금 하지 않는다고 영원히 하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님을 아는 것의 차이다. 그리고 흔히 그런 차이를 '책임'의 여부로 가른다.


결혼을 하고도 나는 내 삶은 내 책임이라는 말에서 조금은 달아나 있었다. 책임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오해하면서 살아왔다. 특히 나는 나를 '책임'진다는 것을 잘못 받아들이고 있었다. 책임진다는 건 막연하거나 거창하고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나를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깨끗한 공간에 살게 하는 것 전부가 실은 나를 책임지는 일이었다. 그 일들은 (안타깝게도) 사소하고 덜 중요한 일로 여겨지지만, 막상 해보면 생각보다 값지고 소중한 동작들이다.


그렇게 하늘에 붕 떠 있던 책임의 의미를 내 생활에 착 붙이게 되기까지는 그야말로 큰 '변화'가 필요했다. 나는 여전히 뭔가를 쉽게 부탁했고, 누군가에게 의지했다. 호의를 당연하게 여긴 적도 있었다. 지박령처럼 밖에 나가길 싫어하는 나를 대신해서 남편이 편의점과 마트를 오갈 때도, 새벽 출근 길에 분리수거를 내다 버릴 때도, 대형 폐기물 신고증을 회사 컴퓨터로 출력해 올 때도 나는 고맙다고 여기기보다는 너와 내가 우리의 집안 일을 '나눴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표면적으로는 물론 맞는 말이지만, 남편과 나 둘 다 '서로를 돕는다'고 여기는 것과 이 집 안에서 일어난 일은 '나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남편이 아픈 후로 내가 온전히 우리 집의 생활을 꾸리게 되면서 나는 생활이라는 견고한 굴레 앞에 매번 겸손한 마음이 된다. 내 삶의 곳곳에 숨어있는 누군가의 노동에 대해 겸허해진다. 그 노동으로 내 삶이 돌아간다는 걸 받아들인다. 내가 하지 않은 일 덕분에 내가 편안하다면, 그건 '반드시' 누군가의 수고로 얻은 것임을 자주 느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을, 나는 뭔가를 주고 받는 의미로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노동력에 빚지고 있다는 말로도 읽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로 공짜는 없다. 자연스럽게 누군가에게 뭔가를 쉽게 부탁하는 일이 줄었다. 나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자주 실감하지만 오히려 그럴 때마다 손을 내밀어 도와달라고 하기 보다는 우선 그 손으로 서툴게라도 시도한다. 그렇게 나를 건사하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나하나 직접 해내면서 나는 조금 달라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변화는 내가 뭔가를 '다짐'만 하는 일이 줄었다는 것. 돕는 것을 책임지는 거라고 착각했던 과거의 나는 자주 다짐하고 그만큼 자주 실패했었다. 내 몸을 움직여 실천하는 것보다는 머리를 움직여 말하는 게 쉬웠던 게 아닐까. 실제보다 늘 그럴듯해 보이는 머리 속 이상만을 쫓았던 건 아닐까. 하지만 내 머리 속 이상이 얼마나 높고 아름답든, 지금 발딛은 내 현실에서 어떤 것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건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요즘은 다짐하지 않는다. 그냥 한다. (동시에 자꾸 다짐만 하는 일이 있다면 얼른 알아채고 그냥 안한다. 안하고 말만 하는 데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잊고 지내다가 정말 필요해지면 할 거다.) 잔머리 굴리고 포장하기 보다는 일단 해본다. 해보고 어려우면 그때가서 고민한다. 방법을 찾으며 또 시도할건지, 포기할건지. 그러다보니 작은 거라도 경험이 남는다. 다짐할 때는 실패만 남았었는데 생활을 꾸리니 결과가 생긴다. '진짜는 단순하다'는 말을 어렴풋이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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