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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Dec 10. 2020

이원, <시를 위한 사전>



시에 대해서라면 나는 좀 할 말이 있다. 나는 책에 대해 쓰며 꽤나 오지랖을 떨고 있지만 왠지 시에 대해서만은 '내가 이 시를 압니다', 라고 선뜻 말하기가 어렵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퉁명스럽게 굴 줄밖에 모르는 서툰 소년처럼, 나는 시를 사랑해서 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어렵다. 그냥 몰래 혼자 읽는다. 많이도 못 읽고 드문 드문, 한 두 편을 읽고도 내내 생각한다. 곱씹는다. 그런데 시인이 쓴 산문을 만나면 "숨겨왔던 나의~" 사랑을 더이상은 감출 수가 없게 된다. 시를 사랑하면서도 못내 부끄러워하던 마음까지도 시인이 쓴 산문을 보면서 마구마구 풀어놓는다. (뭐가 이래-_- 이상한 사람이다)






<시를 위한 사전>이라는 제목 답게 시의 본문을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구성, 그러면서도 이 글 만으로도 충분하다 느끼게 되는 글들. 이 책에 담긴 이야기에 대한 대답으로 다시 또 책 한 권을 너끈히 쓸 수 있을 거라 생각될 만큼, 닫히지 않고 열려 있는 이야기들. '저두요 저두요' 하면서 내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게 만드는 넉넉함.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이 소소한 일상이 지켜질 때 인간의 일들은 위대한 것이니. 이보다 더 엉망진창이 되지 않기 위해 엉망진창을 "달걀"로 쥐어보는 일. 세게도 가볍게도 아닌, 달걀이 될 때까지." 


"알아야 보인다고 생각하지만 몰라야 보이지요.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고정된 생각을 덧입지 않은 본래의 모습이 보이지요." 


"그러므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창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창밖으로 나와 서 보는 것에서부터. 빛이 어떻게 창을 뚫는지를 보는 것에서부터. 창이 빛을 어떻게 담는지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사랑은 스스로 끌고 가는 시간이므로, 자기 그릇만큼만 담을 수 있지요. 그러나 자주 사랑은 그릇 밖으로 넘치지요. 넘칠 때 사랑을 담은 이는 사랑에 묻힌 채 빛나지요."


"이 시에서 요즘의 제가 고르고 싶은 한 단어는 덤이에요. 덤이니 춤이다. 이 방향을 지지해요."






서정적인 글, 그러면서도 전하려는 말을 또렷하게 하는 글들에 언제나 매료된다. 물론, 나 역시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내가 아직 덜 바라보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모든 글들은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지금 쓰고 있는 대상을 무척이나 오래, 공들여 바라보았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오래 바라보았다고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그 오랜 공들임은 말이 가진 모든 날카로움을 다듬어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글로 드러난다. 


무조건 예쁜 단어를 쓴다는 말이 아니다.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당최 이해가 안되는 형국이 돼버린 형용사와 부사의 전시장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말이 가진 모든 모서리를 다듬은, 말. 무언가를 뾰족하게 찌르지 않고도, 그래서 때로는 뭉툭하게 느껴지지만 실은 정확하고 묵직한 말. 하지만 결코 날 서있지 않은 말. 그 공들임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말. 야단치면서도 사랑하는 말, 울면서도 웃는 말, 웃으면서도 울줄 아는 말, 미워하면서도 보듬는 말. 


내가 시를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는 건, 언제나 부끄럽기 때문이다. 


여전히 덜 바라보고 있는 나를, 여전히 미워하기만 하고 보듬지 않는 나를, 웃으면서도 울 줄 모르고 울면서도 웃을 줄 모르는 욕심 많은 나를, 사랑하기보다 야단치고 싶어하는 나를, 덜 공들인 채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나를 시는 언제나 조용히 타이르기 때문이다. 그 타이름은 어둔 방에서 나 혼자만 겪고 싶은 것이다. 그 부끄러움을 다 내보일 용기가 아직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다.

이렇게 아름다운 책을 소개하기로 해놓고 넋두리를 실컷 잘도 늘어놓았다.


그마저도 이 고운 책이 내게 준 선물임을,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거라고, 또 이렇게 서둘러 결론을 짓는다.


미안한 마음에 이원 시인이 소개해 준 시 한 편을 적는다.





정끝별


내 숨은

쉼이나 빔에 머뭅니다

섬과 둠에 낸 한 짬의 보름이고

가끔과 어쩜에 낸 한 짬의 그믐입니다


그래야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내 맘은

뺨이나 품에 머뭅니다

님과 남과 놈에 깃든 한 뼘의 감금이고

요람과 바람과 범람에 깃 든 한 뼘의 채움입니다


그래야 점이고 섬이고 움입니다


꿈과 같은 잠의

흠과 틈에 든 웃음이고

짐과 담과 금에서 멈춘 울음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두 입술이 맞부딪쳐 머금는 숨이

땀이고 힘이고 참이고


춤만 같은 삶의

몸부림이나 안간힘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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