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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Mar 11. 2021

존 버거, <A가 X에게>


서글픔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나도 그 고통을 알아."라는 말이 상대와 나의 입장을 동등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상대의 고통이 그저 '일반적인 것'이라고 억압하는 말이 되는 것을 볼 때, "괴로울 거라는 걸 알지만, 적당히 괴로워 하라."는 말을 들을 때, 그렇다.


존 버거의 소설 <A가 X에게>는 마냥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약제사인 여인의 연인은 이중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다. 그녀가 살고 있는 감옥 밖의 세상은 감옥만 아닐 뿐이지, '그들'에 맞서 싸운다는 면에서는 감옥과 동일한 공간이다. 그녀는 연인에게 편지를 쓰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약을 짓고, '그들'에 함께 저항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일상이란 총 맞은 소년이 불쑥 들이닥치고, 헬기와 탱크에 맞서 인간 띠를 두르는 일에 뛰어들어야 하며 어제까지 내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작스러운 총격에 죽음을 맞기도 하고, 약을 구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을 자주 마주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소설을 읽는 내내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짐작된다. 먼저, 누군가에게 건네는 편지 형식이라는 점. 더구나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에 내용은 아주 친밀하고 따뜻하다. 솔직하고 형식에 구애 받지도 않는다. 작가가 굳이 편지로 한 편의 소설을 쓰려한 이유 역시 편지가 가지는 이런 낭만적 특성 때문이리라. 또한 편지는 즉각적이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편지를 작성한 사람이 그것을 쓰는 시간과 그 편지를 받아서 읽는 시간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또 소설에서처럼 부치지 못하는 편지나 제때 도착하지 못한 편지 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이 책이 담고 있는 정서, 즉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나아가 그것들과는 다른 시스템으로 살아가려는 두 남녀의 이야기에도 가장 어울리는 선택이 되었다.


다음으로는 작가의 시선 때문이다. 그의 소설 속에서 '원래 그래' 라거나 '사는 건 다 그렇지' 같은 일반화는 없다. 그녀는 감옥에 있는 단 한 명의 사랑을 위해 편지를 쓴다. 그 편지 속에서 그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목소리, 단 하나뿐인 말투, 단 하나뿐인 독서법, 단 하나의 흉터를 가진 사람이다. 그가 객관적으로(이 말이 참 어색하게 느껴진다) 특별한 사람인가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녀가 기억하는 그가 특별한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그가 가진 화상 흉터 하나도, 다시 말해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결점 조차도 그녀가 그를 알아보는 첫번째 표시일 뿐이다. 왜냐하면 "완벽한 건 그다지 매력이 없"고, "우리가 사랑하는 건 결점들"이기 때문이다.



"신뢰가 생기는 과정은 참 이상하죠. 베드에 대해 거의 모르고, 그가 뭔가 숨기는 것 같지만 나는 그를 전적으로 믿거든요. 아마 그의 신체적 특징 때문인 것 같아요. 자신의 말을 듣는 것 같은 그의 몸 때문에요. 말을 할 때 그는 먼저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를 찾아낸 다음, 그걸 말로 옮기는 것 같아요."


"내 아내가, 이제 머지않아 떠날 텐데, 지금 방안에서 신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이미 이별이, 버릇없는 원숭이처럼, 창가에 매달려 있네. . . . ."


"그녀가 마치 시에라를 건너는 만원 버스처럼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죠. 오랜 여정을 겪으며 서로 잘 알게 된 승객들이 그녀 안에서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어요."


"초자(오두막)들이 문을 열어 놓은 채 나란히 늘어서 있어요. 낮에 있었던 말다툼이나 최근에 죽은 사람, 누가 새로 아기를 가졌는지, 오늘 밤엔 어디서 물을 길어 와야 할지를 이야기하죠. 수천 개의 가정들. 그 가정들 하나하나마다 예측하지 못했던 비밀들이 숨어 있어요."


"페르난도의 존경스러운 점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에 솔직해질 수 있게 하는 설득력이었지. 일단 사람들이 솔직해지고 나면 놀랄 만한 이점이 생기거든. 어떤 저항 운동에서든 그건 비교할 수 없는 전략적 이점이지. 우리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면 결국 늘 같은 이야기밖에 할 수 없어. 페르난도는 그걸 알고 있었던 거야."


아이다와 사비에르가 전하는 어떤 사람도 그저 흔할 뿐인, 지루하고 뻔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어떤 보편성도 강요하지 않는다. 설사 그들이 (우리 눈에) 아주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을 꾸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와 그녀의 시선 속에서(결국 작가의 시선 속에서) 그들은 각자가 가진 가장 개인적이고 특별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작가는 그들의 그 모든 이야기를 건너뛰거나, 뭉뚱그리거나, 어떤 기준에 맞춰 분류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 동안 위로 받는 기분을 느낀 건 바로 이런 형식과 그 안에 담긴 시선 덕분이었다.






세상은 때로, 사랑이 굉장한 것인양 바람을 잡다가도, 또 그 사랑이 별 것 아니라고 겁을 준다. 내가 마치 대단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붕 띄워놓고는 금새 얼마나 하찮은 수준인지 비교하고 깎아내린다. 그럴 때 돌아갈 곳은 더 대단한 사랑도, 내가 멋있다는 착각도 아닌, 지금 당장 내 두 손이 움직이는 일이다. 내 두 발이 땅을 딛는 일이다. 지금 내가 내뱉는 숨과 말일 뿐이다. 그렇게 아주 작고 분명한 것들로 돌아오는 것이 어쩌면 이 거대한 과장과 위선의 세계에 맞서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다와 사비에르가 사랑하는 일은 어쩌면 세상에 맞서는 일은 아닐까. 그 둘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함께' 걸어가고 있다. 그들은 대단한 것을 '추구'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실천"을 하면서 산다. 아이다는 편지에 자주 자신의 손을 그려서 보내는데 그건 마치 어떤 정신적인 영역도 지금 내 삶 속에서 이 작은 손으로 일굴 수 있는 일들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는 의미로 와 닿는다. 다시 말해, 멀리 떨어져 있는 당신과 나 사이에 여전히 이 작은 손, 이 간소한 생활, 이 사소한 일상이 굴러 가고 있음이 당신에게 전하고픈 유일한 이야기라는 것. 아참,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곁에 두되, 다른 노선은 정녕 없는 걸까.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안을 연료로 사용할 수는 없는 걸까. 이 시스템으로부터 이탈하는 데에 필요한 용기를 서로 보태기 위한 두 사람. 거대하고 획일화된 악습들의 연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관성을 멈추기 위해 뜻을 같이 하는 두 사람. 시스템의 바깥에서 자기 자신의 내적 질서와 부합되는 새롭고 자그마한 시스템을 함께 모색하는 두 사람. 이인삼각처럼 헛둘헛둘 발을 맞추는 것에 사랑을 사용하면 좋겠다. 목표를 향해서 헛둘헛둘 뛰어가는 게 아니라, 목표를 지워버린 채로 출렁이는 불안의 요동에 리듬을 맞춰 그렇게 하면 좋겠다." (김소연,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문학과 지성사)


"침묵은 언제나처럼 압도적이죠. 내가 받는 것은 당신의 응답이 아니에요. 있는 건 항상 나의 말뿐이었죠. 하지만 나는 채워져요. 무엇으로 채워지는 걸까요. 포기가 포기를 하는 사람에게 하나의 선물이 되는 것은 왜일까요. 그걸 이해한다면, 우리에겐 두려움도 없을 거예요, 야 누르, 사랑해요."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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