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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Mar 18. 2021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나는 자전거를 못 탄다. 한 번 넘어지면 금방 배울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더 두려워져서 자전거를 끝내 못 배웠다. 아주 어렸을 때 보조바퀴가 달린 세발 자전거를 위풍당당하게 타고 가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볼 때면 나는 어린 나를 존경하게 된다. 거추장스러운 두려움이나 겁이 없던 내가 부럽다. 동시에 어른이라고 왜 꼭 두발 자전거만 타야 하나, 공업사에 가서 보조바퀴를 달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자전거를 배워보고 싶어서 한 번은 집 근처 너른 공터에 나가서 오빠에게 무려 자전거 강습을 받은 일도 있다. 대학을 입학한 직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 큰 어른이 자전거를 못 타는 걸 구경하는 어린이들의 약간은 비웃는 듯한, '내가 가서 한 수 가르쳐줘?' 하는 듯한 눈망울이 떠오른다. 자전거가 기울때마다 얼른 페달에서 발을 내려버리는 나를 보다 못한 한 어린이는 나에게 다가와서 "그럴 때 발을 내리지 말고 한 번 더 구르라구요! 이렇게 이렇게요!" 하면서 몇 번이나 힘차게 페달을 굴러 멋있게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또 다른 어린이는 "자전거가 그렇게 배우고 싶어요?" 라고 내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한데 꼭 배워야겠느냐는 질문이었던 것 같기도) 그렇게 한참 동안을 나를 둘러싸고 이런 저런 조언과 충고, 당근과 채찍질을 아끼지 않던 어린이들은 "이제 저 집에 가야 돼요. 자전거 배우고 싶으면 내일 몇 시까지 여기로 오세요." "자전거 못 배워도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라면서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다.


자전거 이야기를 통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어린이들에게는 만만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처럼 나 역시 어린이들과 허물 없이 잘 지낸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어린이들과도 어색하지 않게 인사를 주고 받고 때로는 어린이들과 사는 이야기도 나눈다. 처음 만난 어린이들도 나를 별로 어색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요즘은 세상이 흉흉하니 나와 대화는 친근하게 하면서도 자신이 가야 하는 층수를 누르는 걸 망설이는 어린이들도 많다. 그럴 때면 나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서 화면을 보는 척하거나 거울을 보는 척하면서 어린이가 안심할 수 있게 한다. 이게 맞는 방법인지 의문이 들 때도 많은데 이 책을 통해 낯선 어린이를 대하는 지혜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어린이들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이 아주  장점으로 여겨진다. 때로는 어린이와  지낼  있다는 사실이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검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존재로부터 대가 없는 친밀함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면, 내가   일을 이토록 길게 적는지 이해할 것이다. 어린이가 보내는 사랑과 친절에는 어른이   없는 순전함이 있다. "사랑은 이미 흐르고 " 것이다. 어른의 우려와 달리 "어린이로부터  (어른 )으로.  많은 쪽에서 필요한 쪽으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대해 내내 떠올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라는 질문. 박노해는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고. '나는 지금 사랑할 것을 사랑하고, 분노할 것에 분노하느냐'고. 우리는 분노해야 마땅한 것을 이해하려 애쓰고 반대로 사랑해야만 하는 것들은 불편해하고 미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가는 어린이에 대해 계속해서 궁금해한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말했듯이, 그 관심으로 인해 계속해서 변화한다. 어린이의 눈높이를 배우기 위해 쭈구려 앉아 보고 어린이의 마음을 배우기 위해 어린이가 보이는 아주 작은 반응에도 민감하게 응한다. 그리고 끝내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아직은 "어린이가 어른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살아남아야" 하는 사회에서 어른이라는 이유로, 좀 더 키가 큰 인간이라는 이유로 어린이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존중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지점은 어른인 작가만 어린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어린이 역시 작가를 사랑하고 있다. 어린이를 통해 작가 자신은 이미 넘치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말한다. 힘들어하는 어린이를 위로하면서 "내가 어린 시절의 나에게 말하는 듯"하다고 고백하는 일, 자신의 컴플렉스를 떠올리게 하는 어린이의 질문에 어느 때보다 성숙하게 답하고 설명하면서 "나의 한 부분이 이제야 어른이 된 것 같았다"는 성찰이, "나는 이제 어린이에게 하는 말을 나에게도 해 준다. 반대로 어린이에게 하지 않을 말은 스스로에게도 하지 않는다."는 위로가 작가와 어린이 사이의 사랑을 보여준다.


작가와 어린이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또한 서로를 존중하고 있다. 이 책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두 존재, 두 세계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사랑과 존중은 사람을 자라게 하며, 사람을 낫게 하고, 사람을 나아지게도 한다. 어떤 어른들은 사랑이나 존중을 '배우지 못해서' 할 줄 모른다고도 하는데, 자연스럽게 사랑하고 존중하는 어린이들을 보면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그게 무어든, 받기만 하려는 응석에서 벗어나야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누가 어른이고 누가 어린이일까.








듬뿍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자라고, 낫고, 나아진 작가는 말한다.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임을,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누린 사람이 잘 모르고 경험 없는 사람을 참고 기다려 주는 것. 용기와 관용이 필요하지만, 인간으로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임을,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되고 옳은 말을 찾아야" 함을, 어린이 날에 "어린이 여러분, "가족과 함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을 금지" 하는 세상에서 집이 없는 어린이들도 행복한 어린이날을 보내는 날을. 그리고 그 모든 말은 사랑하는 만큼 존중하라는 것, 혹은 사랑하지 않더라도 존중하라는 것, 모든 존재는 사랑받기에, 또한 존중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어린이를 감상하지 말라. 어린이는 어른을 즐겁게 하는 존재가 아니다." 부끄러운 어른은 이렇게 조금씩 어른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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