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사고를 당한지 9개월 만에 일반 병실로 옮기고 나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집에 있는 안 쓰는 물건들을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병원에서 집에 돌아오면 한밤중이 되도록 집안을 정리했다. 어느 날에는 여름옷이 들어 있는 서랍을 통째로 꺼내서 최근 2-3년 동안 손대지 않은 것들을 골라내어 버렸고, 다음 날에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지난 여름에 입은 기억이 없는 옷까지도 모두 골라내어 버렸다.
책들을 추려 중고로 판매했고, 부엌 서랍에 있는 오래된 주방기구, 안 쓰는 앞치마,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이름 모를 양념들까지 모두 버렸다. 체력이 좀 더 좋았다면 아마 매일 쓰거나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쓰거나, 혹은 선풍기처럼 특정 계절에는 반드시 쓰는 물건들을 빼고 우리 집에 있는 물건들은 모조리 버려졌을 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랜 병원 생활로 내 체력도 바닥나 있었고, 나의 '물건 버리기' 혹은 '공간 비우기' 증세는 잠시 소강 상태를 보였다.
물건이 유난히 많은 집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때 나에게 불필요한 것들, 군더더기들,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에 넌덜머리가 나던 참이었다. 그게 꼭 물건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물건처럼 쉽게 버릴 수 있는 것도 없었기 때문에 우선 물건부터 하나 둘 정리했다. 내가 죽을 뻔한 것도 아닌데, 나는 남편의 위기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을 느꼈던 탓이다. 삶이 얼마나 덧없이 짧은 것인지,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언제나 계속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 또한, 나를 군더더기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전까지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군더더기들의 대장이었다. 내가 가장 자주 하던 말은 "그래도" 였고, "설마"는 말버릇처럼 따라다녔으며, 사람에 대한 미련은 또 얼마나 많은지. 갑자기 연락해서 수업을 같이 듣자거나 무슨무슨 요일마다 밥을 같이 먹자는 동기가 나타나서 반가운 마음에 같이 다니다 보면 "너 ㅇㅇ랑 왜 같이 다니는거야? 걔 요즘 원래 놀던 애들이랑 싸워서 너한테 연락하는 건데. 알고 있었어?" 같은 문자를 심심치 않게 받곤 했던 것이다.
나와 친했던 사람들은 그런 소식을 전하며 나보다 더 분해했다. "그런 애를 왜 자꾸 만나줘!" 그럴만도 했다. 내 앞에서는 둘도 없이 친한 척을 하던 누군가가 뒤에서 나에 대한 온갖 루머와 흉을 보고 다닌다는 걸 알게 된 날 내 친구는 술을 마셔서 벌개진 얼굴로 말했다. "걔랑 다시는 만나지 마"
내 생각에도 나는 좀 답답하게 굴었다. 내가 차선도 아니고 차차차차선쯤 되는 선택지였음을 알고도 "오죽하면" 같은 고급단어를 쓰며 그들을 이해해주곤 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나를 차차차차선쯤으로 여기던 사람들은 차차차선쯤 되는 누군가가 나타나면 (그 기준이 뭔지 여전히 모르겠다) 언제 그랬냐는듯 나와의 이별을 고했다.
그런데 이제 그러기 싫어졌다. 그렇게 만나서 밥을 먹는 것보다는 혼자의 고요를 택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아 참, 나 리뷰쓰는 중이었지.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나에게는 마치 군더더기를 덜어낸 공간, 혹은 그런 삶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물흐르듯 잔잔한 이야기는 기실 특별한 매력이 없어 보이는데도 일단 읽기 시작하자 손을 뗄수가 없었다. 마치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매일 밤 버릴 물건들을 골라내던 그때의 나처럼, 이 소설은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우기 위해서 쓰여졌을 것이다. 글을 읽어나갈수록 많은 것들이 제자리로 (설사 그것이 소멸이라 해도) 돌아가는 듯한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치지 않고 싶은 무언가를 기어이 품은 사람들. 그리고 그 소중한 것들을 기억하고 이어가는 일. 작가는 이 모든 것들을 아름다운 언어에 담았다.
"요컨대 선생님 설계는 수줍음이야. 건축은 애당초 수줍음이라는 단어의 대의어 같은 면이 있잖아? 여봐란듯이 어떤 지점에선가 의표를 찌르려 하지. 그러나 선생님 건축은 눈에 안 띄게 조심조심 신경쓰고 있어."
"한 점의 틈도 그늘도 없는 완벽한 건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런 것은 아무도 못 만들어. 언제까지나 주물럭대면서 상대방을 기다리게 할 만한 것이 자신한테 있는지, 그렇게 자문하면서 설계해야 한다네."
"자연의 형태나 색채가 합리적인 이유만으로 태어났다면 예컨대 꽃에게, 새에게, 나무에게 이다지도 많은 종류와 변화가 초래되었겠는가. 박새의 가슴께에 흑백으로 그려진 무늬는 왜 그렇게 생겼는지, 각각의 개체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형태나 색은 그것을 지니는 자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먼 옛날부터 시간을 들여 찾아왔고, 그냥 계승되어가는 것이다."
"자네는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의외로 완고하니까." 웃음을 머금고 선생님이 말했다. "그 완고함을 소중히 지키도록."
무라이 슌스케의 건축과 그 건축에 담긴 철학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담고 있다. 인간과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어 능동적으로 기능하는 건축, 뽐내는 게 아니라 조화되는 건축, 사람의 생활과 아주 가까운 건축. 이는 무라이 슌스케의 삶의 방식, 일하는 방식이나 사무소를 운영하는 방식에도 깊게 베어 있다. 가령, "나중에 유키코에게 물었더니 오전오후 합해서 최대 열 자루 정도 연필을 쓰는 것이 일의 정확성도 지켜지고, 연필도 정성껏 다루게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보다 더 깎아야 하는 것은 필압이 너무 강하거나 너무 난폭하거나 너무 서두르거나 그중 하나로, 즉 아무 생각 없이 일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선을 계속 긋고 있으면, 어느 지점부터 의식이 흐트러지는 때가 있다. 그 틈을 노려서 실수가 미끄러져 들어오니까 연필이 어떻게 닳는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같은 것이나, "선생님과 우치다 씨는 확실한 공통점이 있었다. 관념적인 말, 추상적인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둘 다 어디까지나 구체적이고자 노력했고, 고객을 전문용어로 얼떨떨하게 만드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았다" 같은 이야기들은 군더더기를 걷어낸 자리에 남아 있는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저 사람들의 연락을 받고, 사정을 다 알면서도 함께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때로는 그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 것은 실은 내 감정이 낳은 군더더기였다. 나는 그렇게라도 모두에게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던 건 아닌가. 나를 차차차차선으로 여기는 마음보다는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었을 절박함에 기댔던 건 아닌가. 싫다고 거절하거나 완곡하게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수많은 기회에 나는 매번 같은 선택을 했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그게 간단하고 편하다 여겼던거다.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이유가 그것들이 불필요하고, 불편하고, 나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군더더기만이 가지는 다양한 감정과 우연들, 예측하기 어려운 매력들을 내려놓고 내가 선택한 것들에 몰두하려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는 군더더기에 쓰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변화이다. 지금 나에게는 내가 한때 좋아한, 간절히 필요로 했던 것들에 대한 예의의 시간, 더불어 그것들이 있어야만 한다고 믿었던 그때의 나까지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소멸하고 말 것이므로 서로의 삶에 혹은 서로의 생각에 지나치게 평가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곤란하다. 서로를 존중하는 선에서, 인간적인 선을 넘지 않는 정도에서, 우리 모두는 그저 예약된 소멸을 향해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지막까지 살아갈 뿐이다.
"얼굴을 든 선생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어. 왼손으로 닦으려고 하셔서 손수건을 드렸지."
마리코는 선생님이 왜 우시는지 자기가 추측하는 것은 삼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