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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May 20. 2021

<여섯 개의 폭력>

은유, 이은혜, 황예솔, 임지영, 조희정, 이모르, 김효진, 이정식


이 책을 읽고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본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내 시험지를 돌려주며 "애는 공부를 잘하는데 엄마가 왜 학교엘 좀 안 오느냐"고 노골적인 불만을 말한 적이 있다. 그것도 반 아이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지금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소위 촌지 문화가 남아 있었고 이상한 논리지만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의 부모에게는 으레 촌지를 좀 더 당연하게 요구하고는 했었다. 선생님은 나를 볼 때마다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자기 몫을 챙기지 못했다는 듯 심술궂은 아쉬움 같은 것이 늘 묻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또 비슷한 선생님을 만났었다. 그 선생님은 우리반 아이들 중 유독 한 아이만 예뻐했는데 그 이유는 짐작하는 대로였다. 그건 반 아이들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일이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은 지각을 하면 두꺼운 50cm의 자로 손바닥을 10대씩 때렸다. 그 일을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예뻐하는 아이가 지각을 하자 그 날은 유일하게 손바닥을 때리지 않았다. 스승의 날이 되고 반장이었던 나는 울며 겨자먹기의 심정으로 선생님께 롤링 페이퍼를 써서 드리자고 했지만 반 아이들 전부가 롤링 페이퍼 쓰기를 거부했다. 결국 스승의 날에 아무런 선물도 받지 못한 선생님은 우리에게 "배은망덕한 것들"이라며 화를 냈었다. 돈 봉투 한 번 가져올 줄 모르는 반장인 나에게 가장 화가 났음은 물론이다.


그뿐인가. 중학교때 어떤 선생님은 방과후에 하던 학급 임원단 회의에 10분 정도 늦은 아이의 뺨을 연거푸 때려 그 아이가 쓰러지는 걸 직접 목격한 적도 있다. (당시에는 체벌이 공공연히 이뤄졌다. 남학교에서는 야구 배트가 부러질 정도로 엉덩이를 맞는 일도 있다고 들었다)




학창 시절이라는 이름 안에는 아름다운 기억만큼 잔인한 기억 또한 공평하게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쓰다보니, 나 그 시절을 어떻게 지나왔지, 좀 아찔한 기분이 든다. 어렸던 우리에게는 그 상황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힘조차 없었기 때문에 피해를 입으면서도 내내 그곳에서 지내야만 했는데.


어렴풋이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릴 때면 아지랑이 피듯 아련하고 아름다운 감정을 느끼다가도 조금만 더 자세히 기억을 들여다보면 그 날것의 감정들과 표정들이 떠오르며 멈칫하게 된다. 그 날것의 감정과 표정들 속에서 누구나 조금은 상처를 주고 받으며 자라는 것이 학창시절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실은 운이 좋았던 건 아닐까.






총 여섯 명의 작가가 자신이 겪은 학교 폭력의 기억을 꺼내어 놓은 책 <여섯 개의 폭력>은 이름 그대로 아픈 책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미 20-30년이 지나버린 그저 어린 시절의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폭력의 상처가 얼마나 오래 (어쩌면 영원히) 지워지지도, 낫지도 않고 그대로 남아 한 인간의 영혼을 움츠러들게 하는지 이 책의 저자들은 똑똑히 보여준다. 이런 살아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어 놓느라 여섯 명의 작가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퀴고 베인 상처 속을 헤집고 다녀야 했을까. 수십 번의 다짐, 수만 번의 심호흡 속에 잘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펼쳐보이는데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었다.


"만약 용서가 그자를 생활 속에 받아들이고, 우연찮게 마주칠 수도 있음을 뜻한다면 나는 결코 할 수 없다. 내 의도와 달리 가해자의 얼굴과 표정과 말에 노출되어야 한다면 그것도 할 수 없다. 손을 잡으라거나 말 한마디만 나누라고 한다면 뒤돌아 도망칠 것이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방인이라면 나에게 잠재적 위협을 가할지 모를 존재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친숙한' 그 애만큼은 절대 안 된다." (이은혜, <열여덟 살의 학교폭력, 28년 후의 기록>)


"비가 내리면 빗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 폭력의 아픔 또한 액체의 속성을 가졌는지, 자꾸 낮은 피해자 쪽으로만 흘러가 고였다. 그 자리는 웅덩이가 되어 피해자에게 흉터로 남는다. 그에 비해 가해자는 폭력의 기억을 깨끗하게 지워버린 채 새로운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반대가 되어야 마땅한데 말이다. 왜 그럴까 고민하다가 폭력과 혐오는 단순하게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폭력과 혐오는 사회 속에서 순환하는 모양을 가졌다." (황예솔, <아픔이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면>)


"나도 교사다. 그래서 더 슬프고, 아프고, 화가 난다. 사람들은 나에게 그들을 용서하고 잊으라 한다. 용서는 가해자가 잘못했다며 사과해야 비로소 해주는 것이다. 14년을 키운 자식인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잊힐까. 멍하니 하늘만 보다가 눈물을 흘린다. 그러면 사람들은 "아직도 저러고 있느냐"고 말한다. 나에게도 가끔은 재미있는 일이 있다. 그래서 소리 내어 웃고 있으면 "자식이 죽었는데 엄마라는 사람이 웃는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평생을 짊어져야 할 천형이다." (임지영, <아들이 죽었다, 학교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 2011년 권승민군의 학교폭력에 대하여>)


"옷을 못 입어서, 집이 거지 같아서, 준비물을 못 챙겨서, 오빠한테 장애가 있어서 학교에서는 나를 조롱거리로 삼았고, 아이들은 나와 짝꿍이나 조원이 되는 것을 꺼렸다. 장난감처럼 괴롭혀도 되는 아이로 낙인찍혔고, 담임 선생님조차 내가 참아주길, 문제 삼지 않아주길 바랐다." (조희정, <장애가족 혐오와 소외의 기억 - 가정폭력과 학교폭력에서 살아남은 생>)


"누군가가 '네가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봤다면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고 창피한 일도 아니야'라고 미리 말해줬더라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까.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아무리 떠올려봐도 기억나는 사람이 없다. 가장 가까운 부모님 조차, 집이 잘살았을 땐 두 분 다 맞벌이하느라 바빴고, 집이 못살았을 땐 부부싸움 하기 바빴으니깐. (이모르, <그들은 왜 하필 나를 괴롭히기로 했을까?>)


"이쯤 되면 삶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진다. 나는 매 순간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말이다. 학폭 피해자들은 절절히 느낄 것이다. 하루를 보내고 나면 또 하루가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따라서 '용서'나 '화해' 같은 말은 꺼내지 말았으면 좋겠다. 가해자는 용서를 구할 마음이 없고 피해자도 용서할 마음이 없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 지옥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를 짐작도 못 할 것이다. 그 고통의 기억은 시간이 지난다고 옅어지지 않는다. 그냥 그 상태로 기억 속 어딘가에 봉인되어 있을 뿐이다." (김효진, <1984년의 봉인된 기억>)






무탈하고 잔잔하게 보이는 삶의 이면에 날카롭게 할퀸 상처를 품고 사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우리들은 상처를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상처를 대부분 모른 척 하며, 괜찮은 척 하며 산다.


상처를 돌보는 첫 번째 걸음은 유난을 떨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해본다. 상처 받은 이를 '유별나게' 쳐다보지 않는 것, 그들을 호들갑스럽게 위로하지 않는 것, 지나치게 가엽고 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것 말이다. 그 유난 속에는 '위로하는 괜찮은 나'를 내세우려는 이기심이 담길지 모른다. 그마저도 조심할 때, 그러니까 내가 당신의 상처를 위로한다는 의식보다 상대의 그 상처가 더 중요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음을. 김진영의 말처럼, "사랑보다도 중요한 건 상처를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일 테니까.


상처 받아 본 이들은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기 힘들지만, 동시에 상처 받아 본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공감과 지지의 언어가 있음을 나는 믿는다. 상처 받아 본 이가 다른 상처 받은 이를 품고 보듬는 그 숭고한 과정을 나는 사랑한다. (물론 상처 받은 사람이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섯 명의 저자가 내놓은 이야기들은 그들의 아픔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타인의 아픔을 향한 손내밀기이며, 그 고뇌와 결심을 나는 사랑한다.




덧. 폭력과 혐오는 단순하게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고, 폭력과 혐오는 사회 속에서 순환하는 모양을 가졌으므로 우리는 폭력과 혐오가 재생산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황예솔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누군가를 향한 폭력과 혐오는 흐르고 흐른다. 그것이 어디로 흐를지는 모르지만 어디도 예외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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