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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un 10. 2021

편혜영, <어쩌면 스무 번>


"소설을 쓰는 동안 써야 할 장면보다 쓰지 않을 장면을 자주 생각했다.

기어이 쓰지 않은 그 이야기들이 어쩌면 이 책에 담긴 소설들의 진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말 중)


어딘가 부서지고 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내 심금을 울린다. 하지만 어딘가 부서지고 깨진 이야기라면 어떨까. 그 역시 매력적일 수 있을까.


편혜영의 소설은 미완성의 미완성으로 계속 나아간다. 그것은 미완성된 상태이기 때문에 완성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소설에서 그려내려는 현실이 그러하기에 끝내 미완성으로 끝난다. 그녀의 이야기들은 어느 한 군데가 부서지거나 깨진 채로 멎는다. 울 듯 울 듯 하다 말고, 달려 나갈 듯 달려 나갈 듯 하다 만다. 하지만 그것은 소위 '열린 결말'의 그것과는 다른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이 너무나 명확해서 나는 그쪽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동시에 그녀가 그리는 서늘한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상상해야만 하는 것을 상상하도록 하는 것. 대답해야만 하는 것을 묻는 것. 언젠가 끊어졌던 내 기억 속 누군가를, 어딘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 그러니 그녀의 소설 속에서는 미완성이 완성의 형태인 것이다.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시점에서 끝나버리는 이야기, 하다 만 듯한 이야기, 우리에게 뭔가를 잔뜩 감추고 있는 이야기들. 우리는 분명 들어야 할 말이 있는데 작가는 끝내 그 이야기만은 해주지 않는다. 그녀의 이야기들은 울음을 토해내는 게 아니라 울먹거리면서 다시 또 걸어가는 이야기, 절뚝거리는 그대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아내는 그간 많은 걸 잃어왔는데 믿음이나 신뢰, 약속 같은 것만이 아니었다. 유머와 여유도 잃었다." ('어쩌면 스무 번' 중)


"형들이 옷차림을 가지고 놀려도 그는 개의치 않고 실실 웃었다. 놀림을 당하고 조롱거리가 되는 일에 익숙한 것 같았다. 형들의 우정에는 확실히 위계가 있었다." ('호텔 창문' 중)


"죽은 친구랑 같이 산에 갔던 친구가요, 자기는 매주 예배를 보러 간대요. 예배가 끝나면 꼭 봉사도 한대요. 식당에서 교인들한테 밥도 퍼주고 청소도 한대요. 예배당 바닥도 닦고 길쭉길쭉한 의자도 죄다 걸레로 문지르고 교회 마당에서 쓰레기도 줍고 비질도 하고 계단도 쓴대요. 비가 올 때는 비를 맞으면서 그걸 다 한대요."

그는 이진수를 빤히 쳐다봤다.

"자긴 그걸로 다 했대요. 충분하대요." ('홀리데이 홈' 중)


"무영은 멀쩡한 다리에 두 달간 깁스를 했다. 할 필요가 없었지만 엄마에게 부탁했고 엄마가 정형외과 의사를 납득시켰다. 깁스를 푼 후에도 다리를 절고 다녔다. 도시락은 늘 남겼고 체육과 교련 시간에는 교실에 남았고 수업시간에 질문을 받으면 입을 꾹 다물어 선생을 질리게 했다. 아직도 동창을 만나면 다리 저는 시늉을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잊어버렸다. ('리코더' 중)


"우리가 불리해서 키운 전장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낱낱이 드러낸다고." ('후견' 중)






그런데 참 이상하다. 드문드문 잘려나간 듯한 이야기들, 듣지 못한 말들과 도통 알 수 없는 결말 속에서도 나는 그 이야기들이 전부 이해되었다. 아픈 아버지와 역시 아픈 남편을 데리고 시골로 향한 여자의 삶을, 뜻하지 않게 누군가의 죽음으로 자신의 목숨을 건지게 된 한 인간의 번뇌를, 군에서의 감춰진 죽음과 비뚤어진 권력의 모양을, 모두의 죽음으로부터 살아 돌아온 억세게 운 좋고 동시에 불운한 청년의 얼굴을 나는 알고 있다. 가족과 책임이라는 굴레의 갑갑함을, 온갖 거짓으로 쌓아올린 욕망의 끝을, 끝날 듯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지난하고 가난한 삶을 나는 본 적이 있다.


누군가의 공포가 누군가의 미련이 누군가의 죄책감이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는 세계. 그녀의 소설 속에서 우리는 모두 허우적거리지만 어디에도 닿지 못한다. 울먹이지만 울지 못하고 뛰쳐나가고 싶지만 도망치지 못한다. 우리는 그걸 다 알면서도 다시, 또 다시 그저 고개나 주억거리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게 내 탓이냐고 버럭 화내면서 꾸역꾸역 살아간다.


그렇다면 울지도 도망치지도 못하면서 끝내 살아가는 우리는, 어디서 만나게 될까, 어떤 얼굴로, 무엇이 되어 만나게 될까.


그녀가 감춰놓은, 혹은 생략한, 아니 어쩌면 그렇게 해서라도 꼭 기억하게 하려던 그 진짜의 이야기들을 내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해할 때 나는 슬픈 마음이 되었다. 그녀와 나, 우리들 사이의 약속이 좀 더 아름다운 것이었다면 좋았을텐데.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약속된 그 이야기들이, 그 말들이 아픔이 아니었다면 좋았을텐데. 우리의 약속이 슬픔의 자리에서 완성될 때 나 역시 슬펐고 도망칠 수 없는 현실에 가슴이 먹먹했다.


맨 마지막 소설에가서야, 그것도 소설의 말미에 가서야 겨우 내뱉었던 "한 사람한테 좋은 일은 다른 사람한테도 좋은 일이 돼"라던 희망의 말은 끝내 "한 사람에게 좋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거라고 했지만 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자 여러 사람이 궁지에 몰렸다. 미래는 바닥나버렸다"는 지극히 비관적인 결과로 이어지고, 나는 겨우 잡았던 희망의 끈을 황망함 속에서도 부여잡는 것이다. 울지도 도망치지도 못한 채로, 그녀가 던져준 그 말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녀가 과연 그걸 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의 이야기들을 오래 붙잡고 있을 것 같다.


덧. 나의 상상이, 그 '약속'이 오해라면? 그게 단지 나의 비관적인 시선이나 비뚤어진 성격 탓이라면?


그럼 좋겠다.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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