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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un 17. 2021

읽고 쓰는 일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남에게 내가 한 행동을 변명할 때 말고, 내가 나에게 저 말을 쓰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스스로의 삶을 예측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 역시 그랬다. 그 다음에는 이렇게, 그 다음에는 이렇게 됐을거라는 예상은 언제나 보기좋게 빗나가고 나는 번번히 예상불가능한 어느 지점에 덩그러니 도착해있곤 했다.


그래서 일 년 동안 책을 읽고 한 주에 한 권씩 리뷰를 한 것을 자축하는 글을 쓰면서도 벌써? 하는 마음이다. 나에게는 그냥 '매일'이 있었을 뿐이다. 아무리 돌이켜봐도 거창한 명분이나 대단한 다짐은 없었다. 절대 빼먹지 않고 연재하겠다는 생각도 없었고(그런 다짐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걸 통해 당장의 큰 성공을 할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다만 '매일'이 있었다. 언제나 새로운 하루, 겁 없이 들이닥치는 변화의 하루, 포기하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하루, 눈물이 가득한 하루. 그 모든 하루하루가 모여서 다시, 일 년을 기념하는 하루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2020년 6월부터 현재까지 매주 한 권의 책을 리뷰하고 있다. 내 글이 서평이냐 독후감이냐 묻는다면 나에게는 적당한 대답이 없다. 서평과 독후감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입장도 있지만, 나는 정희진의 말처럼 "좋은 서평은 결국 좋은 독후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책을 읽다보면 이런 훌륭한 학자(혹은 작가)의 생각도 빌려올 수 있다. 나는 이런 말들에 기대서 서평이나 독후감이라고 구분하기 어려운 나만의 글들을 써오고 있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어떤 원칙도 없이 내키는대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우선 나는 책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최소한으로 언급하거나 가급적이면 직접적으로는 언급하지 않는다. 책의 내용은 내가 요약하는 순간 '나의' 선택이 개입되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본래의 논지가 잘못 전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줄거리 요약은 '내 생각'은 아니므로 그것들로 내 글의 분량을 채우기에는 탐탁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럼 뭘 쓰느냐.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나의 기억이나 생각, 그 책을 통해 내가 알게 된 것들을 곱씹으면서 결과적으로는 그 책을 통해 '내가 변화된 지점'을 쓰려고 한다. 그것이 나의 생각이든 태도든 시선이든 편견이든. 책에서 수없이 많은 좋은 이야기를 읽어도 내 마음에 남는 게 하나도 없다면, 내 언어로 다시 말해질 수 있는 게 없다면, 나는 서평을 쓸 수 없다. 나아가 책이 나를 변화시키고 달리 보게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그 책에 대해서도 나는 서평을 쓸 수 없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책을 읽었지만 정작 나는 한줄의 서평도 쓰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책을 읽는 동안 그 책의 줄거리, 등장인물, 사건, 혹은 작가의 내밀한 이야기들이 나의 내면을 건드리고 그 많은 자극들 중에서도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들을 추리고, 다시 또 그 중에서 책이 말하려고 하는 것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고른다. 내 지식이 좀 더 깊고 넓다면 어떤 이론이나 사상가와 책이 자연스레 연결되겠만, 나는, 그저 나이므로 그저 책을 읽는 동안, 혹은 읽은 후에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들여다볼 뿐이다.


그건 내가 '내가 아니었다면' 어떤 다른 지점을 느꼈을거라는 감각이면서, 가끔은 '내가 부족해서'라고 느껴지는 바로 그 지점이기도 하다. 실제로 같은 책을 읽고도 서로 다른 것을 보고 기억하고 느낀다는 건 나에게는 한동안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일 같았다. 부끄럽게도 나는 오로지 타인을 통해 나에게 없는 것만을 찾았다. 나는 왜 저렇게 읽지 못했을까, 나는 왜 저 구절을 기억하지 못할까.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심지어 어떤 수준(?)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마저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가 그런 글을 써내는 것은 그가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것일테니까. 바꿔 말하면 내가 이런 글을 써내는 것 또한 내가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것일테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내 마음 속에 부담스럽지는 않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은 책임감이 찾아왔다. 그건 단지 '좋은 글'에 대한 부담이 아니라 차라리 '좋은 삶'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서평(혹은 리뷰, 혹은 독후감) 쓰기가 쉽지 않다. 그건 내가 읽은 책이 내 안을 통과하고, 내가 가진 자원들을 하나하나 두드려보고, 내가 쓸 수 있는 감정들을 점검하는 과정이니까.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인지, 내가 알고 있는 건 어디까지이며,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인지를 매번 확인하는 일이니까. 좋은 책을 읽은 후에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볼 때 느끼는 부끄러움이나 자기 반성의 마음이 있다. 독서는 필연적으로 나를 뒤집어보고 새롭게 들여다봐야 하는 과정이다. 이건 김영하가 말하는 독서의 의미와도 연결된다.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것이다.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시작한 이 일이 결국 나를 전복하는 가장 위험한 일이면서, 동시에 나를 위로하는 가장 안전한 일이 되었다. 책상에 앉아 텅 빈 화면을 바라보며 나의 생각을 따라가보는 일이, 내 가슴 한 켠이 콱 찔리는 것처럼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글을 만나는 일이, 그리고 그 책들을 나의 언어로 다시 이야기해보는 일이 나도 몰랐던 나를 매일 만들어간다.


가끔 전에 썼던 글들을 읽다보면 어느 날은 부쩍 그 글들이 어딘가 촌스럽고, 낯뜨겁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내가 조금은 성장했나? 하는 뿌듯함도 느낀다. 그리고 생각한다. 불과 몇 년만 지나도 이 글들이 내 손발을 오그라들게 할 거라고. 그때는 얼굴 좀 붉어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거라고. 그 날이 부끄러워서 아무것도 쓰지 않겠느냐, 남기지 않겠느냐 스스로에게 묻고는 언제나 같은 대답을 한다. 이 글들을 쑥스러워할 그 날은 결국 읽고 쓰는 '매일'이 없다면 오지 않을 거라고. 내가 변화하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언제고 내 글은 나에게 '만족'뿐일 거라고. 그래서 괜찮다고. 내 인생이 어디로 갈지, 내가 계속 읽고 쓸 수 있을지 나조차도 알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한 계속해서 쓰고 또 쓰라고. 읽고 또 읽으라고. 읽고 쓰는 일은 나에게 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을 보게 하는 일이고, 당연하던 것을 새삼스럽게 여기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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