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을 걸어올 수 있었던데는 분명 때때로 나를 응원하고, 부끄럽게 하고, 북돋아준 누군가가 있었을 터. 우선은 책장으로 간다. '읽기' 혹은 '쓰기'와 관련된 책들을 고른다. 아쉬워할지도 모르겠지만,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가지 내려가서 써라>라든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는 제외했다. 나까지 뭘.
1. 정혜윤 <삶을 바꾸는 책 읽기>
"박완서 작가를 좋아했어. 그녀도 힘들게 살았잖아. 아들을 잃고 남편도 잃고 어떻게 글을 썼을까 궁금했어. 내가 책을 읽을 때 항상 궁금했던 것이 한 가지 있었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걸 말로 표현하지?' 그거였어. 생각만 해도 속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열불 나는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표현할 수 있었을까? 정말 궁금했어. 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과 수치, 모욕을 겪었어. 그런데 그 말로 할 수는 없는 게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야. 나는 말로 표현 못 할 걸 남들이 표현한 걸 볼 때 기뻤어."
그녀의 글을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그녀의 글은 글자이면서 동시에 힘이고, 에너지다. 글자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아픔이고, 슬픔이다. 그녀의 글은 단지 아름답고 유려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 지나치게 길고 긴 문장을 쓰는 그녀지만, 나는 한 번도 그녀의 글이 '소용'없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녀의 글은 언제나 정확히, 소용이 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글을 가장 든든하게 뒷받침해주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그녀의 어마어마한 독서량이고, 다른 하나는 열린 마음으로 듣는 '타인의 목소리'다.
이 책 역시 제목처럼 책 읽기와 글쓰기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그녀만의 언어로 들려준다. '책을 읽는다고 인생이 바뀌지는 않잖아'라는 말을 두고 오락가락 하는 마음을 가진 분들에게 추천한다. 아, 물론 저 말을 듣고 인생이 왜 안바뀌나! 라고 생각하거나 인생은 절대 안바뀌어!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도 추천한다.
2. 김영하 <읽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몰개성적 존재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 바로 우리 안에 나만의 작은 우주를 건설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현실의 우주가 빛나는 별과 행성, 블랙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크레페케이크를 닮은 우리의 작은 우주는 우리가 읽는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 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와 맞설 존엄성과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김영하는 '이상한 것까지 알고 있는 말 잘하는 소설가'다. 그의 책 <검은 꽃>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빛의 제국> <오빠가 돌아왔다>등을 읽은 독자이면서, tvN의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시리즈의 반고정 멤버로 활약하는 모습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본 시청자이기도 하니까. 그가 들려주는 '저런 걸 알아서 어디다 쓰나'싶은 이야기들은 잡학의 수준을 넘어 때로는 '신비'에 가까울 지경이다. 분야도, 관심사도 정하지 않은 그 광대한 지식을 그는 아마도 '책'에서 얻었을 터.
그가 들려주는 '읽기'에 대한 철학은 그의 명료하고 수려한 문체에 담겨 순식간에 읽는 이를 설득한다. 인간이 이토록 파편화하고 심지어 인간 자체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데이터'로 여겨지는 세상이라 해도 (그 세상 역시 인간이 만든 것이긴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책을 읽음으로써 하나의 존재로 남을 수 있다. 나의 철학과 취향을 가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말이다. (참고로 김영하의 산문 시리즈 <읽다> <보다> <말하다>는 그가 가진 삶에 대한 철학 즉, '개인주의'에 대해서도 엿볼 수 있다.)
3.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쓰기의 말들>
"글쓰기는 오직 글쓰기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라면 글을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백여덟 가지다. 상황에 따라 백팔 번뇌로 살아난다고 할까." ('쓰기의 말들' 중)
"글쓰기는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동작이다. 낫이 아니라 낫질이다. 혼자서 자문자답의 노동을 반복하다가 우리는 잠시 친구로 만나는 것이다." ('글쓰기의 최전선' 중)
나는 그녀의 글을 읽으면 울컥한다. 그녀처럼 글과 삶이 하나가 되어 말이 곧 행위고 행위가 곧 철학이 된 작가가 있을까. 그녀의 글 속에서는 그녀의 사상이 그녀의 삶이 제각각 자기의 춤을 춘다. 그녀는 지금 여기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아주 가까운 생활인으로서, 동시에 이토록 깊고 아름다운 철학을 사유하는 작가로서 동시에 내 곁에 온다. 때론 어지러울만큼 다른 두 개의 자아가 그녀의 글 안에서는 절묘하게 조화롭다. 그녀의 어느 책이든 그렇다. 그녀는 '아름다운 말' '아름다운 생각'이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설득할 수 있는 작가다.
<쓰기의 말들>은 '글을 쓰지 말아야 할 백여덟가지 경우'에 떠올리면 좋을 글귀들을 담았다. 물론 그 글귀에 얽힌 그녀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읽다 보면 우리는 곤란에 처한다. 이 책을 어서 다 읽고 싶기도 하고 어서 책상 앞으로 가서 뭐라도 써야 할 것 같아서.
<글쓰기의 최전선>은 글쓰기 모임을 통해 만난 학인들로부터 얻은, 그녀 또한 새삼 다시 깨닫고 정제한 그녀만의 '글쓰기 강좌'다.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는 부제처럼, 삶을 통과하는 글, 삶을 바꾸는 글을 써내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글쓰기 실력 말고도 내 마음의 키마저 자라게 한다.
4.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한계를 넘는 고통 속에서도 인간이 살아남는 것은 '시간이 약'이어서가 아니다. 그 시간에 삶도 자아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없었던 일로 돌아간다는 의미의 '회복'은 불가능하지만 고통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다.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일 수도 있고, 헤어진 이들과 평화롭게 다시 만날 수도 있다."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중)
"위로란 받는 것이 아니라 깨달을 수 있는 마음임을 배울 수 있다."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중)
"고통에 대한 연구는 결국 글쓰기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철학자 김영민은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내 의견을 부연하면 공부는 쓰기 혹은 쓰기의 방법이 아닐까. 쓰는 과정이 공부가 아닐까. 고통이라는 주제와 (자신을 포함한) 고통 받는 사람에 관해 쓰는 것은 거리 두기, 동일시, 자기 연민, 호소, 고통을 들어주지 않는 이들을 향한 분노, 절망, 희망, 제시 등 수많은 사유 방식을 넘어야 한다. 더구나 모두가 작가인 이 시대에 고통이라는 주제는 '사연 팔이'라는 최근 출판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중)
뼈를 맞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싶다면 그녀의 책을 읽자. 특히 읽기와 쓰기에 대한 그녀의 한치의 양보도 없는 공명정대한 태도는 가끔은 정말 내 명치가 얼얼한 기분이 들게 한다. '재미있고 쉽게 써주세요'라는 메일을 자주 받는 그녀지만 그녀의 글이 어려운 건 다루기 어려운 내용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들의 삶에 대해, 그들을 외면하고 고립시키는 사회에 대해, 하지만 다시 (무작정) 비난하거나 회의주의에 빠지는 태도에 대해 결코 쉽지 않은 언어로,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들을 해내고야 만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총 5권 예정) 중 현재 총 세 권이 발행되었고, 그 세 권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이야기는 인간의 고통, 아픔, 소외, 차별, 불평등, 화해, 용서, 존엄성 등이다. 어떤 단어 하나도 도저히 쉽지 않을 이 이야기들을 그녀는 자신의 책 제목처럼 '자신을 알아가면서,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고, 편협하게 읽으며 치열하게' 쓴다.
덧. 일 년 동안 찾아와서 읽어주시고 생각을 나눠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