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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ul 01. 2021

당신이 원하는 그것을 원해도 된다고

캐럴라인 냅, <욕구들>


내가 정말 슬플 때 나는 우연히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때까지 신형철 평론가를 몰랐다. 단지 내 슬픔을 생각하며 책을 고르다가 책의 제목과 표지 사진에 이끌려 충동 구매했을 뿐이다.


그런데 충동 구매의 결과가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책 제목 그대로 '슬픔'을 공부해야 한다는 걸 처음으로 배웠다. 가끔 나의 절박함이 나를 도울 뭔가를 끌어당기는 건 아닐까, 조금은 신비주의적인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내내 그 우연에 감동했었다. '슬픔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제목을 가진 수많은 책들 중에 꼭 이 책을 고르다니' 하면서. (별걸 다 감동한다)


과연 슬픔은 내가 배워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나는 슬픔에 대해 잘 몰랐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내 생각에는) 자신의 슬픔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잘 모른다. 잘 모른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는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자기가 느끼는 감정인데도 그 감정의 실체에 다가가기 힘들다. 자기 표현이 중요한 진짜 이유는 실제로 '발화'하는데 의의를 둔다기보다는 차라리 '제대로 알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자기가 자기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그 감정의 주체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슬픔이 내게 준 낯선 압도감, 지치지 않는 감정의 소용돌이, 멈추지 않는 눈물 앞에서 나는 적어도 '내가 미쳤나?'라는 생각을 하며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배웠다. 나아가 나의 슬픔을 표현할 말을 배웠고, 슬픔을 통과하는 몸짓을 배웠다. 그렇게 나는 슬픔에 대해 아주 조금 알게 되었고 비로소 슬픔이 내게로 왔다. 그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캐럴라인 냅은 말한다. 당신의 욕구들에 대해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당신 안에서 당신을 당신이게 하는, 당신을 쥐락펴락하는 그 욕구들이 어떤 것인지, 그 욕구들이 진짜 당신의 것인지, 당신의 것이 아니라고 외면하거나 놓쳐버린 욕구는 없는지 묻는다.


그러니까 이 책은 신형철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욕구를 공부하는 욕구'랄까. 원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헤매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자세하고 친절하게 '당신이 저건 절대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고 몸서리치는 그것까지 전부 포함하는 것이 욕구'라고 말해주는 책. 감춰둔 그 많은 욕구들에게 이름표를 붙여주는 책이다.




그녀의 사유와 글이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개개인이 욕망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을 무조건 사회의 탓이라거나 모자란 개인의 탓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가급적 많은 가능성을 열어둔 채로 - 자신의 고통스런 과거, 자기 부모님의 내밀한 사연까지도 - 개인이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는 길을 걸어간다. 그럴 때 그녀는 "내가 맞아"가 아니라 "이렇게 하면 어때?"라고 말한다.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해서 비로소 인간 개개인의 욕망이 - 억눌리고, 소외되고, 심지어 누구의 욕망인지도 모를 주입된 욕망들까지도 - 제자리를 찾고 실현되는 이야기로 이어질 때, 한 사람의 이야기는 단지 '사연 팔이'에서 멈추지 않는다. 사연 없는 글은 없지만, 그녀처럼 자신의 사연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자신의 사연이 세상의 전부라고 우는 소리 하지 않을 때, 읽는 이는 공감한다. 눈물 흘린다. 변화한다. 자기 이야기로부터 벗어나는 건 말 그대로 그녀가 '새로 태어났다'는 뜻일테니까. 정희진의 표현을 빌자면 "고립감, 자기 연민, 자기 방어, 자의식을 지양하는 글쓰기는 환골탈태, 재탄생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녀의 사연에서 한 걸음 물러섰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녀의 사연에 더 집중하게 된다. '삶을 완전히 바꿔놓은' 마트에서의 쇼핑(그 날 이후로 그녀는 거식증에 걸렸다), '숨을 들이 쉬면 낱낱의 갈비벼가 완전히 드러나고 마치 팔뚝처럼 잡히던 허벅지'에 대한 이야기, 부모님의 서로 다른 숨겨진 욕망이 충돌하던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해 '우리 집 현관에 들어서면 유화에서 나는 톡 쏘는 테레빈유 냄새와 스파게티 소스 냄새가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는 이야기까지(그녀의 어머니는 그림을 전공함). 우리는 그녀의 사연에서 함축적 의미를 읽어내고, 그것을 나의 경험과 비교해보고, 나는 나에게 뭐라고 말해주고 싶은지 고민하게 된다. 그녀는 그녀의 사연을 통해 읽는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끄는 것이다.


"당신의 필요들이 당신을 압도하는가?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 필요를 충족해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는가? 심지어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말라."


"자유는 권력과 같지 않다. 이걸 짚고 넘어가는 게 중요하다. 선택할 자유도 실질적인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의 중량이 어떤 식으로든 밑받침해주지 않으면 오히려 안정을 깨뜨리는 느낌, 지속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얄팍하고 힘없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선택할 자유는 바꿔 말하면 실수할 자유, 더듬거리다 실패할 자유, 자신의 결점과 한계와 두려움과 비밀과 정면으로 대면할 자유, 자아의 파괴가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끔찍한 불확실성을 견디며 살아갈 자유다."


그녀가 보여주는 세계는 이렇다. 체중계의 숫자나 옷에 붙은 텍 가격으로 나의 가치를 펌핑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 우리가 우리 내면의 소리(숨겨진 욕망)에 눈뜨는 세계, 그렇게 눈 뜨는 게 위험하지도 침해받지도 오해받지도 않는 세계,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된 이들이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세계, 내 욕망이 아닌 것을 강요받지 않는 세계.


하지만 겁이 날 수 있다. 나는 오래 길들여져왔고, 내 욕망을 찾아낼 만큼 용감하지도 못하다면, 게다가 이미 주입된 욕망이 나를 끌어가는 동력의 전부라면, 나는 어떻게 하나. 내 욕망이 거짓된 것이어서 두려운 게 아니라 이 많은 거짓된 욕구들을 모두 덜어내고 나면 나는 무엇에 의지하고 무엇에 눈높이를 맞춰 살아가야 하는지 두려운 거라고. 그녀는 대답한다. "마침내 모든 욕구를 이해하고 충족하는 일,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달하는 일이란 가능하지 않다"고. 다만 "내가 잘 먹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순간들은 더없이 소박하게 포장되어 도착한다. 내 개가 보내는 사랑의 시선으로, 친구와 나누는 농담으로, 여기서 느끼는 애정의 불씨, 저기서 느끼는 이해로, 그 순간들은 내가 막 노를 젓기 시작할 때 수면을 비추는 아침 햇빛 속에서, 완벽한 한 끼 식사, 완벽한 한 문장, 어떤 손길, 어떤 눈빛 속에서 온다. 마침내 이 삶에서 얻는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를 순간들이 있다. 섬광처럼 스치는 만족감, 얼핏얼핏 희미하게 반짝이는 희망의 빛과 맛, 파이처럼 깊이 음미하며 완전히 누려야 할, 아주 잠깐의 순간들"이 있을 뿐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가장 큰 매력에 대해. '내가 옳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 그저 모든 가능성과 선택지를 펼쳐서 보여주는 사람. 그리고 다시 묵묵히 자기 길로 돌아가는 사람. 이제 남은 건,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당신과 나의 선택 뿐. 그녀를 통해 몰랐던 욕구가 찾아왔다면, 역시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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