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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ul 08. 2021

그건 전혀 괜찮지 않다

정유정, <완전한 행복>


(소설의 내용이 언급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삶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다만 늘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겐 행복할 권리와 타인의 행복에 대한 책임이 함께 있다는 것을." ('작가의 말' 중)


작가는 자신도 나르시시스트에게 길들여져본 경험이 있다고 고백한다. "아주 야금야금 길이 들었고, 관계에서 벗어났을 땐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안고 있었다"고. 그리고 나르시시스트에 대해 다룬다면 그건 '행복'에 대한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는 얘기까지. 그런데 왜 나르시시스트를 다루면서 굳이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아직 '나르시시스트'를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것일지 모른다. 그건 정말로 다행이다.


누군가를 완전한 '수단'으로 대하는 이가 어떻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거냐고,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면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행복일 수 있는 거냐고 묻는다면, 우리 인식 체계에서 완전히 모순인 두 태도가 원인과 결과가 될 수 있는거냐고 묻는다면, (당신이 어떻게 묻는다고해도) 내 대답은 "물론"이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자신이 정해놓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관심이 없기 때문에 타인은 철저히 수단이 된다. 더 소름끼치는 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정말로) 행복이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히 포기가 안 된다. 사람이 바뀌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말들을 하지만 내 생각에 궁극적으로 변화가 불가능한 사람은 나르시시스트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반성'과 '괴로움'조차도 연극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자. 지금 우리는 무수한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 '사람을 딱 세 종류 - 승자, 패자, 모르는 자 - 로 구분하고 승자에겐 입안의 혀처럼 굴고, 패자에겐 송곳니로 군림하며, 모르는 자는 입 냄새쯤으로 취급'하는 사람, '사소한 부탁으로 시작해 뒷일까지 내맡겨버리는 수법'을 시도때도 없이 사용하는 사람, 그리고 불행히도 주도면밀하고 민감하며 타인의 심리를 조종하는데 능하고 죄책감이 없는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중이니까.


작가는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믿음에 따른 우주를 가진다"고. 내 생각을 조금 덧붙이자면, 동시에 인간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자신이 가지는 믿음 역시 완전 무결할 수 없다. 언제나 진행형. 그저 살아갈 뿐이다. 소설의 주인공 유나 역시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한다. 뭐 여기까지는 평범하다. 그런데 그 행복이라는 게 어딘가 좀 수상쩍다. "결함도 결핍도 없는 완전성"이 유나가 가진 우주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결함도 결핍도 없는 완전성이라니. 자기 자신을 한 번이라도 객관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함이나 결핍 같은 단어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유나의 행동을 보면 더 수상쩍다. 그녀는 오로지 '타인'에게서만 결함과 결핍을 찾는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내 경험에 의하면 유나들은 자신의 결함이나 결핍은 타인을 향한 무기로 삼는다. "나는 원래 그렇다."는 게 그들의 입버릇이다.


(내 안에서 인지부조화가 격렬히 일어나는 중이지만) 유나는 행복하고 싶은 거다. 자신만의 원칙과 방법대로. 그래서 늘 화가 나 있다. 사람들은 전부 제각각이고 그들의 영혼과 우주 역시 제각각이어서 자기 입맛대로 움직여주질 않으니까. 다 없애고 폭주기관차가 되어 달려나가고 싶은데, 예상치 못한 '인간들'이 매번 발목을 잡는다. 아빠도 엄마도, (원수보다도 못한) 언니도, '자기의 영혼'을 가진 전 남편도, 그를 꼭 닮은 딸도, 새로 고른 남편과 그의 아픈 아들도, 그리고 그 아이를 돌보는 시어머니까지도. 그래서 그녀는 슬프다. 자기가 행복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다고 투정을 부린다. 자신이 그렇게 '노력'에 노력을 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자꾸 자기를 방해한다고 우는 소리다. 끝내 그녀는 화가 나서 외친다. 대체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냐고. 나는 그냥 좀 행복하고 싶은건데, 왜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냐고. 이제 그녀는 거의 울부짖는다. "너가 '너'가 아니면 얼마나 좋아? 나는 너가 '너'인게 불편하다고! 내 말대로 움직이지 않으니까!"



"짐작대로 지유는 아내에게 길이 든 아이였다. 다만 의외다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복종의 밑바닥에 도사린 저항감이었다. 은밀하지만 분명하게 감지되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어떤일에 한정하는 저항도 아니었다. 다분히 기질적인 것이었다. '엄마 말이 옳아' 하면 '네' 하고 돌아서서 '아니 내가 옳아' 하는 유의 저항."

지유에게 유나는 "단순한 엄마가 아니"다. "아이의 영혼을 지배하는 절대자"이고, "유일무이한 세계"다. 그런 지유가 매일 밤 진실에 다다르는 꿈을 꾸고, 자기 마음 속의 (유나로부터 주입됐을 것으로 예상되는) 또 다른 자아와의 갈등을 극복하고 마침내 진실의 세계로 문을 두드릴 때, 나는 조금 눈물이 났다. 지유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지옥이 아니라 지옥의 지옥까지도 따라올 꽃 노래의 정체가 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저것은 아버지의 노래가 아니었다. 스스로 부르는 노래였다. 자라는 내내, 독립한 후에도, 삶의 순간순간마다 자신을 향해 걸었던 주문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물러서라고. 그러면 평화가 오리라고."

유나의 언니 재인이 자신을 옭아맸던 굴레에서 끝내 벗어나서 유나에게 맞서기로 마음 먹었을 때 나는 슬펐다. 그녀도 유나와 똑같은 어린 아이였고, 유나와 똑같이 부모의 사랑이 필요했고, 오히려 유나보다도 더 사랑받지 못했지만 재인은 유나와 같지 않았다. 매순간 유나와 달랐다. 하지만 재인은 자기 안의 '사랑 받으려는' 어린 마음까지도 모두 받아들이고 끌어안는다. 그 어린 아이를 보듬지 못했던 것, 그 어린 아이를 혼자두었던 것, 그래서 그 어린 아이가 하자는대로 살았던 것을 깨닫고 "나도 유나와 다르지 않다.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 역시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였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비로소 한 명의 어른이 된다.



"지금껏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자기 꼬리를 외면하는 개와 다름 없이. 삶의 행로는 꼬리만큼 길고 분명한 것이었다. 꼬리를 자른다 하여 사라지지도 않는다. 양쪽 엉덩이 사이에 꼬리가 있었다는 걸 적어도 한 사람은 기억할 테니까. 바로 자신은."

소설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심리 변화를 보이는 인물, 유나의 두 번째 남편 은호. 전형적인 '회피형 인간'인 그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 중 불운하고 어렵고 괴로운 일에서는 언제나 멀찍이 도망쳐왔다. 욕 먹기는 싫으니 최소한의 성의만 표시한 채로, 말하자면 살짝 발만 담근채로 진짜 감당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했다. 그리고 마치 그런 그의 성향을 꿰뚫는 듯 파고드는 유나의 광기는 더이상 그를 도망칠 곳 없는 절벽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의 선택은 두 가지다. 유나의 회유처럼 "너만 리셋하고 내 말 들으면 모든 것이 완전해진다"는 거짓말에 짐짓 속는 척 진실을 (이번에도) 회피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유나에게로 돌진해서 진실을 알아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진실을 향해 자기 자신을 던지기로 한다.


유나에게 맞섰던 세 사람이 보여준 건 '평범한' 사람들의 자기 성찰이었다. 그들이 견뎌야 하는 건 외부적으로는 '유나'라는 욕망의 폭주기관차였겠지만, 내부적으로는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유나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면 충분하다는 긍정의 언어이기도 하면서, 유나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 역시 바로 저 '자기 자신'이라는 확연한 대비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들이 유나의 참혹하고 잔인한, 비열하고 폭압적인 태도에 맞서 끊임 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고, 진실을 향해 걸어갔던 것은 그래서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유나를 꿰뚫어보는 전문가도 아니고, 유나로부터 얼마든지 멀리 갈 수 있는 간단한 관계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자신을 들어올림으로써, 자신을 믿음으로써, 자신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유나로부터 벗어났다. 물론 그 대가는 작지 않았다.




소설을 읽다보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특정 사건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당신의 기억을 스쳐가는 여러 이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이름들이 '특별'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작가의 말처럼 "모든 나르시시스트가 사이코패스는 아니지만 모든 사이코패스는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스트"이며 "나르시시스트들은 사이코패스보다 흔하다는 점에서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어디에나 있다. 회사에서 매일 마주치는, 묘하게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동시에 그 사람의 부탁을 자꾸 들어주게 되는 그가 유나일 수도 있고, 사랑해마지 않는 애인이나 아내, 남편이 유나일 수도 있다. 돌고 돌아 타인의 '존재'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 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잔인함을 방조하는 스스로가 유나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얼마 전 뉴스를 보다가 어린 유나들을 본 것 같은 섬뜩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월거지(월세 사는 거지)", "전거지(전세 사는 거지)"라는 말이 유행이라는 초등학생들에 대한 기사였다. 그 기사 중반부에는 임대 세대가 사는 동의 아이들은 아파트 놀이터에 오지 않도록 조치해달라는 항의가 잇따른다는 내용이 따라왔다. 나는 더이상 뉴스를 들을 수 없어 화면을 껐다. 그 아이들에게 저렇게 불리는 타인은 과연 '사람'일까, 귀찮고 더러운 것들일까. 사람을 돈(수단)으로 서열짓고, 그들의 자유를 자신의 욕망에 따라 짓밟을 수도 있다고 믿으면서, 오늘도 열심히 '나는 특별해' '나는 대단해'라는 주문을 외우는 세상이 두렵다. 그건 전혀 괜찮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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