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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ul 15. 2021

나, 너, 우리 안의 소우주로 떠나는 여행

사샤 세이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우주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든 우리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기쁨을 느낄 것이고 고통을 느낄 것이고 거대하고도 광활한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로서의 존재를 다양하게 경험할 것이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건 간에,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 각각의 삶의 기록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힐지라도 우리가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살았다. 우리는 이 거대함의 일부였다. 살아 있음의 모든 위대함과 끔찍함, 숭고한 아름다움과 충격적 비통함, 단조로움, 내면의 생각, 함께 나누는 고통과 기쁨. 모든 게 정말로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광대함 속에서 노란 별 주위를 도는 우리 작은 세상 위에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축하하고도 남을 이유가 된다."




우주의 신비라고 하면 별자리 운세가 떠오르는 나는 천문학 바보에 속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곧잘 인간 하나하나가 곧 우주라느니, 인간의 내면은 곧 '소우주'라느니 하는 표현을 쓰면서 우주라는 말이 주는 광대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맘껏 빌려오기도 한다. 그야말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폼을 잡는 셈이다. 심지어 칼 세이건의 책 <코스모스>는 몇 번이나 읽으려고 시도했지만 읽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쯤, 오빠의 책장에 꽂힌 검고 두꺼운 책을 꺼내서 '이건 뭐지?' 하는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기다가 '설마 (오빠에게 듣고 또 듣는 종류의) 과학 얘기?' 하면서 서둘러 책장을 덮었던 기억 이후로, 나는 미묘한 공포증을 안고 코스모스를 대해왔던 것이다. 그래 이건 다 오빠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코스모스>를 읽고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서든 <코스모스>를 독파해내고야 말았을테니 말이다.


코스모스와 달리 사샤 세이건의 책은 제목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라니. 이 짧은 문장 안에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이 모두 모였다.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 '위하여(?)' 그러고 보니 전부다. 내가 좋아하고 듣기만 해도 마음이 움직이는 단어들로 이뤄진 제목이면 충분했다. 나는 코스모스의 공포를 떨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코스모스>가 궁금하다. 읽고 싶다. 동시에 사샤 세이건의 사랑스러운 우주를 당신에게도 소개하고 싶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다고 믿고 싶)지만 나를 관찰해볼 때는 그렇지도 않다. 나에게도 상상력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지만, 내 상상력의 범주라는 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고작해야 범죄물을 보고 나면 한밤 중에 문단속을 좀 더 꼼꼼히 하거나, 내리막길을 걷다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는 일을 상상한다. 그도 아니면 어디까지나 '내가 떠났던 과거의 여행에 바탕을 둔' 여행지에서의 내 모습을 상상하거나, 10년 후 20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너무 초라한데?)


상상력은 단지 참신함만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상상력이야말로 내 인식의 유연성을 보여주는 일일터. 간디는 말했다. "모든 폭력은 상상력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고. (여러분 그렇다고 제가 폭력적인 사람은 아닙니다만) 하지만 사샤 세이건은 다르다. 그녀는 궁금해하고,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자주 열어보고, 책을 찾아 읽고,  질문을 한다. 그렇게 얻은 지식들은 다시 그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녀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틈새를 풍부한 상상력으로 채운다. 그렇다. 상상력은 탐구력과 이해력을 포함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삶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 멀리 떨어져서 지내게 된 친구들과는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같은 일에서부터,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자신의 사유는 무엇인지, 종교 없는 사람이 종교가 하는 역할을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에 이르는 깊고 무거운 주제까지 쉽고 다정한 언어로 들려준다.


그리고 그녀의 우주 안에서 가장 빛나는 지점은 분명 그녀의 '상상력(과 탐구력과 이해력!)'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마치 하나의 우주를 관찰하듯 대한다. 자신이 탄생하기 이전을 상상하며 "우리가 세상에 생겨나기까지 일어난 수없이 많은 결합은 대부분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나올 법한 멋진 만남은 아니었을 것"이라며 그 평범하고 때로는 초라한 시작을 다정하게 보듬고, 괴로운 상황에서는 "알파벳 노래처럼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마음을 환기하며 다시, 시작하기를 권한다.


특히 그녀가 사랑하는 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을 읽다보면 아주 작고 사소한 일로도 우리들만의 의미를 만들고 그 일들을 반복함으로써 전통을 창조해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삶이라는 무형의 대상을 향한 깊은 사랑은 평범한 현상들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만든다. 우리는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소한 것들을 바라보고, 기념하고, 염원한다. 그녀는 왜곡되다 못해 사라질 지경에 이른 이 근원적인 원리를 되살려낸다. 전통과 종교, 의례적 행위와 그 반복에 대한 그녀의 통찰은 굳어있던 나의 관념에 산뜻한 바람을 불어넣는다. 그것들이 본래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었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는다.


우리의 삶은 끝내 무로 돌아간다.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어쩌면 유일한 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은 나약하고 동시에 강인하다. 하루하루의 무를 견디는 것이 대단하면서도 그렇게 살아낸 하루가 끝내 무로 돌아간다는 사실에서는 한없이 연약하다.


그녀는 말한다. 흘러가버리는 삶, 무로 환원되는 삶의 순간 순간을 사랑하면 어떻겠느냐고. 그와 주고 받은 미소, 나의 할머니를 떠올리는 순간, 나와 꼭 닮은 아기의 눈을 바라보는 찰나, 그리고 내가 그 모든 것들을 잊지 않고 그러면서도 매일의 변화무쌍한 하루에 온전히 뛰어들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은 이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거라고. 마치 기적을 보고 있다는 듯이, 마치 다시 없을 우연을 마주친 것처럼, 평범한 하루하루를 바라보라고. 그렇게 살아가라고. 그리고 그녀의 설명을 듣다보면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많은 우연의 집합으로 이뤄졌으며, '내가 바로 나 인 것' 역시 수많은 가능성들의 결합으로 이뤄졌음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상상력을 통해 우리 개개인의 삶은 그렇게 '실제로' 소중해진다.


삶을 대하는 그녀의 이런 태도를 통해 "사람은 항상 자기 방식의 오류를 알아내고 더 나아지려고 애써야 한다. 이것이, 더 나아지다 라는 말의 본질"이라는 그녀의 말은 더 강렬히 와닿는다. "빛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잊고, 그냥 어둠 속에 파묻혀 버리기는 너무 쉬운"일이라는, 그러니 일어나서 '더 나아지자'는 그녀의 응원이 반갑다.



나는 (아직도) <코스모스>를 읽지 못했지만, 칼 세이건이 자신의 딸 사샤 세이건의 마음 속에 심어준 우주를 슬쩍 엿보면서 나는 칼 세이건의 모습을, 마음을 상상해보게 되었다. 상상하고 알아가고, 또 다시 상상해내는 그녀를 따라가며 내 상상력도 조금 자란걸까? 사실은 아버지를 추억하는 페이지마다, 어머니와의 일화를 들려주는 장면마다,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부모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지, 그들의 사유가 그녀의 영혼에 얼마나 깊이 새겨져 있는지 느낄 수 있으니 그녀가 보여주는 우주 역시 그들의 자장안에 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고로 내 상상력은 아직 그대로다.) 게다가 놀랍게도, 그녀는 그 대단한 부모님의 우주와는 다른 '독립된 자신만의 우주'를 가졌다. 이 책은 그 증거다.


이는 동시에 우리 안에도 분명 '나만의 우주'가 있을 거라는 확신에 찬 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여전히) 천문학 바보인 내가 알고 있기에도 우주란 거의 무한에 가깝고, 우리가 아직 다 알아내지 못한 비밀이 숨겨진 곳이니까. 우주란 그런 거니까. 내 안에 담긴 우주 역시, 무한에 가깝고 내가 다 알아내지 못한 비밀이 여전히 숨겨져 있을 테니까. 그러니 자신이 이 지구에 오게 된 그 근원을 찾아가고, 동시에 그 반대쪽 끝인 죽음이라는 소멸을 향해 가는 여정이 삶임을 인정하면서도 유쾌하고 당당한 그녀처럼, 우리는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어떤 거대한 힘 앞에서도 그저 나만의 작은 우주를 발견하고 지키는 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온 생애에 걸쳐 해야하는 일의 전부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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