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희 Jul 29. 2021

소설 쓰기는 삶 쓰기

김연수, <소설가의 일>


나는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지만 예측불가능한 걸로 따지자면 삶을 따라올 게 없으니 일어나지 못할 일이란 없다는 생각이다. 이런 상상도 가능하지 않나? 십 년이나 이십 년 후에 내가 소설을 여러 권 발표하고 내 소설을 읽는 사람들도 제법 늘어나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나는 '2021년 7월, 그 더운 여름에 김연수 작가님의 <소설가의 일>을 참 재밌게 읽었었지. 어쩌면 내 무의식은 내가 훗날 소설가가 되리란 걸 예감했던 걸까.' 라고 잔뜩 폼을 잡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계적인 가수나 배우가 된 내 모습보다야 훨씬 현실적인 상상이다. 흠.


그러나 아직은 소설을 쓰겠다는 꿈조차 꿔본 적 없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이토록 즐겁게 읽고야 만 것이다. 작가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근데 또 모르는 일이지) 소설가란 정말 멋진 직업이구나! 소설 쓰기는 삶 쓰기였어! 라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작가들에 대한 더 많은 환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소설가는 그야말로 인간의 내면을 통찰하는 사람들이고, 하나의 완전한 세계('핍진성!' 있는)를 창조해내는 사람들이고, 마지막으로, 무지막지하게 쓰고 또 쓰는 사람들이었다. 이미 느꼈겠지만 그 중에서 나는 마지막 부분에 방점을 찍는다. 그들은 정말로 '무지막지하게' 쓰고 또 쓰고 또 쓰는 사람들이었다.




"시간의 압력을 견딘 건 책의 내용 이전에 문장이다. 일단은 문장이 읽혀야 내용도 읽을 게 아닌가? 미래에도 읽을 수 있는 문장, 그게 바로 소설가가 써야 할 문장이다."


"어떤 인간이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변함이 없다는 것. 달라진 사람은 말, 표정 및 몸짓, 행동으로 자신이 바뀌었음을 만천하에 보여준다는 것. 그러므로 소설을 쓰겠다면 마땅히 조삼모사하기를.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간은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이 모든 생고생이 내게 없는 것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나의 장점, 내가 사랑하는 것들 때문에 생긴다는 걸 아는 순간, 구멍에 불과했던 단순한 욕망은 아름다운 고리의 모양을 지닌 복잡한 동기가 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이 인생을 이끌 때, 이야기는 정교해지고 깊어진다."


"나를 소설가로 만든 건 그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나보다 먼저 살았고, 나보다 먼저 소설을 썼던 소설가들이 그들의 소설에 무수히 남겨놓은 바로 그 문장이었으니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의 길을 갈 때,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는 쪽을 택할 때,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이 좌절됐다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꿈에 대해서 한번 더 말할 때, 우는 얼굴로 어둠 속에 서서 뭔가 다른 좋은 생각을 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을 때, 바로 그때 이 우주가 달라진다는 말."




소설 쓰기에 대한 작가의 철학이 담긴 조언들이 구비구비 와 닿았지만, 특히 공감하고 또 배웠던 건 "악의 이야기, 전락의 이야기가 아니라 선의 이야기, 회복의 이야기가 훨씬 더 '재미있다'"는 부분이었다. 그의 말처럼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현대인은 모두 '불안'을 껴안고 산다. 이런 우주에 태어나서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란 '자신의 불안을 온 몸으로 껴안을 수 있는 용기, 미래에 대한 헛된 약속에 지금을 희생하지 않는 마음'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결국 선의 이야기(선을 행하라고 강요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회복의 이야기(완전한 회복, 결함 없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일 것이다. <케빈에 대하여>라는 영화와 한나 아렌트의 사례를 통해 그는 악에 대해 설명하고 악이 얼마나 손쉬운 일인가에 대해 말한다. '악행은 정신적 수준이 저열하고 천박한 사람들도 할 수 있지만 선행을 행하려면 수준이 좀 높아야만' 하고, '나와 타인이 서로 다르며,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는 서로의 본심에 가 닿을 수 없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다. 당연히, 악행에 대한 이야기, 전락의 이야기는 그 구성이 초라하고 단순해질 수밖에 없다. 그가 지적했듯이 악은 그저 '선의 결여'일 뿐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 중에 어떤 강사의 경험담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공자에 대한 강의를 하는 중에 선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강의를 듣던 한 사람이 "저는 양보하기 싫은데요? 왜 저만 손해를 봐야 하나요?"라고 아주 당당하게 묻더란다. 그래서 강사는 "양보와 배려는 멍청해서 하는 게 아니라 똑똑해서 하는 겁니다. 상대의 반응과 감정이 예상되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하는 거죠. 그건 분명 지능의 문제입니다."라고 했더니 좀전의 그 당당함은 어디가고 자신이 '멍청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변하느라 우왕좌왕 하더란다. 강사는 덧붙인다. "배려심 없고 이기적인 건 창피하지 않고 지능이 낮은 건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악이 지배하는 전락만이 가득한 소설에 눈살이 찌푸려지고 흥미가 떨어진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위안을 얻는다. 언젠가부터 사회 전반에 흐르는 선에 대한 은근한 경시, 악이 똑똑하고 흥미로울거라는 덧없는 기대와 신화화가 못내 불편했다. 남들보다 약게 행동해서 손쉬운 이익을 취하는 건 그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둔해서' 가능한 일이다. 상대에 대한 감각에 둔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약아빠지지 못하면 때로는 기회를 얻기 힘든 상황마저 연출되곤 하는 게 싫었다. 경험의 유무가 상황에 대처하는 유연성이나 선행을 행할 만한 지성의 힘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라, 얼마나 빨리 얼마나 약게 행동하느냐로 연결되어가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안다. 이 모든 말들보다 중요한 건 오늘 하루 내 생활에서의 실천이겠지. 나 역시 '당위적인 이야기' '고매한 이야기'를 주르르 써내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 더구나 내가 특별히 선하고 대단히 좋은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자신있게 대답할 수도 없을테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선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꼭 말하고 싶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이유는 분명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어려운 일을, 복잡하고 까다로운 일을 하기 위해 상대를 민감하게 배려하고 당장의 손해를 감수할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니까. 그들을 떠올리면 나는 배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가 펴진다. 선은 똑똑한 일이라고, 곱고 귀한 일이라고, 심지어 선행은 악행보다 훨씬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고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라고 몇 번이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끝내 나도, 우리도, 선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단지 소설 쓰기에 대해 설명하는 책일 줄 알았는데, 왠걸 읽는 중간중간 자꾸 눈물이 났다.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 끝까지 쓰라는 말이, 인간은 변화한다는 말이, 우주가 달라지는 순간이 있다는 말이 나를 자꾸 울렸다. 나는 그게 꼭 삶에 대한 이야기 같아서 자꾸 아껴 읽게 되었다.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라면,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 대해서라면, 자꾸 시도하는 마음에 대해서라면 나는 언제나 할 말이 있으니까.


설득이 되고 만다. 소설 쓰기가 삶 쓰기이고, 삶을 살아내면서 얻은 시선으로 얼마든지 소설을 쓸 수 있다는 말에 나는 완전히 설득되었고, 항복했다. 내 안에 있던 '소설 쓰기는 예술가들의 일'이라는 공식 하나가 스르르 무너진다. '소설가'가 아니라 '소설 쓰는 사람'이라는 작가의 자기 소개처럼, 어쩌면 우리는 매일 매일 나의 소설(삶)을 써내려가고 있는 중일테니까. 아, 그런데 마지막 한 가지가 영 걸린다. 토고(토나오는 원고)를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쓰고 또 쓰고 또 쓰는 바로 그 일. 그게 마음에 걸리네. 아참, 작가님이 그랬는데, 이런 생각할 시간에 그냥 쓰라고. 벌써 어렵다! 이래서야 어디 소설쓸 수 있겠나!

매거진의 이전글 나, 너, 우리 안의 소우주로 떠나는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