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영, <농담과 그림자>
이 책의 제목인 농담과 그림자는 문학이나 영화에서 숨겨진 자아 혹은 드러내지 않고 싶은 어두운 자아를 상징하고는 한다. 농담은 그런 자아를 표현해내는 수단으로, 그림자는 그 자아 자체로 다뤄지는 식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시한부를 선고 받은 정원(한석규)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다림(심은하)에게 진지하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다. 늘 '농담처럼' 다가가고 웃는다. 그렇다고 다림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림에게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을 뿐이다. 물론 자신에게도. 우리는 그가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행동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가 가슴 시리도록 슬픈데도, 그는 소탈한 미소와 농담으로 다림을 대한다. 그럴 때 마치 삶은 그야말로 '농담처럼' 흘러가고, 농담 뒤에 가려진 그의 진심이 절절하게 울릴 때 정원이 아니라 관객이 눈물을 흘린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 슐레밀은 말 그대로 그림자를 판 대가로 부자가 되지만 오히려 그림자가 없기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그는 그림자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고,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고백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아이들과 논술 수업을 할 때 이 소설의 줄거리를 소개하고 '그림자'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라는 판에 박힌 질문을 하곤 했다. 우문현답이라고, 아이들은 영혼, 인간성, 양심 같은 단어들을 이야기해주었다. 반대로 뻔뻔함, 잔인함 같은 기발한 단어들을 이야기해준 학생들도 더러 있었는데, 그 이유가 더 대단하다. 주인공이 다른 사람들만큼 나쁘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이라는 기막힌 대답이 돌아왔다. 그 학생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
시간의 흐름 출판사에서 기획한 끝말잇기 프로젝트의 여덟 번째 책, <농담과 그림자>를 읽었다. 저자는 일상에서 겪고 느낀 것들을 조용하고 정돈된 언어로 전하고 있다. 쉽게 잊혀질 농담처럼 가볍고 편안한 말투로 그림자처럼 잘 드러나지 않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면들에 대해 말한다. "입 밖으로 꺼낸 말보다 속으로 감춘 말이 언제나 더 많다"고 말하는 그는 우리를 좋아하긴 하냐는 학생들의 질문에 "여러분이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저는 여러분을 아주 공평하게 싫어합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농담도 그림자도, 언제나 제 역할이 분명한 법. 그의 글은 먹고 사는 일에 대한, 소외된 이들에 대한, 억눌린 이들에 대한 담담하고 뭉근한 지지를 보낸다. 공장에서 일했던 그, PC방에서 일했던 그, 버스와 지하철과 버스에 실려 청춘의 막막함을 느끼던 그, 아이들 앞에 선 그, 아픈 그의 모습들은 마치 농담처럼, 그림자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 꼭 있을 법한 누군가의 얼굴을 대신한다. 그건 어쩌면 그가 아이들을 '공평하게' 싫어하는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호의적인 관계 속에서 채워지는 충만감보다도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있을 한 사람의 마음'이 못내 더 신경쓰이는 사람이니까.
"버스와 지하철과 버스를 통과하며 나의 삶은 간신히 나아가고 있었고, 세상의 진폭이 한뼘씩 넓어지는 동안 문득문득 고독함을 느꼈다. 세상이 넓어지는 만큼 외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애틋해서 들여다볼수록 학교는 어려웠다. 학교가 안고 있는 문제가 어려웠고 학교 밖 세상의 문제가 어려웠고 학생 한 명 한 명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이 또 어려웠다. 누군가의 문제는 학교의 문제이자 세상의 문제였고, 구분되지 못한 채 이리저리 엉켜 있는 문제들의 난맥 앞에서 나는 더듬더듬 느리게 나아가야 했다."
"나는 그저 밥을 벌어먹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하고,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평안하기를 바란다. 나를 포함해 모든 이들의 삶이 최소한의 토대를 확보하기를, 그래서 그 위에다 순하고 무해한 생활을 설계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기사를 처음 본 건 몸을 회복하고도 한참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몇 개의 기사와 이어지는 보도 속에서 사람들의 몸과 목숨이 부서지고 있었다. 관련된 통계와 자료들을 찾아 읽는 동안 지난 응급실에서의 기억들이 화면 위로 겹쳐졌다. 산업화된 의료 체계의 커다란 익명성 안에서 나는 오히려 몸과 생명의 구체성을 실감할 수 있었지만, 병원 밖 또 다른 자본의 현장에서 누군가의 생명은 지워지고 있었다."
나 역시 저자처럼 나의 의도와 목적을 누구에게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때면 곤란한 마음이 된다. 그것이 얼마나 좋은 의도든, "설명하라" "드러내라"는 요구 앞에서는 (게다가 저런 요구에는 늘 '너가 말하지 않으면 나는 전혀 알 수 없다'는 단절의 언어가 뒤따른다.) 언제나 내 진심이 검문 당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표현해야만 하는 것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묵묵한 노력 앞에서, 혹은 막막한 현실을 이고 가는 이의 안간힘 앞에서 필요한 건 왜 그렇게 하느냐는 취조의 언어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음을 아는 공감의 언어가 아닐까. 또한 그런 서툰 요구를 하기에 앞서 내가 과연 그 사람이 서 있는 현실에 얼마나 가까이 가 보았는지, 그 사람과 나 사이에 투명한 유리가 있다는 걸 망각한 채 '다 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는 거 아닐까.
이제는 그런 감정들에도 좀 무뎌져서 웬만큼은 사람들에게 내 의도와 목적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나는 궁극적인 어떤 것 - 그러니까 입 밖으로 꺼내어 놓는 순간 의미가 달라져버리는 종류의 감정이나 선택들, 혹은 빚을 갚으라는 듯이 진심을 펼쳐보이기를 바라는 요구들 - 에 대해서는 역시 함구하는 편을 택하고 만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로 빚어질 오해를 최소화하고 상대와 나 사이에 빛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을 조금이라도 남겨두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은 더 말할 게 없다. 어떤 말은 너와 나 사이를 빛으로 채우지만 어떤 말은 모든 가능성을 닫는다. 그럴 때 너와 나는 아주 가까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뱉어진 말에만 기댄채 답답해할 뿐이다. 작은 빛 하나 들어올 공간 없이 꽉 닫힌 말. 그리고 그런 말을 기대하는 질문들. 어떤 질문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그저 내놓으라고 한다. 그런 질문에 꽉 닫힌 말로 대답해서 진실을 깎고 재단해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말하지 않고 진실을 지키는 길을 택하는 것이 나에게는 언제나 더 타당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이 아리고 답답할 때면 나는 시선을 돌린다. 거기에는 언제나 기꺼이 오해받기를 선택하면서 자신의 진실을 지키려는 이들이 있다. 그럴 때 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 이토록 많다는 사실에 서글픔과 위로를 동시에 느끼면서 그 많은 숨겨진 말들을 들으려고 애쓴다. 당신의 서툰 요구와 질문 뒤에 내가 미처 듣지 못한 숨겨진 이야기가 없는지 궁리하기도 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서툰 요구나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그러다 보면 역시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나와 당신 사이에 투명한 유리가 있음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나?' 매번 그 유리 너머로 가지는 못해도, 적어도 그 유리가 있다는 것 정도는 잊지 않고 살고 싶다.
"왜 그렇게까지 해?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고투를 멈출 수 없는 존재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투명한 창문 안에 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창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창밖으로 나와 서 보는 것에서부터. 빛이 어떻게 창을 뚫는지를 보는 것에서부터. 창이 빛을 어떻게 담는지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뒤틀린 것이 바로잡혀, 옳게 열고 닫을 수 있을때부터 창문. 안 그러면 창문도 아닌 것을 계속 창문이라고 믿고 살아가게 되지요." (이원, <시를 위한 사전> 중)
말하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 그의 글들이 나에게는 맞춤한 듯 와 닿았다. 우리는 아주 많은 말을 하고 살지만 하지 않은 말들은 언제나 더 많다. 가끔 가까운 사람과의 전화통화를 끝낼 때 하는, "긴 얘기는 만나서 하자"는 농담이 내게는 말할 수 없이 다정한 말로 느껴지는데, 우리에게는 지금 내뱉어진 말들 말고도 언제나 숨겨진 이야기들이 남아있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만나서 아무리 긴 이야기를 해도 우리에게는 다시 또 숨겨진 이야기들이 생길테지. 그 수많은 오해의 가능성들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관계란 애틋하지 않을 수 없다.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내 속을 다 까뒤집듯하지 않는 것, 너의 이야기에 대해 모조리 품평해버리지 않는 것, 차마 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남아 있는 것. 그런 것들은 만나서 할 긴 얘기에도 결코 다 담기지 않을 것을 안다. 그 조심하는 마음이 귀하다.
그리고 그 조심하는 얼굴들처럼, 그의 글은 언젠가 한 번 '마주쳤다'는 기분이 들게 한다.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그를, 그 많은 얼굴을 한 그를, 나는 알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가 '시대라는 서사 위엔 여전히 서러움이 있을 것이고 이 서러움의 서정은 피어나고 번져나가 마침내 어딘가를 울릴 것'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이 그가 혼자 하고 있는 말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가 보고 들은 그 많은 '그들', 결국은 '우리들'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농담처럼,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 가서 버스 정류장 근처 동네 슈퍼 하나를 인수해서 살고 있을 그를 상상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그리고 또 농담처럼, 그 언젠가의 내가 그 바닷가 마을을 지나다 그 슈퍼에 들러 맥주 한 캔과 과자 한 봉지를 사는 장면을 상상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어쩌면 그와 나의 그림자가 닮았기 때문일런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