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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Sep 16. 2021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

페터 비에리, <자기 결정>


친구의 네 살 난 아들은 요즘 "싫어" "안할거야"를 입에 달고 산다. 태어난지 삼 년 된 아이가 하루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아니"라는데 나는 피식 웃음이 난다. 그래, 인간의 영혼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리는 어쩌면 '아니'라고 말할 때 비로소 나의 영혼과 가까워지는지도 모른다.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존엄성과 자유가 있는 삶 속에서 나는 다른 방식이 아닌 내가 보는 바로 그 방식으로 이해한다."


페터 비에리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위의 두 문장으로 짧게 정리할 수도 있겠다. 그는 소설가이면서 철학자로 <자유의 기술>, <삶의 격> 그리고 이 책 <자기 결정>을 통해 현대인이 자기 스스로를 '인식'하고 '사고'하며 나아가 그런 인식과 사고를 기반으로 '행위'하는 주체로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네 살 난 아이도 "아니"라고 외치게 만드는 자아의 독립성은 의외로 어른이 되면서 점차로 왜소해진다. 우리의 의식과 사고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언어'이고 우리는 필연적으로 '모국어'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학습하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가 발달할수록 불행히도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는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언어가 담고 있는 정의, 도덕성, 가치 등을 그 언어와 함께 수용(때로는 강요)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나도 그냥 그렇게 부르는 것이에요. 사고에 있어서 성숙해지고 자립적이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한다고 믿게끔 속이는 맹목적인 언어 습관에 대해 잠들어 있던 촉을 세우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다시, 노느라 바쁜데 미안하지만 네 살 난 아이를 소환하자. 네 살 난 아이가 "아니" 다음으로 많이 하는 말은 "왜?"다. 엄마들을 거의 패닉 상태로 몰고 간다는 마법의 단어. 조카가 예뻐서 낮이나 밤이나, 소개팅에 나가서도 조카 사진을 보여주며 주책을 떨던 이모와 삼촌도 혀를 내두르게 된다는 악마의 속삭임. 그러니까, "왜?"


이쯤되면 우리는 네 살 아이들을 선생으로, 멘토로, 부족장이자 두목으로 모셔야 한다. 그들은 또, 알고 있다. 처음 알게 된, 처음 들은, 처음 경험했고, 처음 만져본 이것들이 대체 '왜' 이것인지 물어야 한다는 걸. 당신이 나에게 요구하는 그것을 내가 '왜' 해야 하는지. "원래 그래"라는 말을 대체 '왜' 그렇게 자주 하는 건지. 그들은 끊임 없이 궁금해하는 것이다. 게다가 해맑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다. "엄마 왜 인상써? 화내는 거야?" 그들은 모든 '처음'인 '외부 세계'를 나라는 존재 안으로 함부로 들이지 않는다. 엄마 없이는 화장실도 못가서 문을 열어 놓고 응아를 하면서도 묻는다. 그러니까, "왜" 그런 거냐구. "엄마, 엄마? 내 말 안 들려?"


어른이 된 우리는 어쩌면 저 두 가지 단어를 잊었다. "아니"라고 말하기 보다는 사람 좋게 웃거나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하고는 뒤에 가서 불만을 터뜨린다. 왜소해진 스스로의 어깨 위로 "그래야 살아 남는다"는 말만 유행처럼 번진다. "왜?"라고 묻기 보다는 울음을 삼키거나, 부조리를 내면화한다. 언제부터인가 "원래 그래"라는 말 뒤에 숨어 부당함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이들보다 살림살이 좀 나아졌냐고 묻는다면, 사는 게 좀 더 행복해졌냐고 묻는다면. 그래, 대답은 각자의 마음 속으로 하자. 뭐 그렇게 공개적일 필요야 있겠나. 그냥 소주나 한 잔 하는 거지.






작가는 말한다. 자기 스스로를 표현하고, 자기 자신이 경험하는 것을 표현하고, 동시에 그렇게 행위하게 하는 자신의 내면을 돌보며, 또 동시에, 외부 세계도 마찬가지로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고 돌보라고. 그러니까 단지 나의 감정이나 마음만을 돌보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조건, 상황, 타인을 함께 돌보는 것.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범주 안에 포함시켜 경험하는 것. 그렇게 경험한 것들을 나의 언어로 다시 한 번 써내려가는 저자요, 도덕적 친밀감을 원하는 성숙한 개인이 되는 것. 나 자신으로부터도, 타인으로부터도, 나를 둘러싼 세상으로부터도 함부로 침해받지 않는 '나'라는 경험된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자기 인식이요, 자기 결정이라고.


"익숙하던 자아상이 더 이상 통용되지 못하면 지금까지 오던 길에서 한발 물러나 근원적 물음을 던지고 싶은 욕구가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습관과 우연한 만남들과 자신이 우연히 받은 교육에 의해 형성되었던 자아상의 진실성과 타당성을 점검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 자아상에 의해 왜곡되고 그늘져 있던 내 안의 동력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중요한 순간은 자주 위기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나'라고 믿었던 것들에 균열이 생길 때, 의심이 들 때, 우리는 차라리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그건 불안이 아니라 또 다른 나를 발견할 때가 왔다는 뜻이니까. (아주 많이 유치해서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 되더라도 견디자.) 우리가 이 지구의 네 살들보다 조금 나은 것이 있다면, 자유자재로 '글'을 다룰 수 있다는 것. 좀 더 고차원적인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는 것. (네, 저 지금 얼굴 빨개졌으니까 쳐다보지 마세요.) 우리는 (이 책에 의하면) 문학을 읽거나 씀으로써 내가 아닌 타인이 되어보고,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아닌' 것들을 알아간다. 임경선은 그녀의 책에서 하고 싶은 것 목록보다, '절대 절대 하기 싫은 것 목록'을 적어보자고 했다. 그게 오히려 수월하다고. 우리는 좋다는 감정보다 싫다는 감정에 언제나 더 확실하다고. (또, 또 네 살은 옳은 것이다.) 그렇게 나 아닌 것, 내 안에 있지만 내가 원치 않았던 것, 외부에 있지만 쉬이 뗄 수 없는 어떤 것들에 대한 스스로의 의견과 입장을 정리할 때 우리의 영혼은 한층 더 세밀하고 고운 것이 된다.


그래, 나 혼자라면 또 어찌 어찌 해볼 수 있겠지만, 더 큰 문제는 '타인'과의 만남에서 온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네 살은 신이 나서 어린이집에 간다. 그런데 거기에 나와 똑같이 고집불통인 친구를 만나게 되고,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그와 어떻게 장난감을 나눠가질 것인지, 선생님에게 어떻게 사랑받을 것인지, 좋아하는 친구에게 어떻게 내 마음을 표현할 것인지. 네 살은 이제 '타인'이라는 시험대를 마주한다. 나를 비추는 거울이면서, 나를 괴롭히는 작은 악마이고, 나를 북돋우는 응원단이기도 한 타인. 작가는 타인과의 관계 맺음 역시 '자기 결정'의 한 요소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나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타인을 향해 손 내미는 것,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소망이 실현되는 것을 포기하거나 상대방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 다시 말해, "타인의 이익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않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것"이 도덕적 존중과 배려의 핵심이다.


그럼 다시 묻고 싶겠지. 가스라이팅과 소시오패스가 판치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고. 그 속에서 어떻게 도덕적 존중과 배려를 실천할 거냐고. 그게 좋은 거라는 건 우리도 안다고. 좋다. 이미 당신은 '왜'라고 묻고 있으니까. 나아가 '어떻게'까지 따져묻는 그 태도. 아주 좋다. 우리는 우리를 조종하려는 타인의 그 모든 시도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동시에, '도덕적 친밀감'을 나눌 수 있는 깊은 관계 역시 추구한다. 안타깝지만, 그 모든 '나쁜'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것 역시, 나의 몫이다. 그의 나쁨을 들여다보고, 왜, 어떻게 나쁜지, 내가 특히 그렇게 반응하게 되는 이유는 뭔지 알아가는 과정은 때로 내 안의 상처 받은 나를 들여다볼 좋은 기회이다. 그 모든 나쁜 시도들에 대한 가장 정당한 대응 역시 나의 단호함일테다. 반복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상황과 자기 자신을 향한 단호함이 '자기 결정'이고.


"도덕적 친밀감은 비판적인 내적 거리를 자기 자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유지하는 인간관계입니다. 도덕적 수치심이나 후회는 자문할 수 있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덕적 친밀감은 자기 결정을 위협하는 것도 아니고 싫지만 억지로 감내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 결정의 자연스러운 표현인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들을 통해 비로소 "외적으로는 행동의 자유를, 내적으로는 사고와 경험과 의지에 있어서 내가 되고 싶은" 상태에 점점 더 자주 도달하는 것이다. 거기에 내내 머무른다면 좋겠지만, 삶은 불쑥불쑥 우리의 뒤통수를 치고, 가끔은 나 스스로 새로운 상황에 몸을 던지고 싶기도 하니까. 그럴 때마다 떠올리는 것이다. 내가 나로 서는 어떤 지점들을, 내가 나와 세상을 동시에 긍정하는 순간들을, 나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내 몸의 모든 촉수가 낱낱이 살아 숨쉬는, 그래서 각자가 느껴야 할 것들을 모두 느끼고 있는" 상태를.








자기 결정은 한 번 이루고 도달하는 정점이 아니라 매순간 겪어가며 만드는 과정에 있었다. 그러게. 의미 있는 가치들은 다루기 까다롭고 예민하다. 쉬이 얻어지는 법이 없다. 정세랑의 말처럼 복잡한 내 영혼을 '복잡하게 사랑하면서', 조금 더 나의 영혼에 가까운, 동시에 세상과 타인으로부터 건강하고 안전한 거리를 유지할 줄 아는, 징징대기보다는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줄 아는 한 명의 어른으로, 인간으로, 네 살이었던 우리로. 우리는 적어도 화장실은 혼자 갈 수 있으니까. (아이 참, 나 왜 자꾸 네 살이랑 경쟁하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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