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이에 마사시,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소설의 내용이 언급됩니다.)
"사라질 준비. 그것은 큰 고리를 중간 정도의 고리로 줄이는 일, 작은 고리를 중심을 향해 더욱 축소해가는 일, 고리였던 것은 결국 점이 되고 그 작은 점이 사라질 때까지가 그 일이었다. 하지메의 등에서 뻗은 보이지 않는 선 끝에 있는 소실점은 지금 에다루 어딘가에 더는 움직이지 않도록 핀으로 고정되어 있을 터였다."
이 소설은 누군가의 죽음(에미코)으로 시작해서 누군가의 탄생(아유미)으로 끝을 맺는다. 물론 그것은 시간 순서는 아니다. 에미코는 아유미의 고모 중 한 명이고 아유미는 에미코의 오빠 신지로의 맏딸이므로 두 사람의 죽음과 탄생을 굳이 시간 순서대로 놓자면 아유미의 탄생,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흐름, 에미코의 죽음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에다루를 집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한 가문의 삼대에 걸친 이야기를 에미코와 아유미의 죽음과 탄생으로 설명하려 했을까. 그 이야기를 하자면 우선 작가가 1958년에 태어난 남자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1958년생이라면 한국 나이로 64세, 이 소설 속 인물과 대조해보자면 신지로의 아들 하지메와 동갑이다.
그럼 다시, 1958년에 태어난 60대 중반의 남자가, 두 여성의 죽음과 태어남으로 기억될 소설을 쓰는 일을, 더구나 이렇게 섬세한 감수성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일을 생각한다. 그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으로 "남자의 본질은 자상함, 모성이네. . . . . 어이, 자네, 그 다박나룻 좀 깎게."를 골랐는데, 나는 아유미의 탄생과정을 자세히 묘사하는 마지막 이야기와 저 문장에서 뭉클했다. 눈물도 조금 났다. 소에지마가 사람들 중 유독 내 마음을 아리게 했던 인물들에 대한 그의 시선 때문에 그랬고, 인간의 삶이 이토록 비슷하고 또 이토록 잔인한가에 대한 숨김 없는 묘사 때문에 그랬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작가가 설정한 시대적 배경(20세기)은 어쩌면 인류에게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시절일지 모른다. 21세기의 우리는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기존의 가족의 모습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누가 가장이느냐의 문제, 가족 내 성 역할, 가족 구성원 사이의 위계 문제까지. 그리고 가장 중요할 한 가지. 꼭 혈연이어야 하느냐는 질문.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은 말하자면 위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낯선 타지에서 외로움을 느끼거나,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흔히 집을 떠올린다. 집에 가고 싶다는 감정을 느낀다. 모체를 거치지 않은 생명이 없듯, 가족이나 집은 우리가 한 번이라도 거쳐가는, 혹은 영원히 머무르는 어떤 기원이고 상징이다. 그것이 비록 현실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이 소설의 큰 줄기를 이루는 이야기인 소에지마가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내가 아는 혹은 바로 나인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얼굴이 그리 달갑지는 않다.
소에지마가 사람들 대부분이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네와 에미코, 그리고 아유미의 모습에는 내내 마음이 쓰였다. 그들은 그들이 타고난 시대적 아픔을 자신의 온 생을 통해 겪어내야만 했는데, 그 말없이 감내하고 참는, 그러면서도 '자기 스스로가 아닌' 모습에는 어쩐지 타고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하지만 결국에는 소멸해버릴 너무나 가여운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시기에 부모에게서 받은 것. 그것이 아무리 기울어 있어도 그 새장에서, 아니 그 우리에서 자력으로 나가려면 상당한 의지와 사고가 필요하다. 게다가 나오자마자 살아갈 방도를 잃고 손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가혹한 처사를 당하더라도 정작 거기서 벗어나자마자 안정을 잃고 동서남북 아무 데도 모르는 곳에 떨어지는 일도 있을 것이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어린 나이에 '다른 집'으로 보내진 요네의 삶, 갈등을 꺼려하는 무뚝뚝한 언니와 자주 교활하고 사나운 동생 사이에서 버티는 일이 도무지 불가능해보이는 연약한 에미코의 삶, 자기에게 주어진 것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모두 살아보려 했지만, 결국 너무 빨리 꺼져버린 아유미의 삶.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고, 그들이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지 생각할 때면 답답한 마음이 되었다. 그래서 끝내, (내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요네에서 에미코로 그리고 다시 아유미로 이어지는 이 가문 속 여성의 삶이 아유미의 때이른 발병과 짧은 투병으로 마무리될 때 나는 가슴이 저릿한 슬픔을 느꼈다. 그건 나에게 이런 질문으로 다가왔다.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가지만, 과연 그때 말하는 '당신의 집은 어디'냐고.
자신의 '남자로서의' 자존심과 로맨스로 포장한 치정 관계에 갇혀버린 남편과 줄줄이 딸린 아이들이 있는 집이 요네의 진짜 집이었을까. 일에 몰두하느라 웃는 얼굴은 거의 없는 엄마와 돈과 여자에 홀려 가정에 있지 않았던 아빠가 있는 집이 에미코의 진짜 집이었을까. 어떤 일에도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가장'이라는 역할과 믿음에는 기꺼이 갇히고자한 아빠와 세 명의 시누이와의 말 못할 신경전으로 남편과의 관계마저 소원해져버린 엄마가 사는 집이 아유미의 진짜 집이었을까.
내 상상 속에서 요네의 집은 조산원, 더 정확히는 아이가 태어나는 장소였을 것이고, 에미코는 이 생이 아닌 다른 생이 집이 될 것이며, 아유미에게는 '하늘' 혹은 '별'이 집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집'이라고 부를 때 상상하는 그 공간은 결코 '집'이 돼주지 못했다. 그래서 요네는 집에 있으면서도 늘 조산원만 생각했고, 에미코는 집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이곳에서는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고, 아유미는 일찍이 집을 떠났다.
결론적으로 에다루의 그 '집'에는 사납고 이기적인 도모요나, 무능력하고 신경질적인 신지로만이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는 얘긴데, 그건 과연 집 혹은 가정에 대한 어떤 감정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의지가 아니라 처지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을까. 끝내 자신의 늙은 두 누나에 대한 보살핌의 책무마저도, 늙어버린 자신을 돌보는 책무마저도 그토록 미워하고 배척하던 아들, 하지메에게 별 일 아니라는 듯 일임해버리는 신지로의 완고한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피로감은 뭘로 상쇄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다시 질문을 받는다. '당신의 집은 정말로, 어디입니까.'
작가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가지만, 이제 그 집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집이 아닐지 모른다고. 당신의 반성할 줄 모르는 완고함과 허물어질 줄 모르는 남성성만으로는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왜냐하면 우리의 끝은 결국 소멸뿐이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로 당신이 대신해줄 수 없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것 안에는 멀어지는 힘과 함께 돌아오는 힘이 작용하는 것 같다. 아유미는 정신이 아찔해질 것 같은 타원을 그리는 혜성의 궤적을 좋아했다. 혜성 중에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도 있다. 이백 년이 걸려 돌아오는 것도 있다. 태양에 다가갈수록 꼬리를 길게 끌고 빛나며 태양으로 얼굴을 향하는 혜성. 어떤 인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똑바로 나아가는 혜성은 하나도 없다. 자기 뒤에 꼬리가 뻗어 있는 것을 상상했다."
아유미가 사랑한 천문학에 기대어, 그래, 헤어짐도 마냥 헤어지는 것만은 아닐거라고, 우리 생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은 아주 소중한 시도일거라고, 나를 위로한다. 나는 이제 나를 키운 집을 떠나 '내가 돌아가고 싶은' 그 집을 상상하고 만들어가는 중이다. 이 소설이 들려준 질문들이 나에게도 오래 머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