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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Oct 14. 2021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고통스럽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언제나 새로운 사례들이 업데이트 된다. 뉴스를 틀면 나날이 더 잔인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보도가 내 귀를 때리고, 드라마나 영화 역시 나날이 더 잔인해지고 있다. 아무 설명 없이 총과 칼로 사람을 몇 씩이나 죽이는 주인공의 연기 변신을 '멋있다'고 평가하는 세상이니까.


촌스러운 나는 그 수많은 업데이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런 영상들을 보는 게 상당히 힘들다. 허구의 영상임을 머리로는 다 아는데도 나에게는 그 사실적인 묘사를 눈에 담는 순간, '허구'라는 생각보다는 감정이입이 먼저다. 그런 장면은 나에게는 그 자체로 괴로움이다. 피를 내뿜는 몸과 죽어가는 몸을 보는 일에 어떻게 면역이 생기는 걸까. (이러면서 오컬트나 귀신 나오는 공포물은 또 잘 보는 편. 도대체 모르겠다 나란 여자.)


그런데 나를 정말로 진저리치게 만드는 잔인함은 따로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묻어두려'는 시도, 그만 괴로워하라는 억압, '자식으로 장사한다'는 비아냥. 내가 어른이 되고 저런 말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게 됐을 때 나는 세월이 원망스러웠다. 그런 말의 존재를 모르고 세상과 인간을 마냥 긍정하고 믿을 수 있을 때의 나로 돌아가고 싶었다. 무서웠다. 인간이, 세상이.


또한 부끄러웠다. 그렇게 매번 진저리를 치면서도 매일의 생활을 핑계삼아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내가. 그들을 나서서 돕지도 못하는 내가. 그저 책이나 읽고, 눈물이나 흘리는 내가. 어떤 날은 잔인함이라는 배의 가장자리에 올라타고 이 세월을 건너는 중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들과 뭐가 다른가. 질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책을 내 방식대로 이해하고 그 이해한 것을 책 속의 두 문장으로 말하자면,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고통스럽다" "나는 본다"일 것이다.


고립된 섬에서 벌어진 잔인(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학살. 지도에 선을 긋고 소개령을 내린 날, 열 살 미만의 어린아이들까지 예외가 없던 그 야만의 시간. 그리고 내 가족의 죽음을 그냥 그렇게 둘 수는 없어서, 뼛조각이라도 찾기 위해서,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아니, 온전히 받아들여서 변해간 사람들.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못했고, 꼭 두 개의 삶을 사는 듯했던 사람들.


그런데 나는 그들이 겪은 그 시간보다도 더 잔인한 순간을 본다. 그들의 상처를 함께 아파하는 대신 묻어두려했던 세월을, 신문의 귀퉁이에 실려 세월과 함께 억눌렸던 그들의 고통을, 그 날에 대해 잘못 말하면 죽게 될까봐 내내 쉬쉬해야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겪어야 했던 것도 모자라, '없는' 사람이 되어 살아야 했던 그 긴 시간들을 본다. 그리고 고작 소설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도, 딱 한 권 분량의 고통을 읽었을 뿐인데도 나는 이토록 괴롭다. 나는 보았고, 제대로 보려고 하니 무척이나 괴로웠다. 이게 잔인한 일이 아니면 무엇이 잔인한가. 이제야 이것을 읽는 내가, 아프다고, 내 몸과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는 일이 나는 마땅치 않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 인선과 경하가 제주의 중산간 지대에서 하룻밤 동안 들려주는 '그 날'과 '그 세월'에 얽힌 이야기들이 나를 할퀴고 베인다. 내 마음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진다. 나는 피 흘리는 마음을 움켜 쥐고 계속 읽는다. 돌이 된 여자를, 버스를 기다리느라 머리 위에 하얀 눈을 이고 언제까지고 서 있던 할머니를, 아미와 아마를, "잘 놀다 가세요"라고 두 손을 맞잡아주던 인선의 엄마 정심을 나는 본다. 나는 아프다고 말하려다가, 그들을 보며 그 말을 꿀꺽 삼킨다.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그런 말을 들어서일까.


죽어가던 동생의 입에 피 흘리는 자기 손가락을 물려주던 소녀를, 자신을 찾아오는 동생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머리를 매만지던 어린 소년을, "내가 나가면 너는 스물한 살 정숙이는 스물다섯 나는 스물여덟 아니냐 보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하지마는 눈물 흘릴 것이 무어 있나 쇠털같이 많은 날을 만나 옛이야기 나눌 수 있는데"라며 동생들을 달래던 감옥 안의 앳된 오빠를 떠올린다. 갱도가 넘치도록 사람들이 죽었던 날을 떠올린다. 그 갱도 안으로 들어가서 오빠를 찾으려고 섬에서 배를 타고 오가던 여동생을 떠올린다. 내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해서, 한 번은 죽음을 확신하면서 그 다음 한 번은 삶을 상상하면서 신문을 모으고 흔적을 수소문하다 끝내 늙어버린 여자를 떠올린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덜 아픈 것이다. "제대로 볼수록 고통스럽고, 나는 본다"고 말하려면 나는 아직 제대로 보는 일을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잔인함이라는 배의 한 귀퉁이에 올라탄 건 아닌지 스스로 물었던 건, 아직 덜 보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말하고 있다. "제대로 볼수록 고통스럽다니까? 그래도 보고 싶어?" 그리고 덧붙인다. "너에게는 이걸 봐야할 의무가 없어. 누구도 너에게 그걸 강요하지 않아."


경하의 속마음 - "그걸 펼치고 싶지 않다. 어떤 호기심도 느끼지 않는다. 그 페이지들을 건너가라고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복종할 의무가 나에게 없다." - 를 들으며, 나는, 나에게 묻는다. 누군가의 아픔을 바라보는 일은 복종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아니었음을. 그건 지극한 사랑에서 비롯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 그래서 작가는 이 소설을 '지극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구나. 그렇다면 작가에게 사랑은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가.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 . . .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보지 않으려해도 봐야하는 것. 그것이 의무나 책임, 누군가가 강요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도 볼 수밖에 없는 것. 더 깊이 더 깊이 갱도 저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도 포기할 수 없는 것. 끝내 봐야 하는 것. 괴로울 것을 알고도 보는 것. 괴로워서 더 보는 것. 작가에게 사랑은 외면이 아니라 보는 것. 등돌리는 게 아니라 손 내미는 것. 정심이 그랬던 것처럼.


유진목은 자신의 책에서 "사랑을 품은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거의 매번 지고 만다"고 말했다. 사랑하지 않으면 외면할 수 있고, 보지 않을 수 있고, 말 그대로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으므로. 사랑하는 일이 낭만과 동의어로 쓰이는 세상에서, 사랑이면 다 된다고 속삭이면서도 정작 사랑하는 일에는 무관심한 세상에서, 실은 사랑이 가장 마지막까지 눈 뜨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어떤 잔인함도 끝내 보아내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작가는 제주에서의 하룻밤을 통해 보여준다. 설득하지도 달래지도 않고 그저 들려준다.


"죽으러 왔구나 내가"라는 경하의 말처럼. 어쩌면 그것은 꼭 죽음과 맞닿은 일. 그이가 겪은 그 일들을 낱낱이 들여다보는 건 마치 내가 죽는 것 같은 경험일 것이고, 경하는 그날 밤 모든 죽어간 이들과 함께 했다. 하염 없이 눈은 내리고 초가 타들어가던 밤, 죽었던 아마와 죽을 지도 모르는 인선이 찾아온 밤, 누가 자꾸 문을 두드리던 밤에 경하는 이제 그만 돌아가자는 인선의 말에 스스로 질문한다. "돌아가고 싶은가? 아니, 돌아갈 곳은 있나?"


경하가 마침내 "이 걸음을 멈추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영원히 돌아가지 않아도 좋다고 느꼈을 때", 나는 경하가 비로소 어떤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걸, "내 새도 아니고 그렇게 사랑하던 새도 아니다"는 말로 도망치지 않고 아마의 죽음에 함께 마음 아파할 때 경하는 '작별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꼭 내가 그 사름을 기다렸던 것추룩. 누게가 이걸 물어봐주기만 기다리멍 십오 년을 살았던 것추룩" 자신들의 아픔을 말하고 싶어했을, 그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듣기 시작할 때, 우리는, 사랑하게 되고 작별하지 않게 됨을.  






300 페이지의 소설이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지금, 이곳의 현실에 대한 혹은 ' ' 대한 은유처럼 다가왔다. 잘려나간 인선의 손가락을 접합한 부위를  분에  번씩 찔러서 억지로 고통을 주고 피를 나게 해야 신경이 죽지 않는다는, 만약 그게 고통스러워서 손가락을 절단한 채로 두면 환지통에 시달릴 거라는 딜레마적 상황이나, 경하가 제주에 도착하기 전까지 겪는 고통 - 자살을 생각하는 , 눈보라 치는 제주, 고립, 상처 입음 - 모두는 우리 사회가 건너온 현대사의 고통  자체이며, 나아가  고통을 잘라내버지도 똑바로 보지도 않은 채로 살아야 하는 지금, 우리의 고통  자체이다. (어쩌면 없는  잘라내 버린 뒤의 환지통이려나. .)


인선이 많은 것을 잃고 스스로 고립됐던 경하를 찾아올 때마다 했던 말, "너는 한 가지 일만 하면 돼. 문을 열어줘"는 꼭 인선에게, 아니 그녀의 엄마 정심에게 우리가 건네야 할 말의 전부로 들린다. 괴로워도 보겠노라고, 그저 한 가지만 해달라고, 그 문을 열어 달라고.


그러니 내가, 나 역시 잔인함이라는 배의 한 귀퉁이에 탄 것이 아닌가 물으려면.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나는 그 잔인함을 바라보려는 것인가, 잔인함을 외면하려는 것인가.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고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도 아니'라고 말할 것인가, 그들을 알고 싶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니까 나는 무언가를 사랑하려는 것인가, 사랑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나는 나에게 남은 질문을 살아간다. 그래. 이것은 역시 의무도 책임도 아니다. 꼭 하지 않아도 된다. 나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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