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희 Apr 22. 2021

김진영, <상처로 숨 쉬는 법>


분명한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동시에 아주 많은 이유들을 댈 수도 있지만) 나는 상처나 아픔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오래도록 그런 사람이었다는 기억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내 기억이 닿는 한 상처나 아픔에서 잘 벗어나지 못했다. 그건 내 상처 남의 상처라는 구분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고,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상처나 아픔에 내 마음이 저절로 끌어당겨지는 감각이었다.


오해하지 말자. 그렇다고 해서 내가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았다거나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했다거나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니까. 아, 오해가 아니라 실망이려나.


나는 그저 상처나 아픔을 지나칠 수가 없었을 뿐이다. 지금도 그렇다. 다시 한 번 실망을 시키자면(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나도 참 이기적이다) 상처나 아픔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용서를 말하고, 치유를 권하는 건 아니다. 내 상처나 아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쉽게 용서하고 치유하지 못한다. 책의 표현을 빌자면, '종교적인 무조건적인 용서' 같은 것과도 물론 거리가 멀다.


그럼 대체 내가 상처와 아픔에 반응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건 일종의 궁금증이다. 당신은 왜 아픈가, 나는 왜 상처가 있는가, 우리는 왜 괴로운가. 이유를 알지 못하면 나는 꺼림칙한 마음을 지우지 못하겠다. 미안하다. 나는 상처를 보듬으려는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탐구하려는 괴팍한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내내 강탄산을 쭉쭉 들이키는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나랑 비슷한 성향의 친구(라고 하기에는 워낙 훌륭한 학자들이지만)와 "그치그치" "맞아맞아" "너도 그래? 나도 그래!"라며 맞장구를 치며 수다를 떠는 기분이었다.


이쯤되면 나는 다시 해명을 해야한다는 중압감을 느낀다. 내가 평생 철학을 한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는 건 아니다. 수준(?)이 맞아야만 친구인가? 내가 상대에게 배우면서도 얼마든지 친구처럼 친근하게 느낄 수 있지 않나. 내가 가진 태도나 문제의식을 공감받는데서 느끼는 반가움, 세상은 서로 힐링해주며 아름답기만한데 '나만 너무 비관적인가?' 라는 말못할 소외감으로부터 해방되는 느낌, '겉으로는 착해보인다'는 이해와 오해가 뒤섞인 시선으로부터의 억울함을 달래주는 것 같은 고마움 등을 느낀다. 가령,


"우리 사회의 문화적 분야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들이 있어요. 때때로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철없어 보여요. 넓은 가슴을 얘기하면서 다 용서해야 된다 그러고, 한동안 힘들겠지만 인생에는 아름다움이 있으니까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얘기하는 태도를 보면 내가 이렇게 얘기한다고 누가 감히 부정을 하겠는가 하는 자기 권위 의식 같은 것들이 드러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부분을 읽으면 답답했던 마음, 어딘가 불편하고 강요 받는 것 같았던 그 감각들이 낱낱이 드러나면서 봄날의 바삭바삭한 햇빝에 그 꺼림칙하고 눅눅한 것들이 기분좋게 바싹 마르는 것 같이 내 마음이 좋았다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동시에, "지식인은 자기가 힘들 때는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비판을 하다가 성공하게 되면 자기가 비판했던 바로 그 말들을 세상이라는 하수구로 도로 내려보낸다."는 부분을 읽으면서는 등골이 서늘해지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딱히 지식인 수준(!)도 아니면서, 감히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누군가를 잘못했다고 비판하는 것과 내가 그렇게는 살지 않는 것 사이에 그리 큰 강이 흐르지 않는 다는 것쯤은 안다. 손가락질하는 것보다는 내가 그렇게 살지는 않는지 성찰하고 노력하는 게 낫다. 사실 아주 작은 개울, 훌쩍 건너뛰면 그만인 그 작은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내가 손가락질 하고 싶은 그 사람과 나는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나 역시 그 개울을 넘어가 본 일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나 또한 내가 앞서 뱉은 말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아도르노의 사상을 직접 공부하지도 않은, 그저 두 학기 분량의 강의를 그나마도 책으로 읽은 내가, 나의 문제의식과 이들이 말하는 진지한 사상을 연결시키는 것이 타당한가. 생략된 부분으로 인한 오류는 없는가.' 나는 아도르노와 김진영의 철학을 아주 일부분만 경험한 것이니, (당연히) 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자격이나 수준이 필요한가?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는 질문, 해야 하는 질문 앞에서도 움츠러든다. 서로에게 자격이나 수준을 운운하면서, 그런 말로 비아냥대면서, 결국 스스로에게 상처를 준다. 이뿐인가. 우리는 사랑 앞에서도, 아름다움 앞에서도, 선량한 마음 앞에서도 끝내 상처만 주고 받는다. 이런 식으로 상처에 시달리는 영혼들이 가야 하는 길은 뻔하다. 그저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것.


"어떤 진실 앞에 '마야의 베일'을 치게 되면 그것을 보는 것 같은데 사실은 보지 않는 효과를 가져와요. 그래서 이상한 양가적 충족이 일어나죠. 하나는 정직성에 대한 만족을 얻을 수 있어요. 나는 보았다고 하는 거죠.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목적을 수행하죠. 베일이 있기 때문에 직접적 접촉이 일어나지 않아요. 나는 언제나 구경꾼의 자리에 있을 수 있어요. 구경꾼이 제일 행복하죠."


끊임없이 스스로가 소외되는 구조 속에서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살아남는 것'이 되었다. 행복, 사랑, 위로 같은 걸 주고 받는다고 믿지만, 실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을 뿐이다. 서로의 의심을 확인하고 그때마다 적당한 힐링을 하며 '사는 게 다 그렇지' '나만 그런가 어디' 라는 말로 위안하는 것이다.


"어느 한 사회가 살아야겠다는 법칙으로 운용된다는 것은, 그 사회 안에서 살고 있는 개체들에게 성찰적, 교양적, 주체적 삶이 아니라 본능적 삶을 살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죠. 살아 남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플러스알파가 있는 거예요. 그것이 인간적인 것이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가 처참한 경쟁 사회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all or nothing' 이라고 얘기하잖아요. 조금 가지고 많이 가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가지지 않으면 아예 텅텅 빈다는 것이죠."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예리한 눈빛 속에 왜 나는 희망이나 따뜻함 같은 것들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750쪽 분량의 책에 담긴 모든 내용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마치 이 책이 울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괜찮다"는 말에 속지 말라고, 당신이 안 괜찮다는 거 안다고.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너무 잘 다스리죠. 그러면서 나를 딱딱하게 만들어요. 아무것도 안 느끼게 만드는 거예요. 타자의 고통에 철저하게 무감각하게 만들어요." 언뜻 보면 신경질날 정도로 따져 묻는 것 같은 그 말들 속에서 포기하지 않겠다는, 지켜보고 있다는, 잊지 않았다는 애정이 느껴졌다. "제일 중요한 것은 상처를 아프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사랑을 통해서도 상처를 아프게 하면 안 됩니다. 무엇이 먼저냐 하면 그 사람의 상처를 아프지 않게 하는 것이 먼저예요. 절대로 사랑이 먼저가 아니에요. 그런데 워낙 사랑, 사랑 하다 보니까 사랑이면 다 되는 줄 아는 세상이 된 거죠." 날카로운 말들 사이에 파편처럼 박힌 연민의 시선에 내 마음이 움직인다. 나에게 "유보 없는 행복의 삶"을 살아가라는 말이 억지스러운 강요로 들리지 않는다.








그럼 이제, 어떻게, 라고 물을 타이밍인가.


우선 미미크리(내가 살기 위해 적을 이기고 싶지만, 나는 너무 약하니 적이 원하는 것이 되어서라도 살려는 상태)에서 벗어나서 미메시스(약한 내가 나를 유지하기 위해 강한 것과 관계를 맺지만, '나는 저 강한 것이 되려는 게 아니라 강한 것과 무관해질 것이다. 강함과 약함의 관계가 없는 삶, 다른 가능성을 찾아갈 거야' 라는 생각을 잊지 않는 상태)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이렇게 얘기해요. 좋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그런 걸 만들려면 미래에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라고요."


다음으로 나와 타자를 사랑하는 일에 대해, 우리에게는 '연민과 인식'의 성찰이 필요하다. "하나는 타자가 추하다는 것에 대한 인식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저렇게 추하다니'라는 연민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다워야 하는 사람인데 저렇게 추할 수밖에 없구나, 이런 연민이죠. 그다음에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 왜 추해졌을까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해요.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냉철한 문제의식이 함께 있어야 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성찰의 방식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사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결국 "어떻게 생을 사랑할 것인가"와 맞닿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의 생은 "허위적이고 허영적이고 위선적으로 얘기하는 생"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 되어야 함에도 그 권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추하게 되어버린 것들에게 생의 권리를 되돌려주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유가 생의 권리를 돌려주느냐 못 돌려주느냐에 따라서 대상은 아름다운 것이 될 수도 있고 추한 것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생을 사랑한다는 것은 왜곡된 생을 그 생이 되고자 했던 바로 그 모습으로 되돌려주는 일"이다.


상처로 숨 쉬는 법이란 결국, 상처라는 틈으로만 우리는 인간적인 무엇을, 사람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울 생의 권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상처가 허파가 될 때' 우리는 온갖 버려진 것들과 아파하는 것들, 고통당하고 있는 것들(동시에 내 안에 버려지고 고통받고 아파하는 어떤 면들)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것들을 끝내 아름답게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나 또한 아름다워지면서 말이다.  








나는 다시 그저 나의 삶으로 생활로 돌아온다. 언제나 그래야 한다. 다만 저 모든 질문들을 잊지 않은 채로, 나는 내 삶의 탐구자가 된다. 내 상처와 아픔 곁에 자리 잡는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까.

매거진의 이전글 이은혜, <읽는 직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