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무엇이 잔인한가에 대한 도덕적 인식과 확신은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교육을 받은 자로서 도덕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그 도덕적 인식과 확신이 형이상학적인 필연성 없이 우연적으로 이루어지며 다른 관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물론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문제에 대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관용으로까지 이어가지는 않습니다. 도덕적 판단은 취향의 문제와는 달라서 포용할 수 있고 없고가 거론될 일은 아니에요.
1. (도덕적 친밀감을 나누는) 그들은 서로에게 중요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감정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적으로 던지기 때문이지요. (중략) 도덕적 수치심이나 후회는 자문할 수 있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페터비에리
#문항심옮김
#자기결정
#은행나무
도덕적 판단이란 거창한 게 아니다. 나에게는 명백히 슬프고 괴로운 장면이 누군가에게는 별 일 아닌 순간, 나에게는 명백히 안 웃긴 장면이 누군가에게는 낄낄거릴 농담인 순간을 통해 나의 도덕적 판단의 근거와 기준을 새삼 깨닫는다.
나는 가끔 나의 도덕적 판단을 취향의 문제나 유연성의 문제로 치부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고, 그때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거리에 걸려 넘어져 크게 다친 적이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런 부끄러운 기억은 쉽게 잊을 수 없다.)
도덕적 판단의 간극이 지나치게 제멋대로라면 사는 일은 고달파진다. 그 기준이 누구는 높고 누구는 낮은 것도 모자라 다수에 의해 낮은 도덕적 판단이 강요될 때. 함께 잔인해지기를 요구할 때. 우리는 혼란스러움을 넘어 자아를 침해받고 자아를 조작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그 모든 혼란과 압박,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자아를 스스로 결정하고 지켜내고 싶고, 동시에 타인이 나로 인해 스스로를 의심하거나 잔인해지는 것도 싫다. 내가 자유롭고 싶은 만큼 타인도 그러길 바란다. 그렇게 스스로 선 자유로운 사람들이 친밀한 관계를 공들여 쌓아나가는 일은 언제나 벅차게 아름답고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