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희 Sep 13. 2021

도덕적 인식과 자기 결정


0. 무엇이 잔인한가에 대한 도덕적 인식과 확신은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교육을 받은 자로서 도덕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그 도덕적 인식과 확신이 형이상학적인 필연성 없이 우연적으로 이루어지며 다른 관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물론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문제에 대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관용으로까지 이어가지는 않습니다. 도덕적 판단은 취향의 문제와는 달라서 포용할 수 있고 없고가 거론될 일은 아니에요.


1. (도덕적 친밀감을 나누는) 그들은 서로에게 중요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감정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적으로 던지기 때문이지요. (중략) 도덕적 수치심이나 후회는 자문할 수 있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페터비에리

#문항심옮김

#자기결정

#은행나무







도덕적 판단이란 거창한 게 아니다. 나에게는 명백히 슬프고 괴로운 장면이 누군가에게는 별 일 아닌 순간, 나에게는 명백히 안 웃긴 장면이 누군가에게는 낄낄거릴 농담인 순간을 통해 나의 도덕적 판단의 근거와 기준을 새삼 깨닫는다.


나는 가끔 나의 도덕적 판단을 취향의 문제나 유연성의 문제로 치부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고, 그때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거리에 걸려 넘어져 크게 다친 적이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런 부끄러운 기억은 쉽게 잊을 수 없다.)


도덕적 판단의 간극이 지나치게 제멋대로라면 사는 일은 고달파진다. 그 기준이 누구는 높고 누구는 낮은 것도 모자라 다수에 의해 낮은 도덕적 판단이 강요될 때. 함께 잔인해지기를 요구할 때. 우리는 혼란스러움을 넘어 자아를 침해받고 자아를 조작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모든 혼란과 압박,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자아를 스스로 결정하고 지켜내고 싶고, 동시에 타인이 나로 인해 스스로를 의심하거나 잔인해지는 것도 싫다. 내가 자유롭고 싶은 만큼 타인도 그러길 바란다. 그렇게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들이 친밀한 관계를 공들여 쌓아나가는 일은 언제나 벅차게 아름답고 소중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몇 번이고 돌아보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