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드리언 리치
그녀의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 나는 두 가지 부끄러운 고백을 하려고 한다. (이쯤 되면 고백이 취미인가) 수년 전, 나는 그녀의 이름을 어디선가 어렴풋이 읽고는 막연히 '남자'라고 상상했었다. 맙소사. 네, 제 지식이 좀 짧습니다, 네네. 두 번째는 '페미니즘'에 대해 편히 이야기할 만큼 내 공부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무슨 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은 별로 없지만,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이제 겨우 공부하고 알아가는 중이니 그녀의 책을 내가 '리뷰'씩이나 하는 게 좋은 선택 일리 없다고 판단했다. 이 책 한 권에 대해서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걸어온 길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러니까 그녀가 말하려는 게 대체 어떤 건지는 좀 더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다시 이 책을 리뷰할 수도 있고, 물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의 글들 중 1970,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들에 2021년의 나 역시 깊이 공감한다면, 그건 두 가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우선 그녀의 글이 매우 빼어나다는 것, 다음으로 세상은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 그녀의 시가 세월을 건너 읽히는 것은 좀 더 이해가 쉽지만, 그녀의 논문, 연설문들, 평론들이 이 시대에까지 뼈아픈 울림을 준다는 것은(그녀는 문장마다 뼈를 때리니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녀의 산문들을 읽으면서 나는 거의 자동적으로 나를, 내 곁의 무수히 많은 여성의 얼굴들을, 아이를 키우는 친구, 사회에서 과도기적 위치에 처해 고민하는 친구, 결혼한 친구,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을 떠올렸고, 그들에게 조각조각 주워들은 이야기들도 함께 따라왔다. 그렇게 그녀의 글을 읽고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나'에서 '우리'라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글들을 읽다 보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겨울은 춥고, 기니까. 봄을 상상할 줄 모른다면 더 춥고, 더 길 테고. 새봄을 상상하며, 우리의 미래 역시 꿈꾸는 시간이 되기를.
제목: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옮긴이: 이주혜
출판사: 바다출판사
"(에밀리 디킨슨에 대해) 그의 소명 의식을 생각해보면 그는 별스럽지도 않고 괴짜도 아니었다. 그저 생존하기로, 자신이 지닌 힘을 이용하기로, 필요의 경제학을 실천하기로 마음먹었을 뿐이다."
"나는 시가 이상화되는 것을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 그 때문에 시는 이미 충분히 고통을 받아왔다. 시는 치유 제도, 감정의 마사지도, 언어의 아로마세러피도 아니다. 시는 청사진도, 사용법 설명서도, 광고판도 아니다. 보편적인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가 태어났을 무렵 나는 스스로를 실패한 여성이자 실패한 시인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제3의 명제를 찾아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느꼈다.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건 운명이라고 부르는 어떤 흐름에 떠밀려 들어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잊어버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며 고른 글귀를 덧붙이고 싶다. "무엇보다 피해자가 되기를 거부할 것.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무력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누구에게 해를 끼칠 리가 없다는 오랜 믿음을 철회하고 포기해야 한다.... 말장난, 이기고 지는 게임은 끝이 났고, 다른 게 없다면 새로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제목: 공통 언어를 향한 꿈
옮긴이: 허현숙
출판사: 민음사
"그는 유명한 여성으로 죽었다 자신의 상처를 부인하면서
자신의 상처가 자신의 힘과 똑같은 근원으로부터 왔음을 부인하면서"
"우리는 사랑으로 거의 노력 없이 나아간다"
"나는 이렇게 주어지는 것들 사랑과 행동 사이 분열을 거부한다 나는 의미 없이
고통을 겪지 않기로 그녀를 이용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이번만은 내 모든 지성을 다하여 사랑하기로 한다"
"다정함이 없으면, 우리는 지옥에 있음을."
"그러나 사실 우리는 늘 이와 같이,
뿌리 없이, 분해되었다: 그것을 알면 달라진다.
탄생이 우리에게서 탄생의 권리를 앗아 가고,
우리를 한 여자로부터, 여성으로부터, 우리 자신으로부터 너무나 일찍 떼어내,
온전한 합창으로 우리들의 귀에 각다귀처럼
고동치는 소리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기원에 대해
아무것도, 우리가 알아야 할 어떤 것도, 우리를 상기할 그 어떤 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2021년 하반기는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의 시대였다. 본방송은 챙겨보지 못했지만, 인터넷에는 거의 일주일 내내 스우파의 하이라이트 장면들이 재생됐고, 어느새 내 검색 알고리즘에도 그들이 추가되었는지, 그들의 인터뷰 영상, 과거 영상, 발언 영상들이 쉴 새 없이 업데이트되었다. 스우파가 막을 내리면서 출연자들은 하나 둘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나도 몇몇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각 댄서팀의 단장들 정도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지난 이야기들도 조금쯤은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삶이 그렇다. 들여다보면 모두 책 한 질짜리 사연이 그득하다. 더구나 '여성 댄서'로서의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거라는 예상은 (슬프게도) 너무나 자명하다. 열악한 근무 조건이나 처우, 사람들의 편견, 사회적인 차별의 시선까지. 그런데 그들은 그런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그런 것들을 개선하기 위해서도 노력하지만 그런 것들 때문에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건강하다. 에너지가 넘친다. 말 그대로 '몸'으로 그 모든 시간을 통과해 온 사람들만이 가지는 확신과 성숙한 열정이 말 한마디, 표현 하나에도 묻어난다. 그들은 서로에게 "최고!"라는 말을 아끼지 않고, 자신에게 "잘했다!"는 말을 망설이지 않는다. '잘했으면, 잘한 거다.' 간결하고 자명한 깨달음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내가 매번 뭉클한 부분은 (당연하게도) 그들의 춤이다. 그들이 몸을 튕기고 비틀며, 바닥에 엎드려 다리를 벌리고 바운스를 타며, 팔과 다리를 자유자재로 꺾고 늘이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부각할 때 나는, 그들의 몸을 '선정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아니, 그들의 몸을 담은 카메라 역시 그들을 '감히' '선정적'으로 '섹시'하게 소비하지 않는다. 그들은 알아주는 프로페셔널이다. 그러니 그들의 춤이 제 역할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상대를 숨 막히게 하는 충분히 관능적인 몸짓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몸은 '그런 식'으로만 해석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정말이지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다.
내가 TV를 보기 시작한 게 어림 잡아도 30년은 훌쩍 넘을 텐데, 나는 지금까지 여성의 몸을, 다리를 벌리고 가슴을 부각하며 흔드는 여성의 몸을, 이토록 가까이 남김없이 보여주면서도 이토록 몸 그 자체로, 그들이 보여주는 춤의 전문성 자체로, 그 에너지와 리듬 자체로 비치는 걸 본 기억이 없다. 이전까지 여성의 몸은 언제나 '평가'와 '훔쳐봄'의 대상이었다. 타고난 체형과 사이즈가 아니라 '유행'하는 체형과 사이즈가 있었고, 연말 시상식이 다가오면 올해의 베스트 드레서(라 부르고 '노출퀸'을)를 탐색하는 음침한 시선들이 가득했다. 여성의 몸짓은 '멋있'지 않고, 예쁘거나 섹시했다. 가녀리거나 소녀 같았고, 천사 같거나 '나이를 잊'어야 했다. (몸을 향한 시선과 잣대에서 자유롭지 못한 면은 물론 나에게도 있(었)고, 나 역시 그런 것들로부터의 자유를 시도하고 누리고 공부하고 있다.)
그녀들은 그 시선에 당당히 맞선다. 아니, 솔직히 이미 그런 시선에 별로 관심 없어한다. '그런 촌스러운 시선 따위' 우리가 관심 가져 줄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 같이 즐기자고. 당신도 일어나서 당신 자신의 몸을 맘껏 움직이라고. 당신은 당신의 몸 그 자체가 아니냐고 묻는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 몸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당신과 함께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뭉클하다. 그 당당한 몸이, 몸짓이, 그들이 '춤'이라 부르는, '모든 걸 걸었다'는 그 세계가 나를 흔든다. 수천수만 번의 외침보다도 더 강렬하게 모두를 설득한다. "어딜 봐! 촌스럽게 굴지 말고 날 봐!" 그들을 보는 이들이 대답한다. "멋있다"라고. 그들이 섹시하지 않거나 예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무엇보다 당신들이 참 멋있다고.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을 읽으며 스우파를 떠올린다. 둘 사이의 아찔한 간극에 어지럽다가도, 나는 어쩌면 둘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태어난다. 우리의 몸에 담겨 한평생을 산다. 하지만 그 몸은 언제나 '내 것'이 아닌 채로 시간이 흐른다. 내 몸은 내 것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시선의 몫, 누군가의 평가의 몫, 어떤 사상의 몫, 어떤 대의에 필요한 몫으로 쪼개지고 갈라지지는 않았는지. 내가 나의 몸을 온전히 알고 쓰고, 몸과 함께 살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내 몸은 마치 쏟아져 내리는 햇살처럼
샌프란시스코 위로 열린다 땀구멍 하나하나 빛의 변화를 외치는데
나는 그녀와 함께 있지 않다 나는 밤새 저 아픔에
잠들다 깨어났다 그저 부재뿐만은 아니고
다만 이곳에서 지금 살아가는 것에 파괴적인
과거의 존재뿐 그러나 내가 만약 나 자신을
가르칠 수 있고, 우리를 움켜쥐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배우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만약 정신, 육체 속에 살아가는
정신이 그 손아귀에서 바스러져 버리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느슨해질 것이다. 고통은 내게서 떨어져 서서 내게 여전히 부는 어둔 숨결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나
정신은 고통을 향해 말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며
고통은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녀들의 몸을 보았나? 함께 흥에 겹고 가슴이 뜨거워졌나? 그녀들이 곧 그녀들의 몸 그 자체임을 인정하나?
돌아보라, 당신 곁에 살아가는 모든 이가 그렇다. 그들 모두가 그저 하나의 몸, 생긴 그대로의 몸이다. 그러니 그것을 존중하라. 우선은, 사랑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있는 그대로 존중하라. 언젠가 "고통은 대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