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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Dec 31. 2021

내 맘대로 뽑은, 2021 올해의 책


지은이: 한강

제목: 작별하지 않는다

출판사: 문학동네

"의무도 책임도 아닌,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 . . .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빡이는. . . . .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지은이: 존 버거

옮긴이: 김현우

제목: A가 X에게

출판사: 열화당

"사랑이란 당신의 고유함을 알아보는 일"


당신에게 나는 '네'라고 말해요, 우리가 살아야만 하는 삶에 대해 나는 '아니오'라고 말하죠. 하지만 나는 그 삶이 자랑스럽고, 우리가 한 일이 자랑스럽고, 우리가 자랑스러워요.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제삼자가 돼요, 나도 당신도 아닌, 그리고 당신도 똑같이 제삼자가 되죠. 그 어떤 '네'나 '아니요'를 넘어선 곳에서 말이에요.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당신 오른손 손목에 있는 흉터를 떠올렸어요. 화상 흉터. 결점. 내가 당신을 알아보는 첫번째 표시예요. (중략) 당신 손목에 있는 흉터를 봅니다. 지나가는 세월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나의 모든 잘못과 결점 중에 당신은 어떤 게 가장 마음에 들어요? 말해 주세요, 우리 함께 이 긴 밤이 지나도록 그것을 즐길 수 있게, 천천히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해 주세요.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 그가 말했어요. 하지만 완벽한 건 그다지 매력이 없잖아. 우리가 사랑하는 건 결점들이지.





지은이: 홍은전

제목: 그냥, 사람

출판사: 봄날의책

"우리 모두 '그냥, 사람'일 뿐"


"허락하지 않으셔도 우리는 하겠습니다."

순간 나는 그녀가 벽관의 문을 여는 것을 보았다. 내가 온갖 사람들의 평화를 계산하는 동안 그녀는 그 계산에서 빠진 단 한사람을 보며 그저 신발 끈을 묶었다. 부끄러웠고 부러웠다. 그녀는 멋있었다. 그런 방식으로 수십 명의 탈출을 도와온 그녀는 싸움닭처럼 세상을 들이받으며 시설 바깥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절망적이었던 것은 순진하고 무례한 공무원들의 태도였다. 기정에겐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가 필요했다. 그러나 국가 예산으로는 지원할 수 없으니 사비로 쓰도록 하라며, 친절하게 계산기를 두드리며 금액을 알려주더라는 것이었다. 그게 얼마냐고 내가 묻자 야학 교사가 대답했다.

"한 달에 500만 원이 넘죠."

나는 새삼 놀랐다. 그것은 늙은 어머니가 홀로 감당해온 노동의 무게이자 국가가 가족에게 떠맡긴 복지의 무게였다. 그 책임자들은 미안해하기는커녕 가족의 고통을 깎아 내리며 말했다.

"어머니가 간혹 때렸다고 하던데, 맞고 사는 것보단 시설에 들어가는 게 더 낫죠."





지은이: 권택영

제목: 감정 연구

출판사: 글항아리

"나는 나의 감정이자 의식이고 나의 마음이자 몸이다."


감각이나 감정을 포함하여 그동안 열등하다고 느낀 몸과 물질이 의식의 일부가 된다. 아니 그 모든 것 없이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의 날개는 이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감정적'이 되라는 뜻이 아니다. 이럴 때 감정적이란 말은 이성 중심주의에서 말하는 감정의 몰입이다. 최근 심리학이나 뇌과학에서 말하는 감정의 날개란 의식과 감각의 적절한 조화를 의미한다. 의식이 전부라고 믿으면 세상의 노예가 되기 쉽고 감각이 전부라고 믿으면 몸의 노예가 된다. 자기 정체성을 세상의 기준에 맡긴 이는 과거 어느 시점에 고착되어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밝고 낙천적이면서 평화롭게 사는 사람은 마음을 자연의 변화에 맡긴다. 여행하듯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런 삶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불행한 일을 겪으면서도 그 일에 매달리지 않는 것은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는 계절의 순환이 그렇기 때문이다.





지은이: 윤경희

제목: 분더카머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영혼의 다락방"


단지, 말이 제 기능을 멈추는 순간, 말 못 하는 우리가 함께 겪는 아름다운 무엇이 있다. 이것만은 나는 말할 수 있다. 더 잘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드물게 고양된 언어적 순간, 우리는 그것으로 서로를 알아듣는다. 이것만이라도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게 다다.


내 무의식의 눈, 항상 뜬 그 눈, 철저하게 이기적인 그 눈을 믿었어야 했다. 그 눈이 내 보물임을 알아보았어야 했다.


고통과 미. 감각의 문제. 두 어휘의 금지는 언어의 삭제를 넘어 감각의 부정이기도 하다. 감각하는 신체와 정신의 억압이기도 하다. 감각기관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마비되고, 병들다가, 퇴화하고, 언어 역량과 감수성이 수축한 정신은 퇴행한다. 따라서 두 어휘의 금지는 최종적으로는 금지하고 억압하는 자 자신의 사멸이나 소거를 초래한다. 어떤 금지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다시 회복하고 갱생하는 절대적으로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세계로부터.





지은이: 목정원

제목: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출판사: 아침달

"그녀는 슬픔을 알아보는 사람, 슬픔은 그녀에게로 가서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작품은 러시아의 한 전설을 다루는데, 그에 따르면 옛 슬라브 지역의 어느 마을에서는 해마다 한 여인을 지목해 죽을 때까지 춤추게 함으로써 봄이 오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진통 없이, 희생 없이, 죽음 없이 봄은 오지 않는다는 믿음. 춤이 없이도 감히 그렇다고 믿었던 시원의 사람들.


그래서 선생님을 그날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때, 창경궁 뜰 안 어느 돌 틈을 밟고, 실은 조금 안도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듣고 싶어 하실 만한 이야기를 제 안에서 한 톨도 길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저는 잘못했지요. 선생님께서 제게 듣고 싶어 하실 만한 이야기를 감히 속단했습니다. 저를 향한 경청의 깊이를 오해했습니다. 감히 외로운 척을 했습니다. 그것이 미안합니다.





지은이: 정혜윤

제목: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출판사: 위고

"그녀의 보물 주머니"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것. 생명의 유한함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서로를 그리고 남은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한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품위다.


온갖 현실적, 물질적 제약에 매여 있는 우리에게는 부자유가 주어졌다. 지옥이 있으므로 천국이란 단어가 필요했던 것처럼, 슬픔이 있으므로 기쁨이란 단어가 필요했던 것처럼, 삶이 짧으므로 오래오래 기억될 아름다움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자유라는 단어가 필요하다. 이 부자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세상이 무엇이라고 하든 우리 안에 파괴될 수 없이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는 것. 그러나 사적으로는 자아에 엄청나게 집중하면서도 공적으로는 위축되고 소심해져,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는 초긴장 신경증적 지옥을 사는 우리가 내적으로 소중한 무언가를 버리기는 얼마나 쉽던가. 이 와중에도 자신의 무언가를 꿋꿋하게 지키고 사는 인간의 모습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품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지은이: 에릭 와이너

옮긴이: 김하현

제목: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출판사: 어크로스

"철학과 인생을 연결해주는 열차 티켓"


철학은 결국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보트를 뒤흔드는 것이다. 선장은 보통 자기 보트를 뒤흔들지 않는다. 잃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자는 아니다. 철학자는 열외자다. 외계인이다.


정원은 관리가 필요하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뒷마당에서 빈둥거리는 사람이 정원사가 아니듯, 생각한다고 다 철학자인 것은 아니다. 정원일과 철학은 둘 다 어린아이의 관대한 즐거움이 수반된 어른의 절제된 헌신을 필요로 한다.


"네. 난 충분히 좋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고 봐요. 이런 것들이 삶에서 더 중요한 일에 시간을 쏟을 수 있게 해줘요. 게다가 충분한 걸로는 부족한 사람에게는 뭐든 충분하지 않을 걸요."





지은이: 미야노 마키코, 이소노 마호

옮긴이: 김영현

제목: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출판사: 다다서재

"당신이 싫어할 우연에 대하여"


갈림길 중 하나로 들어서는 것은 외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게 생겨난 수많은 가능성들을 만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능성이란 계속 나뉘는 길 중에서 도착지를 알 수 있는 한 줄기 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가능성이란 항상 쉬지 않고 변화하는 전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를 믿고 '지금'에 몸을 내맡기며 우연 속을 살아가는 삶이란 무척 멋집니다. 저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렇게 살고 싶다고 바랍니다. 하지만 우연에 몸을 던지는 삶은 주위 사람까지 끌어들입니다. '나 혼자 선택하면 그만'이 아닙니다. 우연에 몸을 던져 연애를 하는 것과 제 병에 주위 사람들이 휘말리는 것은 꽤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우연의 철학을 연구해온 저의 현재 가장 큰 고민입니다.





지은이: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옮긴이: 이민아

감수: 박한선

제목: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출판사: 디플롯

"(오해 받아 온)다정함을 위한 다정한 변명"


하지만 우리의 친화력에도 어두운 면은 존재한다. 우리 종에게는 우리가 아끼는 무리가 다른 무리에게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위협이 되는 무리를 우리의 정신 신경망에서 제거할 능력도 있다. 그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연민하고 공감하던 곳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공감하지 못하므로 위협적인 외부인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으며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관용적인 동시에 가장 무자비한 종이다.


서식지는 바뀌었지만 우리 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큰 규모의 집단 안에서 협력하며 살아갈 때 가장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종이다. 우리는 출신이 다양한 사람들과 생각을 교류할 때 가장 혁신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건축물이 관용이 베풀 때 그 안의 개인들도 관용을 베풀 수 있다. 건강한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려움 없이 서로를 만날 수 있고 무례하지 않게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으며 자신과 하나도 닮지 않은 사람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덧. 한해 동안 찾아와서 글을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해요.


저는 새해를 맞아 잠시 쉬고, 곧 다시 찾아 올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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