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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an 13. 2022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오에 겐자부로, <개인적인 체험>


당신 역시 살면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마주한 적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일은 나와 떼려야 뗄 수 없고 정신 승리류의 가벼운 인식의 조작도 전혀 통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일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럼 불편한 질문을 좀 더 이어가 볼까. 그때 당신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아주 힘들었지만 끝내는 그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는가, 아니면 (아이러니하게도) 아주 힘들었지만 끝내는 그 일을 사실이 아닌 거로, 끊임없이 인식을 조작하고 스스로 거짓말을 하며 그 일을 외면/회피했나.


'나쁜 일'을 행하지 않는 면에서라면 우리는 좀 더 떳떳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주 힘든 과정을 포함하는) '좋은 일'을 행하는 면에서라면 우리는 거의 떳떳하지 못할 것이다. 나쁜 일을 선택까지 하려면 여러 단계의 개인적/사회적 방지턱이 있어 나를 제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좋은 일을 선택하는데는 어떤 강제성도 없고, 오히려 그 일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인품의 성숙과 현실적인 에너지도 상당량 필요하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이라면 엄청난 품이 예상되는 '좋은 일'을 단지 좋은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택하기 어렵다.


그럴 때 인간은 씁쓸해지고, 자신감을 조금씩 잃어간다. 대신 어느 선을 넘어서면서는 좀처럼 씁쓸하지도 자신감이 떨어지지도 않고 되려 우쭐해진다. 내 생각에 이건 자기방어적인 태도라고 본다. 나쁜 선택을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좋은 선택을 할 만한 용기도 없음을, 나 말고 남들도 다 그러지 않느냐고 강변하다가 지친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 그래서 그 선을 넘은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을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 그 누가 자기 존재를 부정하도록 놔두겠나. 그들에게 자기방어는 목숨줄 같은 것.


그런데도 세상은 끊임없이 좀 더 영악해져야 한다고, 너만 바보가 될 거냐고 묻는다. 그러면서도 끝내 그만큼 영악해지고 똑똑해진 '내'가 감당해야 할 감정적인 공허까지 책임지지는 않는다. 세상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다는 걸 말해주지 않는다. 영혼과 재능을 맞바꾸겠느냐고 묻는 악마가 영혼 없는 삶에 대해 늘어놓지 않는 것처럼. 세상은 마치 대가 없이 이익을 거머쥘 수 있는양한다.


어른이 되고 가끔 고독하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내가 조금 나빠지거나 영악해져도 내 곁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해줄 사람이 줄어들거나, 거의 없어졌다는 걸 느낄 때가 그렇다. 나를 '혼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걸 문득 깨달을 때, 우리는 어른이 되는 게 아닐지. 그 순간에 마음이 홀가분한 게 아니라 서늘할 때 어쩌면 좀 괜찮은 사람이 될 아주 작은 가능성을 품게 되는 건 아닐지. 다시 말하지만, 좋은 선택을 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다.


그건 이런 기분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개의  앞에  있는 기분. 한쪽 문에는  혼나서 홀가분하다, 이제 내키는 대로 살아야지라고 쓰여있다. 가슴 한쪽이 찜찜하지만,  순간만 견디면   같다는 슬프지만 분명한 예감도 든다. 다른 한쪽 문에는 내가 나를 지켜보면서 끊임없이  나은 쪽을 고민한다고 쓰여있다. 벌써 부담스럽다. 이쪽 문은 왠지 거대해 보이고, 손잡이는 차가워 보인다. 문을 열면 낭떠러지가 있을  같다. 어른들은 어떻게 어른으로 살아가는 걸까. 게다가 '괜찮은 어른들' 정말, 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혼내는 사람이 사라지고 보니   개의 문은 삶의 순간마다 마주하는 것이었다.   앞에 서면 누구나 조금은 고독하고 쓸쓸하다.






여기 '버드'라는 남자가 있다. 작고 왜소한 체구, 자신감 없는 표정과 머뭇거리는 행동, 얼버무리는 말투로 보건대 그는 아직 저 두 개의 문 앞을 서성거리기만 하는 중인가보다. 한 번도 어느 쪽 문을 열고 들어가보지 않은 사람. 그는 어느 한 쪽으로만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 쪽 문으로도 들어간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 그는 회피하는 사람이다.


글의 뉘앙스를 보고 눈치 빠른 독자는 벌써 내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직접 만난다면 나는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누구든 너무 빨리 판단하지 말자고 생각한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글의 첫머리로 돌아가서 내가 나에게 묻는다. 나 역시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거대한 두개의 문을 마주한 적이 있지 않은가. 혹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어서 내내 미루기만 했던 적도 있지 않은가. 거기서 출발하자. 그때 그 마음에서 시작하자. 버드는 지금 매우 곤란한 상황이다. 피하기만 하면서 살아온 벌인지, 그의 눈 앞에는 너무 커서 도저히 못봤다고도 할 수 없이 거대한 두개의 문이 가는 곳마다 쫓아온다. 그건 이미 '문'이라기보다는 '눈'에 가깝다. 그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장인어른이 소개해준 학원 강사직으로 돈을 벌며 그럭저럭 식자층의 품위를 유지하던 버드는 어느 날 아내의 출산 임박 소식을 듣는데, 이때부터 그의 행동이 어딘가 수상쩍다. 강의가 있는 것도, 중요한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좀처럼 병원으로 가지 않는다. 어쩐지 쩔쩔매며 말 그대로 거리를 배회하고 아무하고나 어줍잖은 시비에 휘말린다. 오락실에서 한참 어린 청소년들에게 자기 힘을 과시하려다가 망신만 당하고 그들과 싸움까지 하게 되는 버드. 그 싸움에서 겨우 빠져나온(스스로는 승리라고 믿는) 버드는 묘한 쾌감을 느끼며 자기 확신을 갈구하는데, 이쯤되면 아, 그는 지금 '방황'하는 중임을 알 수 있다. 아버지가 되는 문을 거부한채로.


여기까지가 오에 겐자부로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알려진 <개인적인 체험>의 도입부다. 아니. 실은 가장 중요한 내용을 빼먹었다. 버드는 겨우 찾아간 병원에서 자신의 첫 번째 아이가 치명적인 뇌 손상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그는 아직 '아버지'가 되기로 결정하는 문을 채 열지도 못했는데 '치명적인 장애'를 가진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로 결정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누군가는 물을 수도 있겠다. 아이는 이미 태어났고, 생물학적 법적 도의적으로 분명히 아버지인 버드에게 무슨 '고민'의 여지가 있느냐고. 나는 책임과 의무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당연히' 아버지 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당연히' 어머니가 되지도 않고) 사실 아버지 혹은 어머니 되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인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것이 선택이라고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만약 모두가 '당연히'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부모 같지 않은' 부모가 있을 수 있나.) 이 아이는 태어는 났으나 뇌 손상이 치명적이라서 수술을 해야만 진짜 삶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다. 버드가 수술을 거부하면 아이는 반만 태어난채로 며칠 안에 사망할 것이다. 버드는 어떤 문을 열까?






소설과는 별개로 실제의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첫째 아들을 살리고 자신이 그의 아버지가 되기로 '결심'한다. 김원영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사람들이 그저 구경하듯 이야기하는 장애인과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가족들의 삶에 대해 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장애인의 가족들(이 소설처럼 부모들을 포함해서)은 '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 장애를 수용하기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 장애를 수용하고자 결심하고, 자기 자신을 기꺼이 변화시키기로 마음 먹고, 실제로 그것을 실천한다. 그건 당위적인 일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삶을 걸고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그 선택이 당연하다는 태도, 어떤 세부적인 번민 없이 그저 숭고하고 아름답기만 한 희생일 거라는 게으른 상상은 거두어 달라는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 역시 '수용(acceptance)'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단어에는 '받아들이는 데 대한 동의' '기쁘게 받아들임'이라는 뜻과 함께 승인, 신뢰, 관용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말하며, "고통을 넘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상대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신뢰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이 수용의 개념은 장애를 가진 장애인 자신이 스스로의 장애를 받아들임에 있어 가장 성숙한 마지막 단계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장애를 가지게 된 사람이건, 그를 돌봐야 하는 가족들이건, 그들은 오에 겐자부로의 표현대로라면 "어쩔 수 없어, 해버리자!"하고 "스스로 결단을 내린 사람들"일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아들은 신체적인 나이보다 한참 어린 지능을 지닌 채로, 타인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이 어렵고, 가끔은 간질 발작까지 일으키는 상황이다. 그의 가족들이 장애를 가진 구성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는 대화와 행동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 오에 겐자부로 부부와 다른 두 아이들은 장애를 가진 아들, 형과 오빠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수용하고 함께 살아간다. 그렇다면, 장애를 가진 당사자인 그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큰 아들은 어느 날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나는 이제 끝이다. 이십 년이나 살다니, 이건 아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그 편지를 회상하며 덧붙인다.


만일 그가 진심으로 이렇게 단념하고 어느 날 아침부터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중략) 그보다 더 이런 생각도 든다. 장애인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고통이나 늘 넘어서야 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 참을성 강한 사람들이고, 그들 또한 장애를 지니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어, 해버리자!"라고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아닐까. . . . . (오에 겐자부로, <회복하는 가족> 중)


장애의 사회적 의미와 사람들의 인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나의 지식이 일천하기도 하거니와 이 지면이 적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자전적인 이야기가 들어있다 해도 이 글은 소설로, 다시 말해 어디까지나 허구이다. 문학의 역할은 허구의 이야기들을 통해 질문을 던지려는 것이지 답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만약 어떤 방향성이 읽힌다해도, 그 방향 끝에 하나의 정해진 종착지만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갈래의 또 다른 가능성이 열리기를 꿈꿔야 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에 겐자부로 자신이 이 책의 제목을 '개인적인 체험'이라고 한 데에는 조금 말을 보태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사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장애를 사회적으로 수용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버드(로 대표되는 장애인을 가족으로둔 사람들)가 느끼는 지극히 '개인적인' 혼란과 고통, 고뇌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엄격한 시선으로 평가하려고 든다. 그 이중적인 시선이 바라는 것이 결국은 '장애'를 개인이 경험하고 버텨내야 할 비극이나 불운 정도로 강요하려는 것은 아닐지 고민해봐야 한다. 티브이 화면 속 장애인들의 감동 스토리에 눈물은 흘릴 수 있지만, '나의 출근을 방해하며' 지하철 역에서 시위하는 장애인들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 그럴 때 장애인들은 그야말로 '있지만 있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쩌면 나쁜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규제만큼이나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지렛대도 필요한 건 아닐까. 혼자서 고뇌하고 선택하도록 몰아세우는 세상이 아니라, 이 소설 속 산부인과 원장처럼 냉소하고 비웃는 타자들로 가득한 세상이 아니라, 당신의 그 불행이 언제든 내 것일 수 있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세상, 그런 상상이 가능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회적 시스템이 간절하다. 그럴 때에만 비로소 이 소설 속에 묘사된 버드의 고민은 진정한 의미의 '개인적인 체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버드는 오래 방황한다. 실제로는 단 며칠이지만 죽을지도 모르는 여린 생명을 생각하면 그의 방황과 고뇌가 '나쁜 것'으로 느껴질만큼 긴 시간이기도 하다. 그 와중에 내연녀의 집에서 우연히 만난 대학 동창의 다음 대사는 그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차라리 그렇게 하는 편이(아이를 데려다 직접 죽이는 일이), 자기 손을 더럽히는 것이 확실해지는 만큼 자기 기만이 없어서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극악한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고 어째서 극악한 인간이 되었는가 하면 그것은 비정상인 아이로부터 자기 부부의 달콤한 생활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니 에고이즘의 논리는 있는 거잖아. 피비린내 나는 짓은 병원의 타인들에게 완전히 맡겨놓고 본인은 멀리서 갑작스런 불행에 빠진 선인이나 되는 양 점잖은 피해자인 체하고 있으려니까 정신 위생에 나쁜 거지. 그것이 자기 기만이라는 것쯤 버드 자신이 알고 있지?"


나는 살면서 버드인 적 없었나. 앞으로 살면서 절대 버드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확신할 수 있나. 우리 앞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두 개의 문 앞에서 내가 언제까지나 더 크고 무거워보이는 문을 밀고 들어갈 거라고 자신할 수 있나. 말초적인 나의 기쁨과 즐거움, 편리와 효율 대신에 그 정반대의 길을 걸을 자신이, 내게는 있나. 아니, 차라리 온갖 말초적인 것들 때문에 그 반대편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 '나'임을 받아들일 수 있나. 문제는 두 개의 문이 아니라 나의 선택을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비겁함임을 인정할 수 있나. 당신은 어떤가?


버드는 차라리 아직은 어떤 문도 열고 들어가지 않아서 기회가 있는 거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이 상황을 통째로 조작할만큼 영악하지도 못하고 자신을 완전히 속일 만큼 뻔뻔하지도 못하다. 그는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우발적인 행동들을 하며 괴로워한다. 그는 한시도 자신과 아이를 떼어놓고 생각하지 못한다. 아이가 세상에 온 순간부터 버드는 아이를 포함한 자신이 되었다. 어떤 기준에서 그는 너무 미흡한 아버지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는 '고민'하고 있다. 이미 상처 입은 채로 태어난 자신의 아이와 함께 할 삶을 정면으로 마주보면서 말이다. 버드는 회피하는 사람이었으나 이 일에 있어서만은 좀 다르다. '나는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은 딱 그 정도의 사람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건 분명 '나는 평범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일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소리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의 소심한 버드는 이 아이를 '다시 태어나게'할 것인지를 두고 생애 처음으로 완전히 자신을 건 선택을 향해 걸어간다. 그 며칠 동안의 방황을 따라가보는 일이 나에게는 불편하지도 밉지도 않았다. 오히려 짠하고 애처로웠다. 굽은 등이 땀에 전 채로, 못난 생각마저도 포기하지 않은 채로 뛰어다니는 버드. 인간이라는 게, 이토록 멋이 없는 존재다.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금새 최악이 되고 마는. 그러니 이 소설에서 버드가 아들을 살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이 곧 그 자신이 성장하는 것임을 상징하도록 한 서술들은 나에게는 꽤 설득력이 있었다. 우리는 때로 주어진 상황을 그저 '받아들이면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가 되곤 하니까. 오에 겐자부로의 표현대로라면 그렇게 흩어져 있던 모든 자기 자신(들)과 '저스트 미트(just meet)'하는 순간, 변화는 시작되니까. 그래서 나는 최근 읽은 소설의 주인공 중 가장 찌질한 남자였던 버드를, 응원한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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