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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an 20. 2022

당신이 하지 못한 말들의 사전을 만든다면

핍 윌리엄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마리아예요." 이 말이야말로 삶에서 생각해야 할 전부다. 자신의 목소리, 자신이 뱉은 말 그리고 강렬한 침묵 속에서 불쑥 나타나는 인간 외에 다른 수수께끼는 없다. -크리스티앙 보뱅, <환희의 인간> 중




여기,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차고 넘치게 많은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그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도 불렀고, '속이 깊은 사람'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의아했다. 나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일까, 속이 깊은 사람일까. 아니면, 속이 너무 깊어서 속을 좀처럼 알 수 없는 사람일까. 그는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하나? 나는 그저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겠는 순간'이 남들보다 좀 더 많을 뿐이라고. 그건 어쩌면 그저 내 소심한 마음 때문일 거라고. 그러니 나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지만 그 말마저도 그는 '차마' 하지 못한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그의 자유지. 이것이 그가 내린 (현재까지의) 결론이다.


그는 그렇게 '차마 하지 못한 말'들과 함께 오래 살아간다. 가끔은 내 안에 남아 있는 이 많은 말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주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그는 곧 생각을 바꾼다. 적당한 때가 되면, 맞춤한 자리가 생기면 그게 언제든 이 말들은 자기 자리를 찾아 갈 거라고. 나는 이 말들을 굳이 붙잡아 두고 있지 않다고. 그는 흡족하게 웃는다. 여전히 누군가는 그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또 누군가는 '속이 깊은 사람'이라고 부르지만 그는 이제 그 말들 앞에서도 웃는다.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은 줄어들기는 커녕 계속 늘어나고, 이제 그는 자기 마음 안에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을 줄 세워 정리하면서 논다. 어떤 말들은 자주 삼켜서 글자가 진하고, 어떤 말들은 처음 삼켜서 아직 흐릿하다. 그는 그게 재밌다고 생각하며 그 말들을 때론 가나다 순으로, 때론 획 순으로, 때론 삼켜진 횟수 순으로 정리한다.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은 전부 나름의 상황과 사정을 가지고 있다. 그 말들 옆에는 누군가의 곤란해하는 얼굴, 길게 씌어진 사연, 그 날의 분위기가 제법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가끔 어떤 말들 옆에는 아무 것도 적히거나 그려지지 않은 백지가 달려 있기도 한데,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건 '설명할 수 없는' 이유에 해당한다. 그는 그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할 분명한 이유를 알고 있었는데, 돌아서는 순간 그 분명하던 것이 연기처럼 사라져서 도저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그럴 때 자기가 느꼈던 감정이라도 적어두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서 이렇게 백지로 두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백지와 옆에 달린 말들을 읽다보면 그 날이 떠오르고는 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은 이유가 분명한 다른 어떤 말들보다도 분명하게 '하지 못한 말'이어야 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꽤 오래 알고 지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많은 말을 삼키는지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가 말을 삼킬 때의 숨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삼키기에 아주 곤란한 말들도 있어서, 그럴 때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걸 본 적도 있다. 그마저도 아주 찰나였다. 대체로 그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사람이므로, 가끔 그를 떠올리면 귀만 거대한 얼굴이 생각나서 혼자 웃는다. 나는 그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한 적도 있다. "아까 말야, 왜 그 말을 안 했어? 해도 괜찮은 말이었잖아?" 그는 한참을 생각했다. 끝내 대답은 없었고, 그저 웃었다. 내가 또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물어봤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미소는 어떤 말보다도 많은 말을 했고, 나는 그가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 온 몸으로 이해했다.








에즈미가 온갖 '잃어버린' 단어들을 모아 사전을 만들겠다고 결심하는 모습에서 나는, 그를 떠올렸다. 에즈미가 찾아낸 '엄연히 존재하나, 존재하지 못하는' 그 많은 말들을 헤아리면서 그의 마음 속에 그득하게 남아 있을 '차마 하지 못한 말'을 헤아렸다.


"저는 청소를 하고, 요리를 돕고, 불을 피워요. 제가 하는 모든 것은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거나, 더러워지거나, 불에 타서 없어져요. 하루가 끝날 때면 제가 여기 있었다는 증거가 하나도 안 남아요." 리지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치마 끝단에 놓인 자수를 어루만졌다. 자수는 내가 관목 가시에 걸려 치마를 찢어먹었을 때 리지가 꿰매준 부분을 가려주었다.

"제가 놓은 자수는 언제나 여기 있을 거예요." 리지가 말했다. "이걸 보면 왠지. . . . . 글쎄, 단어를 모르겠네요. 제가 언제나 여기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영속적인(Permanent)." 내가 말했다. "그럼 나머지 시간들에는 기분이 어때?"

"불어오는 바람 바로 앞에 놓인 민들레꽃이 된 것 같죠."


사전에도 실리지 못한 존재였던, '여자 노예(Bondmaid)'인 리지는 에즈미에게 때론 엄마이며 자매이고 친구이며 선생님이다. 삶을 몸으로 부딪쳐 살아내는 사람들이 가진 지혜에는 땀과 눈물의 냄새가 베어 있어서 그들에게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들은 누구든 설득해낼 수 있을 것이다. 리지는 '영속적인'이라는 단어를 몰랐지만, 알고 있었다. 자신이 공들인 모든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삶의 순간들 속에서 하나라도 자신이 거기에 있었음을 증명해줄,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를 꿈꿨기 때문이다.


에즈미가 찾아내는 단어들, 아니 차라리 그 단어들의 주인인 어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언어는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했지만 그 언어들은 세상의 숨겨진 모습을 드러내주었다. 크고 굵고 진한 활자로 인쇄된 언어의 세계 이면에서 작고 얇고 흐린 활자로 존재하는 세상. 하지만 그 여린 글자들의 세상은 그 어떤 세상보다도 활기차고 인간적이며 아름다운 것이었다. 평생을 가정부로 살아온 밸러드 부인의 언어, 커버드 마켓에서 아주 작은 매대에 온갖 볼품 없는 골동품이나 조각품을 파는 메이블의 언어, 연극 배우이면서 여성사회정치연합 운동가인 틸다의 언어는 옥스퍼드 사전이 편찬되는 '스크립토리엄'과 '집'으로 한정되어 있던 에즈미의 좁은 세상을 넓혀주었고, 어쩌면 그 숨겨진 세상에서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려주었다.


한 사회를 한 명의 사람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이런 비유가 가능할 것이다. 에즈미가 살았던 시대에 감춰졌던 말은 여성의 언어, 차별받는 이들의 언어였고(슬프게도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건 겉으로 드러나는 거대한 담론들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 사회가 진짜로 안고 있던 문제 혹은 그 사회의 영혼은 사실 감춰진 언어들에 모두 담겨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논리로, 한 명의 사람을 떠올릴 때 그가 목소리를 내서 하는 말보다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을 상상할 때 우리는 좀 더 그의 영혼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에즈미가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모으고자 했던 그 '잃어버린 단어'란 결국 누군가의 영혼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큰 소리로 외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치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물을 흘리는 초라한 뒷모습을 쫓아가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달라"고 간청하는 일. 에즈미는 가장 약한 것들, 가장 여린 것들 곁에서 가장 크고 가장 깊은 것을 꿈꿨다. 한 사회에게든, 한 인간에게든, 가장 여리고 약한 곳이 가장 중요한 곳임은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미 말해질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것들에 더 많은 힘을 실어주는 일은 배부른 만족감은 줄 수 있으나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여전히 말해질 수 없고 주장하지 못하는 것들을 말하게 될 때,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만 우리는 변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문장으로 가득한 이 책에서 지금의 내가 유난히 소중하다고 느낀 두 가지 장면이 있다. 먼저, 에즈미가 틸다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언제나 소극적이고 작게 움직이는 자신을 원망하고 비참해하자 그의 대고모인 디트가 해준 말이었다.


"너는 겁쟁이가 아니야, 에즈미. 어떤 젊은 여성이든 자기가 신념으로 인해 잔인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단어를 떠올린다고 생각하면, 나는 너무 고통스럽구나. 틸다가 여성사회정치연합 운동을 한다면, 그건 틸다에게 완벽하게 어울려. 틸다는 배우고,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잘 알지. 만약 도움이 되고 싶다면, 너는 네가 언제나 해오던 일을 계속하면 돼. 너는 전에 어떤 단어들은 단지 기록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단어들보다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했었지. 너는 그런 생각을 함으로써, 교육받은 남성의 말들이 여성을 포함해 교육받지 못한 계층의 말들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현상에 대해 자연스럽게 문제 제기를 했던 거란다. 사랑하는 에즈미, 네가 잘하는 일을 하렴. (. . . . .) 깨닫지 못했겠지만, 너는 이미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거란다. 우리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듯 이건 오래 걸리는 싸움이 될 거야. 네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서 싸우고,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싸움을 하게 두렴."


다음 장면은 설명이 좀 필요한데,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긴 시간과 여러 사건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다. 이 소설은 옥스포드 사전이 편찬되는 과정과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걸친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한 여인의 삶을 따라가는 제법 거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진정한 미덕은 거대한 이야기가 작은 이야기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 개인, 혹은 한 단어, 한 문장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에게 이 책은 역사와 개인의 관계처럼 큰 이야기로 읽히기 보다는 그저 낱낱의 인물 하나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에즈미와 그의 남편 개러스는 1차 세계대전이라는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정해진 이별을 앞두고 에즈미와 개러스는 애써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끝내 전선으로 떠나게 된 개러스에게 에즈미는 단 두 가지 단어를 전한다.


사랑(LOVE)

열정적인 애호의 감정.


나는 쪽지를 뒤집었다.


영원한(ETERNAL)

변하지 않는, 끝없는, 죽음을 넘어서는.


마치 유행이 시대를 거쳐 다시 돌아오듯, 우리는 언제나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관점을 뒤바꾸며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떤 단어는,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아주 작은 것에서 아주 큰 것 전부를 포함하기 때문에, 혹은 아주 작은 것만으로도 아주 큰 것을 꿈꾸게 하기 때문에 도저히 하나의 기준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나에게는 사랑이 그런 단어이고, 그래서 가스라이팅과 데이트 폭력이 난무하는 이 위험한 세상에서도 (가끔은 외롭게) '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사랑이란 결국 서로의 별 것 아닌 영혼을, 자주 어떤 말을 삼키고, 자주 무언가에 "아니"라고 반대하는, 그래서 끊임없이 괴로워하는 그 영혼을 보듬으려 애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사랑이란 결국, 상대에게 '나'를 잘 설명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데서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에게 나를 내보이는 일, 차마 삼켜버리는 그 말들이 당신의 귀에는 가 닿아도 된다고 허락하는 일, 그래서 당신이 나를 '해석'하고 '수용'해도 괜찮은 일.


전사자 유품으로 돌아온 개러스의 옷 안에 에즈미가 전한 저 두 가지 단어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에즈미와 개러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서로의 '영혼'을 알아보고 지키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분명 각별했다. 때문에 나에게는 어쩌면 정해진 결과처럼 느껴졌던 개러스의 죽음이 오히려 가슴 절절하게 슬펐다. 에즈미가 말하는 것 너머를 바라보았던 개러스. 개러스의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에서 그의 '실존'에 다가갔던 에즈미. 그들의 사랑은 커다란 목소리들 속에서 점차 그 의미를 상실해가는, 가끔은 '사랑 놀음'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인간 사이의 어떤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소설 속 표현처럼, "참정권 투쟁이 정신없이 사랑에 빠지게 하는 로맨스와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사랑 없는 투쟁은 또 대체 무슨 소용인가.







그렇게 소설은 끝나고, 그 끝에는 여전히,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을 가득 안고 살아가는 어떤 얼굴들이 있었다. 만약 내가 에즈미처럼 사전을 만들 수 있다면 나는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의 사전'을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기록하는 인명사전이기도 한 이 사전에는 온통 그 사람이 살아 생전에 '하지 못한 말'만을 실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 줄까봐, 내가 잘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일까봐, 상황을 악화시킬까봐, 상대가 민망해할까봐 꿀꺽 삼켰던 말들로 그를 기억하는 사전.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내 주변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됐고, 정말로 사람마다 차마 하지 못하는 말들도 제각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군가는 '자기를 내세우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누군가는 '나무라는 말'을 차마 못하며, 누군가는 '비교하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고, 그들이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은 그 자체로 그들이 잘 드러내지 않는 그들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려는 그를, 누군가를 쉽게 나무라지 않으려는 그를, 뭔가를 비교하고 품평하지 않으려는 그를 떠올리니, 내가 아는 바로 그 얼굴들로 이어졌다. 그가 하지 못한 말은 그의 영혼이 되어 다시 나를 보는 그의 얼굴에 드러났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반대였다. 그들이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은 누군가를 북돋우는 말이거나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말, 때론 희망의 말이나, 일이 잘 되게 하는 말이었고, 그들은 절대로,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를 내세우거나 누군가를 나무라거나 큰 목소리로 비교하고 품평하는 말의 전문가였다. 그들에게는 자주 진실보다는 이익이 우선이었다. 그들은 차마 하지 못한 그 말들을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필연처럼, 내가 잃어버린 말, 차마 하지 못한 말은 어떤 것들일까,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영혼을 가진 사람일까. 나를 두고 인명 사전을 만든다면 나는 가치 있는 말을 하고, 위험한 말은 삼킨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위험한 말을 모두 삼키기 어렵다면 적어도, 가치 있는 말은 삼키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혹은 가치 있는 말을 모두 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위험한 말은 잘 삼키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차, 그렇다면 글 쓰는 일부터 끊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매번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다가 웃었다.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러니 다시, 다시, 읽고 쓰기로 한다. 계속 쓰다 보면 누군가의 '잃어버린 단어'를, '차마 말해지지 못한 영혼'을 건져올릴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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