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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an 27. 2022

우리의 자유는 연결되어 있다.

기리노 나쓰오, <일몰의 저편>


스무 살 때의 일이다. 내가 속한 학회의 첫 세미나는 전통적으로 <전태일 평전>을 함께 읽는 것이었다. 공교육에 (심지어 모범적으로) 길들어 19년을 살아온 내게 책의 내용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더 충격적인 건 이 책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우리(신입생)에게 질문을 던지는 선배들의 생각이었다. 나보다 그저 몇 년 먼저 대학에 들어온 그들은 내가 느끼기에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스무 살의 내가 가졌던 질문을 부끄럽지만, 이곳에 옮겨보자면, 전태일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는 일이 그의 가족들과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일이 아닌가, 였고. 내 질문은 나보다 네 학번 위였던 한 선배가 받았다. 그 선배는 말했다. 전태일이 사랑하고, 또 전태일을 사랑하는 그들이 바로 전태일이 보호하고자 했던 이 사회의 약자가 아니냐고. 전태일을 개인적으로 알고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물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고 슬픔이겠지만, 그들마저도 전태일이 그토록 보호하고 안아주고 싶었던 이들과 한 몸이기에 전태일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자신은 여전히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고. 그 점이 부끄럽다고.


그 대답을 듣고 나는 오래도록 생각했다. (뜬금없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 말이다. 스무 살의 내게 선배의 대답은 전태일이 얼마나 훌륭하고 위대한 인물인가, 보다는 전태일은 대체 얼마나 넓고 큰 사랑을 한 사람인가, 로 기억되었다. (어쩌면 선배가 전하고자 했던 방향과는 좀 동떨어진 것이리라.)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얼굴도 모르는 이들까지 사랑하는구나. 그 사실이 떠오를 때마다 스무 살의 내 심장이 찌르르하고 아팠다. 책 속에서 아무리 몸이 고되고 힘들어도 제일 먼저 웃으며 양보하고 배려하던 그 어린 청년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안의 나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문을 열었다.


내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풀이 자리에서 또 다른 선배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나는 이 이야기 역시 오래 기억하고 있다. "과거에는 적이 분명했어. 선과 악이 분명했지. 일제에 저항하며 독립을 외치고, 민주화를 위해 독재에 저항하고. 하지만 이미 세상은 바뀌었고, 이제 선과 악은 모호해졌어. 앞으로는 더더욱 그렇게 될 거야. 우리는 우리가 무엇에 저항하고자 하는지 고민해야 할 거야."


나는 그때 개인적으로도 내가 디딘 땅이 예고 없이 갈라지는 걸 자주 목격해야 했기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게 거의 유일한 위로요 안식이었는데. 그 선배의 말을 곱씹을수록 나는 어디에 발 딛고 있는 건지, 거기가 '안전'하기는 한 건지, 게다가 '저항'해야 한다는 데 도대체 뭐에 저항하라는 건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더구나 그 말이 가진 어떤 불안함 때문에 나는 그 말을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불안함을 제대로 보지 않고는 내가 어디에도 발 딛고 서지 못할 것만 같은 불길함이 들었다. 불안함과 불길함이 싸우면, (내 경우에는) 불길함이 이긴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법 아닌가.


저 대화를 나누던 허름한 선술집에서의 밤이 어느새 이십 년 전이니, 다시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바뀌었다. 하지만 <전태일 평전>은 여전히 두루 읽히고 있고, 선배가 말한, "무엇에 저항하고자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더 첨예해졌다. 아, 하나 더 보태진 채로 제법 오래 내 안에 자리한 질문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는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그렇게 나의 이십 대는 나의 사십 대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모든 것이 변한 채로, 혹은 어떤 것도 바뀌지 않은 채로.








기리노 나쓰오의 <일몰의 저편>을 그야말로 단숨에 읽었다. 또한 이 책이 담고 있는 주제, '문학에 있어 정치적 올바름이란' 주제로 한 문학 잡지에서 커버 스토리로 다양한 논객들의 수려하고 촘촘한 논리들을 실어주어서 그것까지 찾아 읽었다. 그렇게 소설 한 권과 아홉 명의 논객이 이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한 글들까지 모두 읽고 나니, 나는 그야말로 '나가떨어져서' 내가 이 소설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되었다. 내가 독후감을 쓰는 데 있어 가장 경계하는 일이 같은 책을 읽은 다른 사람의 독후감이나 리뷰를 찾아보지 않는 것인데. 이번에는 글렀구나, 싶었다. 나는 이 지면을 통해 엄청난 학문적 성과나 날카로운 문학 비평을 시도하지 않는다. (물론 문학 창작이나 문학 비평을 따로 배워본 적 없는 내게는 그만한 실력도 없다.) 대신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나의 감상을 적고자 한다. 그런데 이게 다 뭔가. 이 똑똑한 글들을 읽고 나니 나 스스로가 초라해져서 이렇게 하소연이나 늘어놓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 글은 <일몰의 저편>의 독후감이면서 동시에 그저 나의 가벼운 에세이로 써야겠다고 정했다. 돈 받지 않고 쓰는 글의 거의 유일한 장점이 아닌가. (헛, 스스로 뼈 때리기 있기 없기.)


(만약 기리노 나쓰오의 <일몰의 저편>에 대한 보다 논증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적이고 전문적인 리뷰를 원한다면 릿터 33호를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기리노 나쓰오의 <일몰의 저편>은 마쓰 유메이라는 소설가가 문윤(문화문예윤리위원회)의 소환에 응하면서 반강제적이며 반자발적으로(?) '요양원'이라 불리는 (실제로는) 수용 시설에 감금되어 '갱생'을 강요받는 이야기이다. 여러 논객이 지적했듯이 조지 오웰의 <1984>를 재연한 것 아니냐고도 볼 수 있을 감금 시설과 개인의 자유 억압이라는 설정은 그리 신선한 소재는 아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22년의 대한민국의 현실도 한몫했을 터. 나는 그 많은 논쟁을 유유히 뒤로 하고, 그저 '자유'에 대해, 우리는 정말 자유로워지고 싶은지, 그렇다면 자유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당신은 언제 자유로운가. 자유라는 가치는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그것이 유지되고 실질적으로 행해지기 위해서는 다수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하는, 또한 자유를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순간 그 안에서 자유를 위해 자유가 희생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다시 말해 신화 속의 유니콘처럼 상상 속의 산물일 뿐일까. 혹은 (평론가들의 지적처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를 벗어나 국가 권력에 나의 힘(자유)을 빼앗기듯 이양한 이후로 인간은 원시적인 감각 그 자체인 '자유'를 필연적으로 상실해버린 걸까. 하지만 자유롭지 않을 때마다 우리는 '자유'라는 가치가 분명히 존재해왔고,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느끼지 않는가. 자유란 대체 뭘까.


나는 그럴 때마다 글의 맨 앞에 잠깐 언급했던 스무 살 때의 대화들을 떠올린다. 내가 저 대화들을 환기하며 느끼는 감각이 '자유'에 퍽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의심하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확신하는 모든 것이 어떤 구속도 당하지 않는다고 느꼈던, 시간. 나는 그런 것들을 '자유'라고 느낀다. 물론 저 때의 대화 내용은 이미 지나버린 것들이어서 지금에 적용하는 데는 다소간 무리가 따르겠지만, 그런데도 그 안에는 분명 자유를 구성하는 필연적인 몇 가지 요소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가령 전태일 평전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은 내가 자유를 누리는 대가에 대한 고민과 이어져야 한다고 본다. 혹은 자유에 대한 책임의 문제일 수도 있다. 다음으로 '무엇에 저항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자유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뿐만 아니라 나날이 첨예해지는 선과 악의 모호함 속에서도 반드시 '아니'라고 해야 하는 순간은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니까 자유로워지는 것만큼이나 내가 발 딛고 선 세상이 나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모두가 부자유스러운 세상에서 나 홀로 자유롭다면, 그건 내가 독재자거나, 정신이상자일 확률이 높다는 뜻일 테니까. 이 판에 호구가 없으면, 내가 호구인 거 아닌가.


그리고 이 소설을 읽으며 어렴풋하던 내 안의 어떤 감각 하나를 건드린 지점이 있었고, 나는 그것을 이런 문장으로 표현하고 싶다. "우리의 자유는 연결되어 있다."


개인주의의 시대다. 나 역시 큰 목소리로 말하지는 않아도 언제나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적용하여 삶의 이런저런 국면들을 해석하고 헤쳐나가는 중이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독재를 경험했기 때문에 개인에 대해 말하는 것이 몹시 어려운 일이면서도, 동시에 '개인'이라는 말 자체를 많은 이들이 '갈망' 내지는 '동경'하는 사회를 살고 있다. 말하자면 '개인'이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가 유난히 복잡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개인주의라는 말이 대표하는 가치인 '자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광화문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배낭과 모자에 붙이고 큰 소리로 '자유' 대한민국을 외치는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주머니에 최신형 애플 핸드폰을 넣은 채로 전경 제복을 입고 군 복무를 하는 20대 초반의 청년이 마주 서는 곳이 대한민국이 아닌가. 그럴 때 나는 어지럼증을 느낀다. 저 할아버지에게 자유는 무엇이고, 저 젊은 청년에게 자유는 무엇이며, 나에게 자유란 과연 무엇일까. 어지러울 때마다 나는 가장 기본으로, 쉽게 뒤흔들 수 없는 기반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임경선은 그녀의 책 <태도에 관하여>에서 '나와 너의 개인성을 인정하는 것'이 '공정함'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그다음 에세이가 <자유로울 것>이라는 걸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개인성'이 인정된다면 사회는 좀 더 공정해질 수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반대로도 설명할 수 있다. 공정한 사회일수록 '개인성'이 인정되고 그럴 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는 아주 작은 단추 하나를, 평평한 보도블록 하나를 놓는 셈이 된다. 그녀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자.


"한국 사회에서 공정함을 관철시키는 사람들의 존재는 소중하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장단점이나 복잡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타인에 대해서도 공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가진다. (중략) 하나의 사안을 신중하게 곱씹어볼 수 있는 치밀함과 끈기가 있고 이토록 정교하게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지를 아는 수치심을 가진 어른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임경선, <태도에 관하여> 중)


그러니 내가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나는 아주 부지런해져야 한다. 나의 자유는 내가 제멋대로 구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타자의 개인성을 인정할 때 보장되기 때문이다. 내가 게으르고 쉽게, 손가락질하고 욕하면서 침해한 상대의 개인성은 언제든 부메랑이 되어 나의 개인성을 겁박할 근거가 된다. 그럴 때 나는 '우리의 자유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마치 사랑이 사랑을, 존중이 존중을 낳듯이 우리는 자유를 통해 자유를 낳는다. '나만' 자유로울 수는 없고, 언제나 '우리가' 자유로운 것. 나아가 그 '우리'의 자유에 기여하는 것마저도 끝내는 '나'를 위하는 것이므로 함께 자유로워지는 것만이 유일한 보상이며 대가라는 것. 그러니까 전태일이 얼굴조차 모르는 수많은 미싱사를 보호하고 지켜주고자 했던 것은 결국 그 선배의 말처럼, 전태일 자신을, 그의 가족들을,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일과 절대 다르지 않았다는 것. 우리의 자유는 연결되어 있음으로.


이런 순간에 어떤 말들은 갇혀 있던 공간을 부수고 비로소 제게 어울리는 크기와 깊이를 가지게 된다. 누군가에게 자유라는 말이나, 개인이라는 말이, 필요나 의도에 따라 조각되고 감금되었다면 우리는 그마저도 '자유'롭게 해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개인이 오로지 섬으로만 존재하며 나의 어떤 것도 당신의 어떤 것과 연결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당신과 나의 개별성을, 개인성을 깨닫고자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러니 우리의 억압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가 연결되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억압은 끝내 우리를 섬으로, 외로운 존재로 만들지만, 자유라면, 나아가 자유에서 비롯된 사랑이라면 우리를 끝내 연결해낼 것임을. 그리하여 더 큰 자유로, 함께이면서 동시에 모두가 각자인 채로 나아갈 것을 확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가능하다면 예술이, 또한 어쩌면 문학이 그런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가치를 전복하고 너와 나의 위치를 뒤집고, 묻고 또 물으면서, 포기하려는 사람들을 자극하고 일어서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그것을 쓰는 사람이든 읽는 사람이든 개인으로써 우리는 모두 고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자유는 쉽게 얻어지지 않지만, 쉽게 침해받고 훼손되는 가치이므로. 우리가 자유에 대해 말하고 싸우고 쉽게 양보하지 않는 어떤 선을 지켜가는 일은 언제나 현재형이고 치열한 것이 되어야 한다. 문학평론가 한영인은 신형철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신형철이 말했듯 "문학이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자주 때를 놓치는 뒤처진 열등생처럼 보일 때조차 완전히 잊지 않으며 끝내 기억해 낸다."







가끔은 이십 대의 내가 그립다. 그 건강함이, 체력이, 지치지 않는 에너지가, 잠을 못 자도 뽀송뽀송하던 피부와 뭘 입어도 괜찮았던 시절이(그리고 자신이 그렇다는 걸 절대로 모르던 그 순전함이), 어떤 만남도 어떤 실수도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소중했던' 인생의 한 시절이 그립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나는 너무나 미숙했고, 아무것도 잘하는 게 없었고, 나는 나조차 잘 몰랐고(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나는, 자유는 주어졌다고들 하는데 전혀 자유롭지가 않았다. 나는 그때 나와 타인이 연결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꿈을 꾼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자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자유로워지는 건지,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다. (적어도) 내 기억에 내 주변에 그걸 아는 또래는 없었다. 모두가 조금은 겁먹은 채로, 자주 넘어지는 중이었다. 우리는 그 많은 것들을 전부 일일이 하나하나 어떤 것도 공짜로 주어지는 것 없이 내가 겪고 듣고 배우고 고민하고 실수하고 실패하면서 넓혀나가야 하는 일이라는 걸 몰랐다.


지금의 나는 겉으로 보기에 이십 대의 나보다 훨씬 덜 자유로워 보이는 여러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나에게는 내가 넓혀 온 내 자유가, 정말이지 딱 내가 노력한 그만큼의 자유가 주어져 있다. 에누리도 없는 그 작은 땅, 그 자유를 지켜보는 일, 가꿔가는 일, 그 자유의 외연을 공을 들여 조심스럽게 아주 조금 넓혀가는 일이, 설명할 수 없이 소중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 집'은 없어도 '내 자유'는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대책 없는 낙관론자라고 비웃어도 좋다. 우리의 자유는 연결되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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