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그들이 왜 불행한지 이유는 몰랐지만, 가슴이 아팠어.
그렇게나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불행하다면,
나처럼 불완전하고 외로운 존재가 비참하다는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닌 것 같았어."
고전을 리뷰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어디까지나 너, '프랑켄슈타인' 때문이었다. 자신의 이름도 없이 자신을 만든 사람의 이름을 따서 이백 년 넘게 불리고 있는 비운의 존재, 너, 너 말이야. (갑자기 반말?) 너에 대한 루머와 소문과 사실이 너무 많고 또 혼재돼 있어서 사실 나는 너를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다. 충분하다고 느껴왔다. 그런데 자꾸만 내 뒤에서 질척거리는 너. 그건 정확히 말하자면 너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못 참겠는 나였다. 나는 언제나 깨지고 부서진 존재들에게 매력을 느끼니까. 깨지고 부서진 거로 치자면 너만 한 존재가 또 어디 있겠니. (또 반말 미안.)
사람아, 너를 떠올리면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아프다. 그건 네가 저지른 끔찍한 짓들을 알게 된 후에도 마찬가지다. 참, 너를 그저 '사람'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너는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었지만, 그와 혈연관계도 아니고, 더구나 너는 때로 프랑켄슈타인보다도 연장자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너는 네가 원했던 것처럼 모두의 사람이 되면 어떨까. 누군가로부터 탄생해 끝내 그를 벗어나야만 살 수 있는 사람. 누구보다 인간적이 되고 싶었지만 거듭되는 시련에 엇나가버린 사람. 모든 걸 꿈꿨지만, 모든 걸 빼앗긴, 아니 아무것도 가져보지 못했던 사람. 그토록 사람이 되고자 했던 너에게, 이 작은 지면에서라도 사람이라고 불러주고 싶어. 허락도 없이 그렇게 부르는 나를 용서하렴.
상처받고 아픈 너에게 부담을 주는 건 아닐지 걱정되지만, 너가 사람들에게 가졌던 순수한 마음을 생각하며 나는 이야기를 꺼낸다. 결국 너의 순전함에 빚지는 일임을 분명히 기억할게. 너는 이 백 년 전에 태어났지만, 지금 2022년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너는 꼭 지금 여기의 사람들 같아, 참 이상하지 않니? 심지어 너는 너도 말했듯이 불완전하고 외롭게 태어났지만, 지금 이곳의 사람들은 그저 평범하게 태어나더라도 아주 많은 것을 겁내면서 산다. 누군가가 들이대는 평가의 잣대들을, 자신이 갖고 태어나지 못한 것들을, 혹은 자신이 갖고 태어난 것들을 사람들은 겁내고 있어, 마치 너처럼. 그리고 사람아, 지금의 사람들도 누군가를 끊임 없이 판단하고 배제한단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너의 얼굴이 상상된다. 맞아, 이상한 일이지. 우리는 좋아지고 있는 걸까?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기는 한 걸까?
네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어보자고 다짐했던 날을 기억하고 있어. 이 이야기를 꺼내려니, 나는 너에게 또 미안하다. 너에게는 가장 크고 결정적인 상처가 됐을 그날을, 미안하지만 조금만 함께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을까. 이 또한 너의 관대함에 빚지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할게. 너는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지. 비록 몰래 숨어서 들어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너는 그들의 사연을 오랫동안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을 아끼게 되었지. 나아가 너는 그 '선량한' 사람들이 분명히 너를 '수용'해줄 거라고 믿었지. 왜냐하면 네가 아는 한 그들은 참 아름답고 순전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들 자신이 억울한 일을 겪어본 적이 있고, 누군가로부터 버려지고 배제돼 본 경험도 있었으니까. 그들 앞에 나타나겠다고 네가 마음먹는 데는, 그들의 상처 역시 큰 역할을 했을 거라고 나는 감히 믿는다. 우리는 때로 상처나 결핍으로 서로를 알아보곤 하니까. '아, 너는 나구나.' 하면서.
하지만 어쩌지. 네가 그 믿음을 가질 때, 나는 두려웠어. 내가 상상하는 너의 장래는 밝지 않았기 때문이지. 내 상상 속에서 그들은 너를 반겨주지 않았다. 너를 두려워하고 나아가 너를 싫어하고, 너를 거부할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아, 누군가의 상상력이 그가 사는 세상이 가진 색에 빚질 수밖에 없다면, 나의 상상들은 분명 어두운 색일 거야. 아주 가끔만 빛이 비출 거야. 이곳 사람들은 그런 걸 보고 '어른이 됐다'고 말하곤 해. 어이없는 일이지.
끝내 그들 앞에 나서는 너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동시에, '잘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우리는 결국 스스로 뭔가에 닿지 않고는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하지. 죽기 전에 후회하는 일들은 '실패한 일'이 아니라 '하지 못한 일'이라는 말도 있잖아. 이리저리 부딪혀야 하는 게 우리의 삶이라면 한 번이라도 내가 간절히 바라는 곳에 가서 부딪히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마음 아픈 일이지만 그게 우리 손에 쥐어진 거의 유일한 선택지일 테니까. 너는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절박하고 간절하게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나의 어두운 상상처럼 처참히 실패했지. 거부당했고, 외면받았고, 끔찍한 비명들을 들으며 황급히 달아나야 했지. 그 장면이 내 상상과 너무나 맞아떨어져서 나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네가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내가 상상할 수 있었다면, 너의 미래는 달라졌을까?
"프랑켄슈타인을 친구라고 부르는 당신은 내가 저지른 범죄와 그의 불행에 대해 아는 것 같군. 하지만 그가 자세히 이야기해주었어도, 무력한 열정에 시들어 가며 내가 견뎌야 했던 불행한 오랜 세월을 요약해 주진 못했을 거야. 그의 희망을 파괴하는 동안, 나도 내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했으니 말이야. 영원히 열렬하게 타오르는 욕망이었어. 아직도 사랑과 우정을 바라지만, 아직도 퇴짜 맞고 있지. 이건 부당하지 않은가? 인간이 다 내게 죄를 짓는데, 왜 나만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하나?"
사람아, 네 말이 맞다. 왜 '너'만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할까. 너를 맘대로 만들 수 있다고, 버릴 수도 있다고, 너에게 낙인을 찍고 혐오할 수도 있다고 제멋대로 판단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나도 그게 불만이다. 내가 너를 생각하며 어떤 책 한 권을 읽었고, 그 책의 저자는 '낙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표현이 너를, 혹은 여기의 여러 사람을 설명하는데도 제법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볼게. "현대 사회에서 낙인으로 취급되는 속성들은 다음과 같다. (1) 신체의 괴물스러움, (2) 정신적인 면에서의 결함(의지박약, 비정상적 열정, 잘못된 신념, 부정직 등). (3) 특정한 인종, 민족, 종교에 속해 있다는 사실." 아, 그래. 우리는 여전히 저런 것들로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한 후 낙인을 찍곤 한단다. 게다가 이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은 훨씬 정교해지고 있어. 같은 책의 이어지는 내용을 옮겨볼게. "이러한 속성들은 지나치게 눈길을 끌어서 그것을 지닌 사람의 인격의 다른 측면들을 눈에 띄지 않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낙인을 지닌 사람이 언제나 배척당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는 이유로, 혹은 신체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는 이유로 격려와 감사의 편지를 받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관심의 대상은 그의 인격 전체가 아니라 인격에서 돌출된 부분, 즉 낙인이다."*
저 말을 자세히 설명해볼까. 너에게는 잔인한 이야기가 될 테지만, 네가 우리를 이해하는 데는 어쩌면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몰라. 미안해. 이 이야기 역시, 너의 친절함에 빚지고 있음을 꼭 기억할게. 만약 네가 오두막을 건너가 처음 손을 내민 그들과 친구가 됐어도 말이야, 그들이 너의 인격 전체를 수용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라는 뜻이지. 너는 그들이 원하는 것만을 보여줘야 하는 수동적이고 부분적인 존재로 취급되었을지도 몰라. 그들을 따라다니며 때로는 그들의 '인성'을 검증해주는 도구가 되거나 '구경거리'가 되어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란다. 네가 앞서 설명한 저 조건 중 어떤 것 하나라도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렇지 않은 '정상인' 사람들과 대등하고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네가 그들에게 '항의'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그 질문에 대해서도 저자는 이미 대답을 준비하고 있어. "낙인자의 편에서, 이러한 접근을 허용하는 것은 일종의 의무이다. 낙인자는 정상인들이 변덕스럽게 베푸는, 원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친절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친절이 '남용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낙인을 지닌 개인은 명랑하게 그리고 자의식 없이, 스스로를 정상인들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로 받아들이도록 요구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상인들이 그에게 당신은 우리와 동등한 존재라고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상황을 알아서 피해야 한다."*
사람아, 미안해. 네가 태어나고 버려지고 괴물 취급을 받으며 사라져간 지도 벌써 이 백 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모양이다. 아직도 사람과 사람을 가르고 서열을 정하고 누군가가 누군가의 위에 서서 군림하는 일을 끝내지 못했지.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정교하고 교활해지기도 했지. 오두막의 가족들은 너에게 노골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도망쳤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러지 않아. 대신, 사람들은, 그러니까 '정상이 아니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은 '알아서' 처신해야 한다. 오두막을 건너가서 문을 열고 인사를 건넬 수 있는 건 낙인자가 가진 권리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를, 조금은 가여워해 줄 수 있겠니. 아니, 미안해.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또 너의 친절과 순전함과 관대함에 기대려고 했다. 우리를 가여워하지 않아도 좋아. 모든 건 네 자유다.
사람아, 지금의 우리 역시 서로를 배제하고 괴롭히는 굴레 속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또한 분명히 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조금 해봐도 될까. 미안해. 이 이야기 역시 너의 인내심에 빚지고 있음을 꼭 기억할게. 그 사람들은 이런 장면을 만들어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씌울 수도 있었던 어떤 낙인들을 지운다. 그 낙인 아래 감춰졌던 본질적인 누군가를 대면하고자 애쓴다. 아주 드물고 그래서 더 귀한 이런 일들은 분명히 있다. 흔하고 덜 귀해질 때까지 이런 장면들이 아주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할게.
이 이야기의 두 주인공 중 한 명은 선천적으로 질병(골형성부전증)을 갖고 태어났다. 그 아이의 뼈와 근육은 잘 자라지도 못하고 또 필요한 만큼 튼튼하지도 못해서 그 아이는 의자에 앉다가도 엉덩이 뼈가 부러지곤 했지. 운동장에서 뛰거나 수영을 하는 일? 상상해본 적도 없어. 그 아이는 좁은 휠체어와 그걸 타고 닿을 수 있는 만큼이 세상의 전부라 믿으며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동네 친구들이 모두 계곡으로 물놀이를 가게 되었다. 이미 '아픈 나'와 '진짜 나'를 분리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나'로 살아오는 데 익숙했던 주인공은 마치 물놀이가 '다 귀찮다'는 듯한 태도를 벌써 장착하고 있었다. 그래야 상처받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물론 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때 또 다른 주인공인 한 친구가 슬쩍, 아주 슬쩍 새로운 시도를 한다. 모두가 물놀이를 가려고 나섰는데도 자신은 가지 않겠다고 주장한 거지. 여기서부터는 두 친구의 대화를 그대로 들려줄게.
아이들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한 친구가 자기는 가지 않겠다며 우리 집 소파에 드러눕는다. 진짜로 가기 싫을 리가 없었다. 나는 "야, 나 낮잠 좀 자자. 빨리 가, 인마!"라며 그 아이를 타박했다. 그러자 녀석이 답했다.
"나 피부 관리해야 돼."
피부 관리라고? 한겨울에 로션을 바르기는커녕 반팔을 입고 뛰어다니는 녀석의 그 말이 어이없다.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가."
나는 툴툴대면서 오후 한나절 정도는 방에 혼자 남아도 좋다는 생각을 한다. 녀석은 못 이기는 척 나가더니 잠시 뒤 우리 집에 다시 와서 만화책 몇 권을 던져준다. 그러고는 계곡으로 먼저 간 다른 아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서둘러 사라진다.**
자연스럽게 어떤 무더운 여름날이, 그 햇살 아래 땀을 흘리며 서로의 존재에 다가서려 애쓰는 두 명의 아이들이 그려지지 않니? 나는 너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오래전에 읽었던 이 장면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에게 필요한 건 이토록 작은, 하지만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큰 사람 한 명이면 되는 건데. 그날 오두막 건너에서 너의 상처로 가득한 얼굴을 보고도, 짐짓 모르는 척 다른 농담을 건넬 사람이 있었다면, 너 역시 상처들을 못 본척하는 그의 농담 같은 거짓말을 받아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까.
하지만 사람아, 고백하건대 나는 너를 보고 도망쳤던 그들을 손가락질하며 욕할 자신이 없다. 내가 너를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렇게 못난 편지를 쓰고 있는 거겠지. 나의 미안함과 못난 마음을 어떻게든 설명해보려고. 내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이라도 알아달라고. 저 아름다운 두 소년의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저 이야기 속 몸이 아픈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자신의 아픔을 용기 있게 고백했을 뿐만 아니라 '실격당한' 사람들 모두를 위한 변론에 나섰어. 그는 저 아름다운 이야기에 덧붙이고 있어. "나는 추상적인 인권 규범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에서 출발하고 싶다. 우리는 각자가 왜 그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존엄한 존재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에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에 화답하는 상호작용, 즉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를 실천하고 있다."**
사람아, 나는 가끔 연습한다. 내가 너를 만나게 된다면, 아니 누구라도 조금 다른, 혹은 조금 특별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하고 부드럽게 그를 대하는 장면을. 그게 설사 거짓말이라 해도 괜찮다. 내 등 뒤로 식은땀이 조금 흘러도 좋다. 그 퍼포먼스를 그와 내가 성공리에 마칠 수 있다면, 우리가 잠깐 스쳐 지나는 동안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공연이 이뤄진다면, 나는 정말 좋겠다. 이런 상상을 할 때 내 마음은 환해진다. 그때 나는 알게 된다. '그는 곧 나'라는 걸. 내가 그에게 미소를 건네는 일은 결국 내가 나를 향해 미소짓는 일이라는 걸. 나는 매 순간 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지만, 내가 분명 어떤 '얼굴'과 '표정'을 짓고 살아간다는 걸, 아주 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 얼굴과 표정을 바라보는 사람, 이 있다는 걸 아주 늦게 배웠다. 그걸 알게 된 후로 나는 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다시 읽는다.
나는 이 편지로 이야기하고 싶었나 보다. 부족한 자신에게 거듭 말하고 싶었나 보다. 이 백 년 전 과거에서 온 너에게, 그리고 지금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또한 나에게. 계속해서 공부하고 노력하겠다고. 나의/너의/우리의 결핍이나 상처들을 낙인찍지 않고 그 모든 "취약성을 통해" 이해하고 가까워지겠다고. 또한 누가 가진 조건과 상관없이 상대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겠다고. 이때 존엄한 존재로 대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자기 인생의 자율적인 형성 주체, 말하자면 작가/저자(author)로서 존중"하겠다는 뜻임을 잊지 않겠다고. 내가 존엄하고 싶은 만큼 상대도 그러하다는 걸, '무'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너를 읽는 사람들을 통해 네가 다시 살아날 때마다, 그때의 세상이 좀 더 나은 모습이기를 상상하며 살겠노라고 말하고 싶었나 보다. 세상에 빚진 대로가 아니라 세상에 갚을 것들을 상상하겠노라고. 그리고 그 상상 속의 세상은 좀 더 밝았으면 좋겠다고.
2022년 겨울, 내 작은 책상 위에 찾아와줘서 고맙다. 이건 어떤 조건도 없는 환대의 말이야. 고맙다, 사람아.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