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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Feb 10. 2022

혼돈을 좋아하세요?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드 <프렌즈(Friends)>를 좋아한다. 전체 시즌을 여러 번 보았고, 어떤 에피소드는 더 여러 번 보았다. 시트콤이 늘 그렇듯 프렌즈에서도 캐릭터 구축에 공을 들였는데, 그 중 '모니카' 역시 심상치 않은 인물이다. 그녀는 우선 정리를 좋아한다. 그것도 병적으로. 청소는 그녀의 영혼을 달래는 오페라고, '세트'로 된 모든 물건은 그녀의 충실한 친구다. 그녀의 거실 소파와 티브이는 (티브이가 가장 잘 보이는) 거리를 늘 유지해야 하고, 그녀의 부엌은(그녀의 직업은 요리사다) 아무나 손댈 수 없는 금기의 영역이다. 그녀는 불청객이 나타나도 기뻐하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각별히' 꾸며둔 '손님방'을 드디어 선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결혼식을 준비해준다고 하자 절친은 도망칠 정도다. 모니카의 신경질과 군인보다 더한 통제를 받고 싶지 않으니까. 나 차라리 결혼을 포기할래.


여기까지라면 모니카는 그저 짜증스러운 빌런에 가깝게 느껴질 테지만, 드라마는 영리한 에피소드를 중간중간 끼워 넣는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모니카의 '혼돈의 방'이 모니카의 남편 '챈들러'에게 들키는 이야기다. 모니카가 절대 열지 못하게 하는 창고 방에 문득 궁금증을 가지게 된 챈들러는, 모니카의 전 남자 친구인 리처드에 대한 질투에 휩싸여서 혹시 그와 관계된 것들을 모니카가 여전히 몰래 간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기에 이른다. 챈들러는 어떻게든 그 방을 열어서 진실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얼토당토않은) 다양한 시도 끝에 드디어 방문이 오픈! 되는데. 그 방 안에는 모니카가 숨겨온 '모든 혼돈'이 가득했다. 모니카의 표현대로라면 '절대 분류되지 않는 물건들'의 모임이라나. 모니카는 챈들러가 자신에게 실망했을 거로 생각해서 울상을 짓지만, 챈들러는 그런 모니카가 더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본다.


나 역시 약간의 정리벽과 약간의 결벽증이 있다. 또한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 역시 약간 있고, 때로는 나와 가까운 사람이 평소처럼 움직여주지 않을 때 당황스러운 감정을 '약간' 느낀다. 물론 여기서 약간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나의 기준일 뿐이니, 나의 이런 모습을 대하는 상대방이 나를 '약간' 그런 사람으로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약간'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내 나름의 자신감도 있기 때문인데, 나는 나의 약간의 정리벽과 결벽증, 통제 강박이 어떤 선을 넘으면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니까, 그 '어떤 선'이라는 것은 역시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니까?) 그 선을 지키는 일, 어쩌면 그건 나 자신과의 싸움이랄까(먼 눈), 그만하자.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냐고? 내가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비인간적인 데다가 어떤 면에서는 아둔하기까지 한 '우생학 신봉자'가 될 확률은 매우 낮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노력할게요.) 그러니 저의 강박을 미워 말아 주세요. 저에게도 '혼돈'이 있다고요. 네네, 당신의 '혼돈'을 존중합니다, 네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Why Fish Don't Exist)>를 읽었다. 아주 경쾌하고 가볍게 시작된 이야기는 흘러 흘러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결론에 닿는다. 과학의 이야기인가, 했는데 다 읽고 나면 인생의 이야기이고, 거대한 이야기인가, 했는데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인. 그러니까 결국 내가 아주 좋아하는 종류의 이야기라는 것. 실은 책 표지와 종이의 질감,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삽화까지 모두 내가 좋아하는 종류였다는 것. 어어, 위험해요. 위험해. 이렇게 또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철저히 분류하는 거 위험해요!


우리는 가끔(어쩌면 자주) 스스로 묻는다. 도대체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하지? 도대체 어떻게  삶을 계속 살아갈  있지? 나는 중요한 존재일까? 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존재일까?  책의 화자 역시 그런 고민에 휩싸인다. 과학자였던 아버지는 어린 그녀에게 말했었다. "의미는 없어,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  좋은 대로 살아." 실제로 아버지는 자유로워 보였다.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 의미가 '자유' 연결되는  같았다. 소매를 잘라버린 아버지, 어디서든 물에 풍덩 빠지는 아버지.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게 그렇게 간단히 와닿지 않는다. 내가 중요하지 않다면, 아무것도 의미 있는 것은 없다면, 그럼  살아야 ? 어떻게 살아야 ?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가던 그녀는 온몸으로  질문들에 부딪힌다. "혼돈에 뒤흔들리고,  손으로 직접  인생을 난파시킨 " 그녀는  이상의 혼돈이 싫다고, 견고하고 흔들림 없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분류학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 자신이 인정하고 있듯, 그녀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그 강렬한 자신감,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열정, 같은 것들에 끌린다. 아니, 끌리는 걸 넘어서 그가 '완벽히 성공'한 삶을 살았기를 갈망한다. '당신이 나에게 대답이 돼줘요. 그 방법이 맞다고 말해줘요. 제발.' 그녀는 그의 인생을 좇는 게 아니라 실은 자신 안에 자리한 어떤 '허기짐'이나 '공허'를 채우기 위해 거듭해서 그의 삶을 들이마신다. 평생의 연구 성과가 한 번에 사라질 뻔할 때도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선 그를,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딸을 잃고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도(그렇다. 그에게는 언제나 '우열'이 있다. 사랑에서조차.) 전보다 더 강하게, 전보다 더 확고하게 삶을 밀어붙이는 그를 믿고 싶어 한다. 당연히, 합리화도 필요하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니까, 하하, 역시 데이비드는 못 말려. 하지만 그런 모든 욕망으로도 상쇄할 수 없는 진실들 앞에서, 그녀는 갑자기 뺨을 맞은 사람처럼 놀란다. (당연히) 그는 완벽하게 성공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 사실보다도 그녀를 더 당황하게 한 것은 다시, 이 지구로, 이 혼돈의 삶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허약한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는 현실이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나를 아름답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해주지 않을 것이다. 혼돈을 이길 방법은 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


그리고 비로소 그가 넘어서는 안 될 어떤 선을 넘어버렸다는 걸, 그가 자신을 믿고 지원해줬던 이를 배신하고, 나아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걸, 혹은 그 죽음을 은폐하려 했다는 걸, 그가 자신의 '확신'에 취해서 사람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걸, 그녀는 인정한다.


"그 정도로 자기 확신을 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굳은살이 단단히 박히고 그 어떤 방해물에도 끄떡도 하지 않게 되면, 결국에는 한 여자의 목숨까지 끊어버릴 수 있게, 아니면 최소한 그 죽음의 진실을 기꺼이 은폐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특히 그가 아오스타(Aosta) 섬에서 다음과 같은 감정들을 느끼는 대목에서는 소름이 돋는다.


"이탈리아 알프스의 아오스타는 정신적/육체적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안식처 같은 도시였다. 수세기에 걸쳐 가톨릭교회는 장애 때문에 가족에게 거부당한 사람들을 아오스타로 불러들여 주거와 음식을 제공하고 돌보아왔다. (중략) 누군가는 이 마을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존엄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방식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1880년대에 이곳을 방문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그곳을 "거위보다 지능이 낮고 돼지보다 품위가 떨어지는", "피조물들"이 들끓는 "진정한 공포의 공간"으로 묘사했다."


적어도 인생의 어느 시점까지의 그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그의 어린 시절과 그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오히려 평범보다도 좀 더 수줍음 많고 말수가 적은, 누구를 해치거나 공격하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이야기하듯이, 그는 '어느 순간' 달라졌다. 그녀가 이 책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줄곧 밝혀내고자 했던 그 지점, 과연 그를 이토록 달라지게 한 '어느 순간'이 언제였는지는, 사실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일 수도 있다. 불편하겠지만, 우리 역시, 그 '어느 순간'을 무심코 지나칠지도 모르니까. 이미 조금은 지나쳐 온 건지도 모르니까. 되돌아가야 한다면, 더 멀리 가기 전에 돌아서야 하니까.




이 이야기의 끝에 결국 분류학에서 말하던 '어류' 즉, '물고기'라는 종류는 없는 것으로 밝혀질 때,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자연은 그가(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일(그가 평생을 바쳐 구축한 질서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할 때, 나는 안도나 기쁨 말고도 내 발밑을 내려다봐야 할 것 같은 두려움도 함께 느꼈다. 나는 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며 살고 있나. 그건 마치 내가 딛고 있다고 확신했던 땅이 갈라지는 느낌과도 비슷했다.  


그래,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왜 그토록 확신해 왔는지. 도대체 '어떻게' 그토록 확고하게 확신해 왔는지. 내가 딛고 있는 땅이 분명히 '땅'이고, 그건 (적어도 내 생애 동안에는) 분명히 '존재'할 거라고 믿었는지. 내가 의심해야 하는 것과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구분하며 살아왔는지. 그 구분조차 어쩌면 내 판단과 의지의 소산이고, 그 구분만으로도 나는 아주 많은 것들을 외면하며 살아왔음을 깨달아야 한다. 어쩌면 나는 이 모든 혼돈을 오래 들여다보기로 마음먹기 전에는 아주 간단한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셈인지 모른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정상'의 분류에서 늘 벗어나 있던, 그래서 아버지와 끊임 없이 마찰을 일으키고 사회에서는 별 쓸모가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녀의 큰언니는 '물고기는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큰언니는 물고기를 놓아버리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언니는 어류라는 범주 전체를 바로 손에서 놓아버렸다. 왜 언니한테는 그게 그렇게 쉬운 거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인간은 원래 곧잘 틀리잖아." 언니는 평생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늘 반복적으로 오해해왔다고 말했다. 의사들에게서는 오진을 받고, 급우들과 이웃들, 부모, 나에게서는 오해를 받았다고 말이다.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거야."








자, 이제 다시 모니카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 그녀에게는 아픈 과거도 있다. 학창 시절 내내 제법 심한 과체중이어서 그녀의 어머니는 늘 딸의 그런 점을 결함이라 여겨 '못마땅해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언제나 '똑똑한(이라 쓰고 결함이 없다고 믿는)' 아들 로스를 편애한다. 모니카의 사람됨 역시 저 관계에서 기인한다. 지금 그녀는 누가 봐도 늘씬한 미녀가 됐지만, 그녀는 언제나 '과체중'이었던 자신 또한 잊지 않고 있어서 누군가 뚱뚱한 여자를 모욕하거나 무시하면 꼭 자기가 그 말을 들은 것처럼 분노한다. 그뿐인가. 그녀는 자신의 강박증이나 결벽증을 '통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 친구들은 그녀의 강박증과 결벽증을 배려해주면서도 언제든 그걸 농담거리로 삼고, 그녀 역시 자신의 그런 지나침에 대해 웃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앞서 소개했던 '혼돈의 방'과 더불어 모니카를 완성해주는 건 결국 모니카의 여러 '결함(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녀는 '완벽'해지고 싶어서 끊임없이 정리하고 분류하고 통제하려 애쓰지만, 정작 그녀가 정말 완벽하고 아름다운 지점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유난히 매력적이고 예쁜' 레이첼이나 '세상 누구보다 독특한' 피비와는 다른, 그러니까 강박증과 결벽증을 가졌지만, 타인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배려하는, 그래서 자신을 통해 모두를 '연결'해주는 존재로서 설 때다. 친구들은 말한다. 모니카는 너무나 신경질적이고, 그녀의 강박증은 우리를 괴롭게 하지만, 우리는 모니카가 없으면 연결될 수 없다고, 함께 할 수 없다고. 그 순간, 그녀는 모든 혼돈의 한 가운데에 선다. 마치 태풍의 눈처럼, 자신이 지닌 모든 통제 불가능한 혼돈들을 통해 그녀는 비로소 그녀 자신이 된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살다 보면 누군가의 단점만을 생각할 때는 상상할 수 없던 어떤 면이 그의 내면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불쑥 깨닫는 때가 있다. 반대로 장점에 취해서 홀리듯 만났던 사람의 전혀 다른 얼굴을 만나는 일도 많다. 나쁜 일이라고 단정 짓고 그 일 때문에 수 없는 밤을 괴로워하다가 문득, 그 나쁜 일 덕분에 좋아지는 뭔가를 발견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나쁜 일 자체가 이미 좋은 일이 돼버린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괴로움을 그만두기도 한다. 반대로 좋은 일인 줄 알았지만, 결국 그 일 때문에 사람과 멀어지거나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내가 너무 섣불리 판단했다고 인정할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알게 된다. 도저히 양립하기 힘들어 보이는 어떤 지점들이 우리 안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보는 것은 이 지구의, 혹은 세상의, 혹은 자연의 극히 일부이고 그마저도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그럴 때 나는 기분 좋은 몽롱함을 느낀다. 내가 확신하던 것들은 모두 흐지부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마치 내 이성이 마비된 것처럼, 내 머리가 멍-해진 것처럼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어떤 긍정이, 어떤 밝은 빛이 내 안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것 같은 감각을 느낀다. 내가 몰랐던 어떤 면을,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던, 때로는 상상하기를 거부했던 어떤 면을 만나는 순간의 그 감각. 그럴 때 나의 마음 어딘가가 말랑해지고 뿌예지고 따뜻해지면서 삶은 내가 감히 꿈꿔 본 적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계속 알려고 해도 영원히 다 알 수는 없는, 아무리 정리하고 분류하고 통제하려 해도 도저히 통제되지 않는 이 (빌어먹게) 아름답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아가야 하고, 그건 비단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나라는 존재 역시, 끝날 때까지는 끝나지 않고, 아무리 알려고 해도 다 알 수 없고, 정확히 분류/통제되지 않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빌어먹게) 아름다운 존재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나는 나의 혼돈을 사랑한다고, 당신의 혼돈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차라리 사랑한다는 말은 당신의 '영원히 알 수 없는 혼돈'을 사랑한다는 뜻이 돼야 하지 않을까.


내 머리 속의 혼돈을 아껴주시고 함께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내가 좋아하는 박노해 시인의 시로 이 혼란스러운 글을 마무리한다.




<그대로 두라>

박노해


일상은 일상으로 두라

일상을 이벤트로 만들지 마라

일상이 일상으로 흘러갈 때

여정의 놀라움이 찾아오리니


결여를 결여 대로 두라

결여를 억지로 채우지 마라

결여는 결여된 채 그리워할 때

사무치는 마음에 꽃이 피리니


상처는 상처 대로 두라

상처를 힐링으로 감추지 마라

상처가 상처 대로 아파올 때

상처 속의 숨은 빛이 깨어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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