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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Feb 17. 2022

사랑 없는 서늘한 세계를 건너는 법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증언들>


아마 <검은 사제들>때부터였을 거다. 어릴 때 <전설의 고향>을 본 날은 화장실도 못 가서 온 집에 불을 다 켜고 엄마한테 화장실 앞에서 기다려 달라고 조르던 내가, 온 집안의 불을 다 끈 채로 두 시간짜리 오컬트 영화를 혼자 볼 수 있게 됐었다. (물론 지금은 다시 전처럼 쫄보가 돼가는 중이지만.)


당시에 남편은 교통사고를 당해서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몇 달째 병원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남편이 겨우 삶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말하자면 '무서울 게' 별로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쉬이 잠자리에 들리 없던 나는 저 영화를 여러 번, 맨눈으로, 또렷하게, 한 장면도 빠짐없이 보았다.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내 삶이 더 무서웠으니까.


같은 이유일까, COVID19가 2년을 넘게 유행하면서 드라마, 영화 가릴 것 없이 '디스토피아'를 다룬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작품들은 마치 '이 영화보다야 코로나가 낫지, 안 그래?'라고 묻거나 '코로나가 계속되면 이렇게도 될 수 있지 않겠어? 조심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작품들이 뭐라고 말하건 간에, 사람들은 아마 그 작품들이 '무섭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눈치챘을 테니까. 언제나 '영화'보다는 '현실'이 더 무섭다는 걸.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말하자면 그녀를 빼놓을 수 있을까.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을 읽었다. 앞서 말했듯, '지옥의 사자'가 직접 나타나 사람을 말 그대로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영화가 판을 치는 형국이니, 그녀의 소설이 자극적이거나 두렵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막상 책을 펼치면 끝까지 읽게 된다는 점, 그녀가 보여주는 공포는 감각적인 자극이 아니라, 책장을 덮고 현실을 향해 뒤돌아섰을 때 느끼는 서늘함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소설은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상은 달라졌고, 이제 로맨스나 사랑은 죄 많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가 창조한 세상 속에서 남녀의 사랑은 철저히 '배제'되고 '살균'되어야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성행위조차도 '종족 보존'이라는 '숭고한' 기능만을 담당한다. 따라서 성행위를 '눈'들이 계획하고 통제한다. 이런 세상 속에서 인간의 느낌, 감각, 감정은 무가치하고 번잡하며 심지어 더러운 것으로 취급된다. 왜냐고 묻지를 마라. 묻는 것부터 불경하다는 증거이니.


어떤 설명도 없이 들이닥치는 소설 속 디스토피아의 시작은, 읽는 이로 하여금 다소간의 '당황스러운' 감정을 느끼도록 하는데, 그거야말로 작가가 원했던 바가 아닐까. 팬데믹을 겪기 전이었다면 나 역시 '개연성' 운운하며 불편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불평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 이 세상이 달라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루면 충분했고, 그 변화는 2년 넘게 지속되고 있으니까.



 


소설 <시녀 이야기>는 시녀가 된,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다리 두 개 달린 자궁의 역할만을 떠안은 채로 식물처럼 살아가는 '오브프레드'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시녀가 된 여자들은 모두 똑같은 빨간 원피스를 입고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사령관'의 집에 '배정'되어 2세를 낳아야 한다. 만약 2세를 낳지 못하면? 자궁은 쓸모없는 것이므로 '폐기'되어야 한다. 남자가 불임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이 세상에서는 "불임인 남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오직 애를 낳을 수 있는 여자와 낳을 수 없는 여자가 있을 뿐. 그게 법이다."


사령관에게는 어엿한 아내가 있어서 시녀들은 그 아내들로부터 "첩이나 게이샤나 창녀" 취급을 받는다. 그녀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2세를 낳는 것이기 때문에(물론 그마저도 일시적인 생명 연장이기는 하지만) 그녀들에게는 '금지된' 유혹이 찾아든다. 때로는 신분 상승을 꿈꾸는 '아내'들이 직접 제안해오기도 한다. "내가 데려온 남자와 관계를 맺고 아이를 가져라."


소설 속 세상에서는 여성을 분명히 존재하지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그것이 (당연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지자 결국 여성들이 여성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드는데, 이런 장면마다 실소가 나왔다. 저거,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니잖아요? 엄연히 존재하는데 그 존재가 없다고 여기고 싶고, 동시에 그 존재가 필요할 때 가져다 '쓰기'는 해야 해서, 결국 내놓은 방안이라는 게 존재는 거세하고 필요/기능만 가져오자는 거라면, 그건 그 자체로 분열적이 아닌가. 이런 분열적 망상은 그런 시도에 희생되는 이에게도 물론 힘든 일이지만, 실은 그런 시도를 끊임 없이 계획하는 당사자에게 가장 해가 된다. 스스로 분열을 강요하는 셈이니까. 뭐, 그런 이들을 걱정까지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의 분열된 자아는 "난 아닌데?"라고 말하면서 이런 이야기에 관해서도 눈 돌릴 게 뻔하니까.


오브프레드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번뇌한다. 하루는 새로운 세상에 완전히 적응한 듯 굴다가도, 다음 날은 모든 것이 환멸 그 자체라는 듯 구역질이 난다. 하루는 다리 두 개 달린 자궁으로써 소리 없이 지내다가도, 다음 날은 나는 자궁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소리치고 싶어 한다. 그렇다. 그것은 '분열.' 그녀는 끝내 자신의 혹은 이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건 그저 상상으로 그치지만. 칼로 사령관을 찔러 죽이는 걸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몰래 숨겨둔 성냥으로 사령관의 집에 불을 지르는 밤을 계획한다. 하지만 자고 일어나 눈을 뜨면 다시 빨간 원피스와 베일 속으로 유폐되고 마는 그녀. 자신의 종말을 선택했던 앞선 시녀들의 흔적을 바라보며 미친 듯이 웃던 그녀는, 현실에 적응했던 걸까, 모든 걸 포기했던 걸까, 부조리에 분노했던 걸까. 모두 아니다. 그냥, 살고 싶었던 거 아닐까, 존재하는 자신 그대로.


그녀는 가끔 과거를 추억하는데, 그때마다 '오래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주 예전에'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정황들로 추론해보건대 실제로는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난 것도 아니다. 우리가 코로나 이후의 2년을, 체감으로는 수년이 지난 것처럼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겠지. 더구나 그녀는 '일상' 뿐만이 아니라 남편과 자식과 자신의 정체성까지 모두 잃어버렸으니까. 빼앗겼으니까.


"나는 빨래방을 생각한다. 빨래방에 갈 때 입었던 옷들, 반바지, 청바지, 운동복.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던 것들. 내 옷들, 내 비누, 내가 번 돈. 그런 통제력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래, 정말 그랬다. 난 너무 많은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 당시 나는 운명을 굳게 믿었다."


"행주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가끔 이렇게 문득 비치는 정상적 삶의 흔적이 매복하고 있던 병사처럼 옆에서 나를 덮칠 때가 있다. 평범한 것들, 일상적인 것들, 세찬 발길질처럼 과거를 환기시키는 것들. 문맥에서 떨어져 나온 행주 한 장을 보며 나는 그만 헉 하고 숨을 멈춘다. 어떤 사람들에겐, 어떤 면에선, 세상이 그렇게 많이 달라진 게 아닌 것이다."




소설은 오브프레드와 사령관, 그리고 그 아내와 또 다른 남자 사이의 금지된 행위(금지되지 않은 게 있어야 말이지)가 뒤엉키면서 걷잡을 수 없이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어떤 사건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이야기는 끝난다. 오브프레드가 죽었는지, 오브프레드가 빼앗긴 딸은 살아 있는 건지, 그녀가 그토록 믿고 싶어 하던 '우리'라는 동맹은 실제로 존재하는 건지, 사랑의 실마리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건지. 우리는 수없이 많은 질문만 넘겨받은 채로 책장을 덮어야 한다.


아주 불편하고 찜찜한 기분으로 그다음 이야기인 <증언들>을 펴던 나는, 그녀가 구상한 디스토피아는 어쩌면 인류에게 단 하나, '사랑'이라는 걸 제거했을 때를 상상한 것이었나보다, 하고 뒤늦게 깨닫는다. 그들이 그토록 '애써서' 제거/살균하려고 한 건 다름 아닌 사랑이다. 그게 이성 간의 사랑이든 동성 간의 사랑이든 그들은 사랑하는 일이 인간을 타락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사랑하기 때문에 뭔가를 용인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고, 사랑하기 때문에 나쁜 관계를 맺는 거라고. 사랑만 없다면, 사랑하지만 않는다면, 인간은 순결한 채로, 태어난 의무를 다하며 살아가게 될 거라고. 게다가 그건 자유로워지는 거라고. '사랑이 인간을 구속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사랑을 버려라, 그러면 너는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정말 그런가? 우리에게 사랑이 그렇게 큰 의미요 가치였나? 우리가 사랑 때문에 뭔가를 바꾸고 포기하기도 했던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조금 놀랐다. 나에게는 '사랑'이 너무 당연해서, 그러니까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가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당연해서 그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사랑이 금지된다면. 나는 누구와도 감정을 나눌 수 없고, 진솔한 대화를 할 수도 없고, 그저 '주어진 역할'대로 살아야 한다면. 그렇게 생각을 옮기자, '사랑 아닌 순간이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내가 지금 여기에 살아 있기 위해 벌어졌어야 하고 해야 했던 그 많은 일은 전부 사랑이 있기에 가능했다. 사랑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것이다. 혹은 나는 지금 여기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찝찝하다. 사랑 아닌 순간이 없다는 걸 알겠는데도, 내 몸이 반응하는 이 불편함.


"사랑에 빠지는 일 말이에요. 나는 말했다. 사랑에 빠지는 것, 그때는 우리 모두 사랑에 빠졌죠. 어떤 식으로든. 어떻게 그는 사랑을 그렇게 우습게 생각할 수가 있지? 심지어 조롱하기까지 한다. 마치 사랑이 우리에게 하찮기 그지없는 것이었던 양, 변덕이나 유행이었던 것처럼. 천만의 말씀. 사랑은 중차대한 일이었다. 핵심적인 사건이었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사랑을 영영, 끝내 해보지 못한 사람은 마치 돌연변이나 외계에서 온 생물체 같은 존재가 될 터였다. 그건 누구나 아는 진리였다."


아, 진짜 문제는 여기다. '사랑할 수 있는 세상'임에도 사랑이 없는 지금에 우리는,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 사랑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인 사랑을 원한다는 것. 그래야만 우리는 서로를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그 사랑이라는 것 때문에 오브프레드처럼 시녀 대접을 받고 있고, 그건 실제로는 사랑이 없다는 뜻이다. 사랑할 수 있지,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속지 말자. "용서 역시 일종의 권력"이라던 소설의 말처럼, 이 시대에는 사랑 역시 권력이 돼버렸고, 그럴 때 우리는 이미 숨어 있다. 사랑으로 때리고 사랑으로 죽이기도 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 옷장 속에 숨겨둔 빨간 원피스와 베일을 언제고 꺼내 입어야 할지 모르니까. 다리 두 개 달린 자궁이 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죽음을 꿈꾸게 될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다시 한번,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보다도, 현실이 더 무서운 것이다. 사랑을 할 수 없게 된 세상보다도 무서운 건,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강요하는 세상이다. 그리고 '길리어드'를 창조해 낸 당신들, 잘못 짚었어요. 사랑이 문제였던 게 아니라, 사랑이라고 해놓고 진짜 사랑은 하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고요.




사랑이 배제되고 살균된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증언들>은 <시녀 이야기>가 출간되고 35년 후에 쓴 '시녀 이야기, 그 후' 쯤 되겠다. '시녀 이야기'가 던져준 문제의식은 전 세계의 수많은 독자로 하여금 '다음 이야기'를 묻도록 했다. 당연하지. 그렇게 끝나버리는 소설이 어디 있느냐고! 궁금하다고요, 작가님! 작가 자신이 밝히고 있듯, "35년은 가능한 대답을 생각하기에 긴 세월이고, 사회 자체가 변하고 가능성이 현실로 바뀌면서 대답들도 변해 왔다." (35년이란 세월에 대해서도 역시, 감각적으로는 잘 와 닿지 않아서 내 생애 전체보다 약간 짧은 기간임을 상기해본다. 아니, 도대체, 애트우드 여사님은 어떻게 그 긴 세월이 지나고도 이렇게 일정한 톤과 색채로, 하지만 훨씬 깊이 있고 다양한 캐릭터를 구축해서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가 있지? 정말 '(그녀의 별명인) 마녀'인 건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변화 역시 사랑이 동반된 관심에서 시작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여기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는 어떤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을 것이다. 오래 보지 않을 것이다. 바라본다는 것, 관심을 둔다는 것은 사랑의 시작이고 증거이며, 사실 전부다. 그러니 그는 몇백 년을 살아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옷이나 먹는 음식, 가구 취향이 바뀌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를 '뒤바꾸는 경험'이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럴진대, 사랑 없이 세상을 어떻게 뒤바꾼다는 말인가. 더구나 거기는 '사랑'이 불가능한 곳이다. 누구도 무언가를 오래 보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경전에 나온 말들을 줄줄 읊거나, 물건의 위치가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는지나 살펴보겠지.


<증언들>의 내용은 600페이지의 분량이 무색하게 사소하게 언급하는 내용 하나가 모든 내용의 스포일러가 될 만큼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제목처럼 이 디스토피아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여인들의 '증언'을 모아 놓은 형식을 취해서 모든 이야기가 각각의 방향에서 각자의 속도로 달려오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쾅'하고 엄청난 시너지를 내며 얽혀드는 구성이 장관이다. 그러니, 또다시, 직접 읽어보시기를 추천하며.


애트우드 마녀. . 아니아니, 작가는 이 책의 서두에 어슐러 K 르 귄의 문장을 실었다. "자유는 무거운 짐, 영혼이 짊어져야 할 거대하고 이상한 짐이다. . . . . 당연히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선택이며, 그런 선택은 어려울 수 있다."


엄연히 다른 개념이지만, 나는 어쩐지 사랑과 자유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속박할 수 없고, 반대로 독립된 자유로운 개인이 아니라면 진정한 사랑에 다가가기 어렵다는 면에서 그렇다. 아니나 다를까 이 소설 속에서 사랑과 자유 둘 다 거세된 세상이 묘사되는 걸 보면서도 나는 '음. . 역시'하는 것이다. (전작 <시녀 이야기>가 사랑이 없는 세상을 그렸다면, <증언들>은 자유가 없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 물론, 실제로는 둘 다 없는 세상이지만, 좀 더 초점을 맞춘 가치를 들자면 저렇게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작가는 소설 속에서 사랑과 자유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여정을 그리고 있고, 그녀가 작가의 말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이 '시녀 이야기' 이후 35년 간의 사회와 사람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면으로든 '희망'이라는 걸 품어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그리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두렵다기에는 지금, 여기의 세계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우리는 충분히 자유로운가? 우리는 충분히 사랑하고 있는가? 저 두 가지 질문만 자신에게 해보면 된다. 사람들은 과거보다는 많은 면에서 자유로워졌지만, 자유에 대한 정의는 날로 새로워지길 요구받고 있다. 사랑은 어디나 가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랑 아닌 것들도 '사랑'의 가면을 쓴 채로 우리를 위협한다. 우리가 만약, 충분히 자유롭고 충분히 사랑하기를 꿈 꾼다면, 우리는 이 소설 속의 인물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함께 위험을 무릅써야 할지도 모른다. 난파 직전의 배를 타고 험난한 바다를 건너야 할지도 모르고, 먼저 떠난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내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어줘야 할지도 모르고, 내 삶을 통째로 건 비밀을 스스로 폭로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로 두려운 건, 어쩌면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아니라 그것에 맞서는 일이 아닐까. 나의 사랑이, 나의 자유가 야금야금 누군가에 의해 도난당할 때, 나는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맞설 수나 있을까. 오브프레드가 되뇌었던 말, "내 삶이 견딜 만하다면, 그럼 그들이 저지르는 짓거리들이 다 정당화된다."를 떠올린다. 나는 내 삶을 걸고 나를, 아니면 뭔가를 지킬 수 있을까.


나는 그 모든 상황들이 무서워서, 한 가지 생각을 한다. 이건 어쩌면 묘책일지도 모른다. 이제부터는 누군가의 '괜찮지 않다'는 말을 쉬이 무시하지 않기로 한다. 채 말이 되지 못하고 삼켜진 신음을, 울음을 무시한 채로, "견딜 만하니까 조용히 산다"고 무지르듯이 일축해버리지 않기로 한다. 사랑한다면 자명하게 알 수 있는 고통 앞에 무감각해지지 않기로 한다.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말에 속아 '진짜로 사랑하는 세상'이라고 믿는 우를 범하지 않기로 한다. 사랑은 몹시 개별적이고 동시에 지극히 보편적이라는 걸 기억하기로 한다. 자유는 연결되어 있다는 걸 기억하기로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내가 발 딛은 이 세상을 더 나빠지기 전에 지키기로 한다. 아직 내 손에 쥐어진 자유와 사랑을 세어 본다. 그리고 다시 꽉 쥔다. 겁쟁이인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 해야지! 힘을 내자. 사랑도 자유도 없는 서늘한 세계를 건너게 되기 전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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