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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Dec 16. 2021

좋아하는 책을 소개합니다 2.

나현정, <각자의 삶(SCENES OF ORDINARY LIFE)>

사람을 좋아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는 기억이다. 내가 낯선 사람을 너무 무서워하지 않아서 부모님은 나쁜 사람에게 유괴라도 당할까봐 걱정하곤 했었다. 나는 어느 정도 자란 후에 스스로 그런 걱정을 그만두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집 형편이 넉넉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부잣집 아이들이 유괴되었다는 뉴스가 왕왕 있었으니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하지만 집으로 향하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보면 역시 '굳이 여기까지 와서 나를 데려가지는 않을 것 같군' 설득이 되던 나였다.


사람을 좋아하다보니 이래저래 주워 듣는 것들도 많았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은 적은 별로 없었다. 목욕탕에서도 시장에서도 나는 아주머니들과 금새 친해졌다. 아직 10년 남짓 밖에는 살아보지 못한 내가 어쩐지 아주머니들의 인생살이 푸념들을 다 알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시대의 엄마들이 대부분 그렇듯, 아주머니들은 고된 시집살이와 내 맘 같지 않은 남편과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이놈의 일복 많은 팔자에 대해 이야기하셨고, 나는 '그럼 그럼' 하는 얼굴로 그 이야기들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듣고는 했었다.


그렇게 아주머니들에 둘러싸여 자랐기 때문일까. 살면서 때때로 "상희씨, 지금 내 속에 들어 갔다 나왔어?"라는 말을 듣곤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묘한 기분이 되었다. 조금 우쭐한 것도 같고, 내가 너무 직언을 해서 상대가 불편할 것도 같고. 동시에 매번 드는 생각이 또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걸 어떻게 몰라.' 였다. 그러게. 대체 그걸 어떻게 모른다는 말인가. 당신의 얼굴이, 당신의 목소리가, 당신이 감추려고 애쓰는 순간 순간이 이렇게 확실한데 도대체 그걸 어떻게 모른다는 말인지. 결국에는 헷갈렸다. '모른 척 해주기를 바라는 걸까?' '모르기를 바란다면 왜 고민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거지?' 사람의 마음 안에는 너무 너무 말하고 싶지만 도저히 말로 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많다는 걸, 나는 그 많은 얼굴로부터 배웠다.


그런데 또 이상한 건, 어떤 사람들의 마음은 좀처럼 알 수가 없더라는 것. 내가 아무리 애써도 그의 마음은 나를 향해 절대 열리지 않았다. 마치 답을 다 알고도 일부러 틀리는 사람처럼 내가 어떻게 노력해도 그 마음은 오답을 말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 노력이 오답이라고 말했다. 그럴 때 나는 당황했다. 내가 맞출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나와 맞추고 싶지 않아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게 어려웠다. 나는 나에게 마음을 열어보이는 많은 사람들보다는 나를 외면하고 돌아서는 단 한 명을 향해서만 애쓰고 노력했다. 꼭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 되었다. 점점 그랬다. 자연히 내 삶도 어두워졌다. 내 마음에서 가끔 이런 말도 들리기 시작했으니까. '사람'들'은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지?'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잘 지낼 수 있는거야?'


정신을 차려보니, 내 주변에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만 잔뜩 남아 있었다. 이런 것도 과제집중력에 포함되는 걸까. 나는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했고, 그건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인간 관계에서 더 그랬다고 해야 할까. 내가 맺는 인간 관계는 서서히 마치 틀린 문제들을 모아두는 오답 노트처럼 되었다. 모두가 나를 향해 '오답'을 외치고, 나는 매일 밤 오답 노트를 몇 권째 정리하고 있는데도 다음 날이 되면 또 다시 빨간 줄이 슥슥 그어진 답안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이토록 불행하다니.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도 이토록 실력이 늘지 않는다니. 나는 루저가 된 것 같았다.


어느 날에 나는 나에게 물어봤다. 더 할 수 있는 노력이 있느냐고. 나는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고 싶지 않다고. 나는 완전히 지쳐있었다. 내가 사람을 좋아하고 누군가의 이야기에 정신 없이 빠져들곤 하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영원히 혼자 있고 싶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인도는 어떤 곳일까, 혼자 상상해보고는 했다. 아무도 없는 곳, 누구의 눈빛도 누구의 목소리도, 누구의 표정도 누구의 의도도 없는 곳에서 오래 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알게 되었다. 내가 모든 걸 버리고 무인도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쩌면 다른 누군가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에게 내가 가지 말라고, 나랑 있자고 붙잡는다고 상상하니, 나도 내가 싫어질 지경이었다. 그 외롭고 고독한 시간 속에서 나는 나현정의 말처럼, 그들 모두에게 '각자의 삶'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 마음을 열어 보인 사람들도, 나에게 절대 오답을 외치던 사람들도 그저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중일 뿐임을. 우리의 우연한 마주침에 내가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의 우연한 지나침에 내가 너무 많이 마음을 쓰고 있음을. 나는 내가 평생에 걸쳐 겪게 되는 그 많은 일들 중에 하필 가장 내 손에 달리지 않은 일에 유난한 애정을 가졌던 사람일 뿐임을. 그리고 그 애정 역시, 그저 나의 삶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사진 속에 담긴 사람들은, 정말이지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디론가 바삐 걷고, 유리를 닦고, 페인트 칠을 한다. 뭔가를 잔뜩 사서 들고 가는 중이고, 고양이를 바라보며 웃는 중이고, 부엌에서 뭔가를 만드는 중이다. 지하철로 통하는 계단 위 선반에 놓인 밀키스 캔과 아메리카노가 반쯤 남은 플라스틱 컵은(나는 이 사진을 정말 좋아한다), 지난 밤에 혹은 좀전인 초저녁에 그 자리에 서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어디로 급히 가버렸을까,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약간 취했을까. 그도 아니면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각각 하나씩 두고 갔을까. 그렇다면 밀키스가 먼저였을까, 아메리카노가 먼저였을까.


그들 모두는 그 사진 속 그 순간으로부터 시작되는 '각자의 삶'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다. 이 사진들은 도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그들은 그녀의 사진 속에 등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의 사진은 우리가 그들의 삶에 대해 알기 시작한 출발점이고,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 그 다양한 이야기들은 이제 시작되려한다. 그녀의 말처럼,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풍경에 사람이 더해지면, 그 안에서 이야기가 생겨난다고 믿는다.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이 떠오르는 마법 같은 순간들"인 셈이다.


그녀의 시선은 때로는 매일 보는 거실 의자 위로, 저 먼 기차역의 표지판 위로, 비 내리는 창문과 설거지를 앞둔 개수대 안으로도 향한다. 마치 그 모든 무생물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다는 듯. 그 무생물에게 마저도 나는 어떤 것도 강요할 수 없다는 듯. 강요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래서 가끔 꽃도 말을 하고 색종이로 만든 모빌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자신에게, 그리고 상대(생물/무생물 전부)에게 줄 수 있는 건 나를 나이게 하는, 상대를 상대이게 하는 자유일 뿐이라는 듯.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그 자유를 인정하는 일. 모른 척 해주기를 바란다면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나는 그녀를 이제 막 알게 되었지만, 우리는 어떤 순간 만났던 건 아닐까.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니까 그녀가 연남동의 한 가게에서 화분에 물을 주던 아주머니를 보던 순간, 혹은 내가 나에게 '더 할 수 있는 노력이 있느냐'고 물었던 순간에 우리는, 함께였던 게 아닐까.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왔을 우리가,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 생각을 했던 걸까, 나는 그저 신기하다. 그럴 때 나는 넉넉한 마음으로, 우주는 넓으니까, 별 일이 다 일어날 수 있지, 하며 무식한 소리를 내뱉고는 허허 웃는다.





나는 어쩌면 누군가를 만날 때, 어떤 관계가 시작될 때, 늘 무결하고 순전한, 완벽하고 완전한 사이가 되기를 꿈꿨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 때 나의 애씀은, 그를 알아가고 그가 원하는 것을 배우고 그를 사랑하고 그가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저 단지 무결하기 위해서 순전하기 위해서 완벽하고 완전하기 위해서였을지 모른다. 그럴 때 나는 딱딱하고 건조했다. 동시에 무섭고 외로웠다. 타인이 나를 향해 내보이는 오답이라는 사인을 그토록 고쳐주고 싶었던 것도, 결국 그 오답을 말하는 상대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 오로지 나를 향한 마음일 뿐이었다. 내가 나를 위해, 애쓴 것이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다 알아야 한다는 듯, 다 알고 있다는 듯, 너무 가까이 다가가고 너무 무겁게 말하고, 너무 뜨겁게만 사랑했는지 모른다. 그럴 때 사람들은, 살아 있지 못한다. 마치 박제된 동물처럼, 그림 속에 갇힌 인물처럼, 정답이 씌여 있는 문제처럼 따분해서 모두 하품을 하고 도망치고 싶어한다. 살려달라고 말한다.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 자신도 그런 방식으로 사랑해왔는지 모른다. 다 알아야 하고, 다 알고 있다고 믿고, 너무 가깝게 너무 무겁고 뜨겁게.  


그렇게 내가 나를 위해서만 애쓰는 삶이 얼마나 허망하고 괴로운 것인지. '너'를 향해 있는 줄 알았던 그 모든 노력들이 실은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심지어 그 모든 노력들이 오로지 내 손에 달리지 않은 일들에만 쓰이고 있었음을 깨닫는 일은 아주 아픈 것이었고, 그건 절대 뒷걸음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말 그대로 나의 '무능'을 자각하는 일. 혹은 절대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한 헛발질을 깨닫는 일.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나는 아는 일. 그녀의 말처럼 나 역시도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알게 됐을때, 내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삶에 간섭하고 있음을 알게 됐을때, 무엇보다 그 모든 일이 나라는 사람의 범위 밖의 일임을 절감했을 때,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그렇다. 염치 없게도 나는, 그 많은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그건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괴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이 나를 비로소 나이게 만든다. 내가 부족하다는 걸 나는 알기 때문에 나는 충분히 자유롭고 충분히 조심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자유롭게 조심한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 보통의 사람이므로, 나는 어떤 일을 해도 괜찮고, 동시에 아무 일이나 막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이제 겨우 안다.






그러고 보니 이 사진집 속의 사람들,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갈 때, 물 속에서 헤엄을 칠 때, 곤히 잠들었을 때, 수줍은 표정을 지을 때, 두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릴 때, 퍽 자유로워 보인다. 그들이 자유로워 보이는 건, 그들을 찍은 그녀의 마음이 그러하다는 것, 그들이 찍힌 사진을 보는 내 마음이 그러하다는 것이기도 할 터. 비로소 우리는 모두 자유로워졌다. 그렇게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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