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동시대인이라는 말의 가장 적합한 정의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시대를 견디며, 시대를 견디지 못한 이들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 그리하여 어떤 죽음들에 대한 기억을 설명 없이 나누는 사람들. 함께 웃는 사람들이기보다, 함께 웃지 못하는 사람들. 무언가가 좀처럼 웃기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뉴욕의 모든 베개 밑에서 저수지로 이어지는 특수 배수구를 발명했다. 사람들이 울다가 지쳐 잠이 들 때마다 눈물이 전부 같은 곳으로 흘러가게 되면, 아침마다 일기예보관이 눈물 저수지의 수위가 올라갔는지 내려갔는지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뉴욕이 무거운 부츠를 신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있겠지.
-본문 중
슬픈 것들에서 뭔가를 건져 올리겠다고 생각한다.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것들에서는 건져 올리지 않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냥 웃을 생각이다. 아니면, "그것도 참 좋지요"라고 말하거나.
나는 고장 난 걸까. 그래서 자꾸만 슬픈 것들에서 뭔가를 건져 올려보겠다고 낑낑대는 것일까. 나는 멍청한 걸까. 그래서 슬프고 아픈 것들에 마음이 쓰이고 마는 것일까.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었던 적도 있다. '너 정말 어디가 고장 나거나 아픈 거니?' 내 마음은 그냥 웃었던가, 아니면 '그것도 참 좋지'라고 대답했던가.
슬프고 아픈 것들이 미웠던 때가 있었다. 그런 건 멀리하고 싶다고,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즐겁고 기쁘고 행복했느냐고 묻는다면, 물론 그렇지도 않았다. 슬프거나 아파지고 싶지 않았을 뿐, 나는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것들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그러다 보니 자꾸 슬프고 아파졌고, 그래서 다시 그것들이 미웠을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너 정말 어디가 고장 나거나 아픈 거니?'라고 물었을 때 내 마음이 웃었다면(약간 비웃음), '그것도 참 좋지'라고 대답했다면, 그건 드물게 정답일 것이다. 나는 고장 나지도 아프지도 않다. 그저 슬프고 아픈 것들과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것들에게 공평해지는 중일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자주) 슬픔이나 아픔의 변명을 도맡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게 그렇게 나쁜 거냐고, 대상도 없이 허공에 대고 따지고 싶어진다. 왜들 그렇게 슬픔이나 아픔을 미워하느냐고(누가?). 이쯤 되면 슬픔이나 아픔이가 우리 집 반려견이고 반려묘인 것 같다. (우리 집에는 반려견도 반려묘도 없다.)
그러면서 혼자 생각한다. 슬픔과 아픔은 우리를 '알아보게' 하는 데는 선수들이라고. 우리는 같은 슬픔이나 아픔으로 연결될 때, 더 깊은 친밀감을 느낀다고. 실제로 자신의 '약한(혹은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데 서툰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데 더 어려움을 겪지 않느냐고. 그러면 내 마음 한쪽에서 이런 말이 들린다. '사회에서는 그런 약한 감정들을 드러내면 전부 약점이 돼서 돌아오는 거야.' 나를 무너지게 만들던 말. 순식간에 몇몇 얼굴들이, 몇 가지의 가시 돋친 말들이, 외면하고 돌아서는 차가운 눈빛들이 떠오르는 말.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마음이 힘들어 고생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동요하지 말고 공부하라"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충격 이상의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세상에 대해 생각한다. 또래 친구들의 까닭 없는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하는 대신, 누군가에게 뒤처지지 않기만을 빌어야 하는 삶. 슬픔은 경쟁에서 뒤처지는 게으른 감상이라고 여기는 삶. 그들에게는 그것이 현실일 것이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가 아니라, 어떻게 그런 세상을 살 수가 있느냐고 물어야 한다. 그들이 진짜라고 느끼는 그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
그건 이런 기분이다. 지금까지 나는 우리가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믿어왔지만, 각자가 겪고 느끼는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일지 모른다는 것. 마치 평행 우주처럼. 그들의 세상과 나의 세상은 나란히 진행되고 있는 거다. 만날 수 없을 뿐. 두 세계가 충돌하면? 영화도 안 봤나. 어느 한쪽이 멸망해야지. 도플갱어 같은 거라고. 놀랍도록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볼 때,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을 볼 때, 나는 평행 우주를 떠올린다. 그들의 세상과 나의 세상이 다르다, 다르다, 다르다. 주문을 걸듯 나에게 설명한다. 우리는 각자의 한계 속에서 잠시 만날 뿐이다. 차라리 꿈 이야기를 하자, 중요한 건 어떻게 하고 싶으냐다. 무엇을 꿈꾸고 싶으냐다. 한 번의 실패가 아니라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가려는 곳이 어디냐는 거다. 당신의 꿈은, 하고 싶은 일은, 끝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요. 내 말이 들려요? 아, 그는 내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게 아니었지.
9.11 테러로 아빠를 잃은 한 아이의 모험을 그린 이 소설을 나는 아프게 읽는다. 나는 테러를 경험해본 적도 없고, 그 테러로 가족을 잃어본 적도 물론 없지만,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아프다. 어떤 죽음들을 나 역시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럴 것이다. 만나선 안 되는 두 세계가 만나버린 것처럼, 쾅,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눈 앞에서 보고 있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분. 그런 아픔에는 무력감과 죄책감이 어린다. 누군가의 슬픔이나 아픔을 보는 일에는 얼마간의 무력감과 죄책감이 동반되기 마련이니까. 살아남았다는 감각은 아주 잠깐의 안도감이 지나면 무력감과 죄책감, 혼란과 부채감, 책임감과 우울감을 불러온다. 소년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소년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러했듯. 우리는 그 모든 죽음을 기억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각자의 한계 속에서 말이다. 그러니 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처럼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고 싶으냐다. 무엇을 꿈꾸느냐다. 거듭해서 실패하더라도 어딘가로 향해가고 있느냐이다.
하지만 일상은 드라마가 아니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도 시간의 무게 앞에서는 '견디고 넘어서야 할' 과거가 된다. 너무 오래 아픈 것은 불편함을 불러오고, 그래서 사람들은 숨어서 아파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슬픔 너머가 존재할까.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원하고, 실패하더라도 어딘가로 걸어가는 일이 가능할까. 드레스덴 폭격으로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남자는 스스로 말문을 닫아걸었다. 아니, 그는 말할 수 없다. 어떤 말도. 테러로 아빠를 잃은 어린 소년은 늘 젖은 부츠를 신고 다닌다. 아이는 자기 때문에 할머니와 엄마가 슬퍼한다는 걸 알 정도로는 똑똑하지만, 아빠를 잃은 자신의 슬픔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들이 슬픔으로부터 걸어 나오는 방법을 당신은 알고 있나. 그들의 두 눈을 보며, 그만 슬퍼하고 삶으로 돌아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뭔가를 견디고, 넘어서야 한다는 말은 때로 (아니 자주) 불필요한 말이 된다. 이 어린 소년도 그 정도쯤은 알고 있다. 자신이 이렇게 슬퍼하는 것이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는 걸. 자신이 슬퍼할 때마다 엄마는 울고, 할머니는 말없이 자신을 오래 안아줘야 한다는 걸. 하지만 소년은 또 알고 있다. 슬퍼하지 않을 도리 역시 없음을. 아빠가 들려주던 끝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영원히 다시 들을 수 없다는 걸, 그날, 아빠의 전화를 받지 못한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다는 걸, 소년은 알고 있다. 그럴 때 소년은, '괜찮은 척' 한다. 엄마가 조금 덜 울 수 있도록, 할머니가 오래 자신을 안아주지 않아도 되도록, 소년은 괜찮다고 말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방법 역시 곧 실패하리라는 걸, 우리는 안다.
아버지의 관이 텅 비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땅에 묻어야 했던 일을, 아버지의 마지막 메시지를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못한 채 혼자서 반복해서 들어야 했던 일을, 그래서 매일의 밤이 눈물로 젖고, 결국 매일 아침 학교 가는 길이 그토록 괴롭고 힘들었다는 것을 소년은 어떻게든 감당해보려고 하지만, 우리는 안다.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슬픔은 너무 크고, 우리는 너무 작다. 우리는 슬픔에 맞서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것만이 슬픔에 맞서는 유일한 길임을 인정해야 한다. 슬픔이 찾아오면 울고, 노래를 부르고,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단서를 들고 아버지의 마지막 흩어진 조각을 찾아다니는 거다. 그뿐. 그러면서 조금씩, 이 큰 슬픔을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 믿음을 잃지 않게 해줄 실마리"로써 하나하나 나눠 갖는 것이다. 그럴 때 슬픔은 함께 감당해야 할 무엇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함께면 되지 않을까?', 라고 믿는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소년은 무겁고 두꺼운 열쇠의 주인이 아니라, 자신의 슬픔을 알아봐 줄 사람들이 필요했던 거다.
상처받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작은지, 또 얼마나 큰지 소설은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슬픈 사람은 울 수밖에 없지만, 그 눈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연다. 슬픈 사람은 거부할 수밖에 없지만, 그 거부를 통해 남아 있는 사랑이라도 지키고 싶어 한다. 슬픈 사람은 떠날 수밖에 없지만, 그 떠남으로써 그는 또 다른 자신이 되어 돌아온다. 소년은 자신의 슬픔을 알아봐 줄 사람들을 만나면서 서서히 조금씩,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말한다. '자신이 얼마나 슬픈지' '아빠의 마지막 메시지가 뭐였는지' '아빠는 어떻게 죽었을지'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을지' 소년은 자신을 사랑하느라 맘껏 슬프지도 못한 엄마와 할머니를 떠나 아주 먼 곳에서 자신을 찾는다. 우리가 슬픔을 겪으면서 더 넓어지고 더 유연해지는 이유일까.
하지만 대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소설 속에 묘사된, 반복되는 폭력의 역사 속에서 희생되는 개인의 모습 역시 뼈아픈 지금의 상황들을 떠오르게 할 뿐이다. 먼 나라에서는 이유 없는(혹은 너무 가당치도 않은 이유로) 전쟁이 벌어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무고한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의 반복, 반복, 반복. 그렇다면 이것 또한 어떤 평행 우주들의 충돌인가? 왜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심지어 '힘'으로 누군가의 존엄을 해치는 게 가능하다고 믿는 우주는 끊임없이 재생산되는가. 왜, 대체 왜 또 만들어지는가.
10년쯤 후에 그곳에서 살아남은 누군가가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쓸 것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과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슬픔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무거운 장화를 신고 길을 걷는 일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상상의 세계에 대해. 그 모든 발버둥의 끝은 결국, '사랑하는 누군가'를 되살려내고 싶은 욕망으로 연결된다는 것에 대해.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은 사라져버린 그 사람을 되살려낼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슬픔도 상상도 쉬이 멈출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해.
그때 우리는, 그때 세상은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다시 지금처럼 무기력한 죄책감을 느끼며, "고생했다"고 등 두드리는 게 다일 거라면, 삶이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시 또 이유 없이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야 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들은 '평범한 일상'이라는 시간에 짓눌려 숨어서 아파야 한다면 세상살이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미움과 증오로 얼룩진 폭력의 진창들을 보며 나는 절망한다.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내가 너무 늦게 알았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나를 책망한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무엇을 놓친 걸까.
그러다 생각이 미친다. 아, 나는, 자칫하면 이렇게 말할 뻔하지 않았나. 살다 보면 슬픈 날도 있고 즐겁고 기쁜 날도 있는 거라고. 나는 틀렸다. 어떤 사람에게 슬픔은 삶의 방식이고 삶의 전부다. 그들에게는 슬픈 날과 즐겁고 기쁜 날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슬픔은 기본이고 전제다. 그들에게는 그저 평범하게 슬픈 날과 견딜 수 없이 슬픈 날이 있을 뿐이다. 내가 아는 슬픔이 이토록 모자라서 나는, 감히 슬픔과 나머지를 - 즐거움과 기쁨과 행복을 - '공평'하게 대하는 것도 '별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누군가에게는 슬픔이 나머지 것들과 공평해질 수 없다. 영원히. 그들은 늘 푹 젖은 장화를 신어야 한다. 무겁고 축축한 그것을.
슬픔과 기쁨을 공평하게 대하는 거로는, 모자라다. 부족하다. 둘은 공평하지 않으니까. 그건 수억 개의 평행 우주가 있어도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다. 좁히지 말아야 할 간극이다. 어떤 우주에서도 "네 친구의 죽음에 동요하지 말고 일단 공부해서 실력을 쌓으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어떤 우주에서도 "내가 가진 힘으로 너의 존엄과 자유를 짓밟겠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누구의 우주에서도 슬픔이 별것 아닌 귀찮은 일이 돼서는 안 된다.
나는 그냥 슬픔의 편이어야 한다. 언제나 슬픔의 쪽에 서 있어야 한다. 슬픔에서 건져 올려야 한다. 이건 도착이 아니라 시작이다. 나는 이 슬픔으로부터 뭔가를 발견해내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고생했다"는 말이나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슬픔을 들여다봐야 한다. 슬프고 아픈 것들 속에도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것들이 숨어 있을까. 상처받은 이들은 언제 웃을까. 언젠가는 웃을까. 그들에게도 다시 뭔가를 '소중하다'고 생각하며 가슴에 품게 되는 날이 올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들의 젖은 부츠가 다 마르는 날이,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뭘까.
속죄하는 마음이 되어 슬픔을 들여다본다. 지구 곳곳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칠 정도로 많이 생겨나고 있는 슬픔을 생각한다. 또한 내 주변의 소리 잃은 슬픔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나는 슬픔에 대해, 슬픈 사람들에 대해, 여전히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오늘 나는 실패했다. 하지만 다시 걸어갈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꿈꾸는지 생각할 것이다. 내가 닿고 싶은 그곳은 어디인가, 그리고 그곳은 정말 좋은 곳인가, 나에게 물을 것이다. 어느새 바짝 마른 나의 장화가 부끄럽다. 부지런히 걸어야겠다. 몇억 개의 우주라도 좋다. 장화가 조금 젖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