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살다>
제법 건강한 삶이었다. 나고 자라면서 그 흔한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 한 번 없이, 병이라고는 철 바뀔 때 감기나 가끔 학교에서 유행하는 눈병이나 볼거리에 걸리는 게 다였다. 내가 겪은 아픔이란 그저 약을 먹어도 일주일, 약을 안 먹어도 일주일이 지나면 저절로 좋아지는 정도의 심각성을 갖는 것들이었다. 가볍고도 가벼운 아픔이었다. 철없게도,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비련의 여주인공', 그러니까 심장이 약하다거나 하는 이유로 핏기 없이 하얀 얼굴에 가녀린 팔과 다리를 겨우 휘적거리며 슬퍼하는 캐릭터에 끌리곤 했다. 그건 나의 비밀스러운 취향이었고, 취미였다. 아픈 사람들의 얼굴을 따라해보는 일, 언젠가 내가 아프게 되면(물론 이런 가정을 할 때도 나는 절대 '죽지 않고' 아픈 것도 '견딜만 하고' 약을 먹으면 '나을 수 있는' 병에 걸린 거라는 조건을 내 마음에 명시하며), 저런 표정을 지어야겠어, 생각하는 일. 나의 이런 부적절한 욕망에 대한 벌이 내렸을까? 꽈광, 옛다, 어디 건강한 몸을 그리워하며 평생 반성하며 살라고 했을까? 아니, 현재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어릴 때만큼 건강하지 않다. 그때처럼 뛰어다닐 수도 없고, 쇠도 씹어 삼킬 수 있을 정도로 활력이 넘치지도 않는다. 건강 검진 결과에 고개 숙이고 반성도 해보았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수술을 받아보기도 했다.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온 건, 아무래도 남편의 사고 덕분이었다. 남편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갑작스러운 사고의 여파는 사고 후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남편이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가던 날, 차가운 병원 복도에 주저 앉아서 삶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마주했다. 내가 아픈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더 설명하거나 설득할 수는 없다. 대답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난 그 변화를 나 역시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변화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렀"다는 것이다. 그게 내 몸이든, 남편의 몸이든, 우리는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으로서 긴 시간을 보내왔고, 앞으로도 보낼 참인데, 나는 이 경험을 통해 비로소, 건강한 몸과 아픈 몸에 대한 어떤 구별과 공포, 욕망과 거부로부터 한발자국 떨어져서 서 있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이제는 어떤 영화나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을 보아도, 마음이 '동하지 않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그렇다고 '아픈 건 싫다'며 온갖 건강 보조 식품의 노예가 되지도 않았으니 역시 또 그걸로 충분하다. 남편과 나는 여전히, 병원에 가는 일이 '편치 않고' 다녀온 후에는 며칠씩 마음 앓이를 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남편과 내 삶에서 우리가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이 된 건 불과 몇 년 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 이외의 시간 동안 우리는 '건강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다. 저 단어들 사이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담겨 있을지는 각자의 상상력에 달렸을 것이다. 자신이 아파보았거나, 가까운 사람이 아파본 경험이 있다거나, 혹은 유난히 누군가의 아픔에 관심이 있다거나, 그런 이유들로 각자의 상상력은 저마다의 한계를 지닐 것이다.
우리는 어땠나. 아프기 전에 남편과 나의 상상력은 빈약했다. 우리가 특별히 '건강을 자신'하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반대로 '건강에 연연'하는 사람들도 아니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프다는 사실에 둔감했다. 아픔이 언제고 '나의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자각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당연한 일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연한 일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건강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했다. 나는 아플 수도 있다는 전제 없이, 그저 건강하게 살았다.
이 책의 저자는 서른 아홉과 마흔에 두 번의 아픔을 겪었다. 하나는 심장마비, 또 다른 하나는 암이었다. 저자는 그 경험을 자세히 서술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게 일어난 일은 오직 나만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자세히 말하는 일의 가치는 우리 각자가 얼마나 독특한지 보여주는 데 있다. 내 질병 경험을 몇몇 단계로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다. 경험 간의 차이를 인식할 때만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에게 제대로 마음 쓸 수 있다."
아픔을 받아들이는 일은 또 다른 내가 되는 경험이다. 아픔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은 저 간단해보이는 일을 하기에도 녹록치 않다. 병에 걸리는 순간 우리는 '질환'으로 분류된다. 취향과 신념을 가진 개인에서 하나의 '병증'으로 존재가 탈바꿈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고환암 환자'로 불리우던 일들을 회상한다. (남편은 한때 'CRE 보균자'로 불리웠을 것이다.)
수시로 우리를 '분류'하고 '통제'하기를 원하는 의료 체계 안에서 맨정신으로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다시 '자기 자신'이 되어 취향과 신념을 가지고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너는 낫기만 하라"며, 낫기 전에는 내 삶이 멈춰버린 것처럼, 아무 것도 소용 없는 일처럼 느끼게 만드는 관심과 친절은 대체 어떻게 거절해야 하는가.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몸이 고장 났을 때 일어나는 일은 몸만이 아니라 삶에도, 몸 안에서 살아가고 있던 바로 나의 삶에도 일어나"며, "의학이 몸을 고칠 수 있다고 해도 언제나 삶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 아픔이란 총체적인 것이어서, 단지 "고장난 부분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삶 자체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아픔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게 우리 삶에 작용한다. 때로는 아픔이 사라진 후에도 삶은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럴 때 아픔은 삶의 궤도 자체를 바꾼다.
남편이 션트 수술을 통해 뇌를 누르던 뇌척수액을 적절히 관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기뻤다. 이제 그의 의식이 회복되었으니까. 사고를 당하고 꼭 2년만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얼마나 큰 '문제'가 될 수 있는지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이전까지 남편은 '중증' 환자였어도, 돌보기에 '수월'한 환자였다. 우선 자신의 의지가 없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지냈으며, 먹이거나 씻기거나 입히는 일은 전적으로 간병사의 '의지'대로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의지'를 가지게 된 남편은 다른 존재가 되었다. 남편은 더이상 수월한 환자가 아니었다. 그는 취향과 신념이 있는 자기 자신이 되었고, 바로 그 지점이, '불편함'이 되었다.
나는 남편이 회복돼서 기쁜만큼, 아니, 회복이 원인인 어떤 고통에 매일 시달려야 했다. 우선 우리와 오래 함께 해왔던 간병사가 남편의 션트 수술 후에 갑자기 관두겠다고 나섰다.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었다. 나는 간병사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남편은 사고 후 2년 만에 의식이 회복된 것이고, 자신이 보이지 않게 됐다는 것도 2년 만에 처음으로 인지한 상태였다. 갑자기 차단된 시야로 인해 때로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워했고, 안 보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고통 그 자체였다. 그러니 남편을 대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남편을 돌보는 일에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한다. 보이지 않는 사람을 간병하는 일은 간병사들에게도 흔한 경우가 아니라는 간병 회사 대표의 말도 납득했다. "그분들이 느끼는 부담을 보호자님이 이해해주세요."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건 우리의 상황이 간병사들에게 '불편함'이라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뇌 손상으로 운동 기능이 함께 저하된 중도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전문 간병사 내지는 돌봄 서비스가 마련되어 있어야 했다. 간병사들이 느끼는 부담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환자의 불편이나 고통은 어떤가? 환자가 불편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를 돌보는 사람들이 더 많은 부담을 느끼는 것인데, 간병사의 부담을 단지 간병사 개인이 해결하거나, 혹은 우리의 경우처럼 환자나 보호자가 감내하라고 할 수 있을까?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나는 점점 간병사 '개인'의 공감 능력이나 배려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안 보이기 때문에 느낄 불편함과 두려움에 공감하고 그에 맞춰 돌봄을 제공하겠다는 의지가 객관적으로 보장되지 않으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백하건데, 병원에 있는 동안은 간병사들의 하소연이 나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당신은 돌봄 노동을 하기로 결정한 사람이 아닌가, 왜 아픈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는가, 나는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퇴원 후 시간이 흐를수록 당시에 병원에서 마주쳤던 간병사와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하지 않고도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과 실망을 안겨줄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남편의 입원 당시로 돌아가서, 나는 마음 한켠에 정리되지 않는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남편에게 이런 상황을 들려주고 이해를 구했다. 일단 남편이 간병사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혹시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간병사를 밤중에 깨울까봐 경직된 채로 잠을 안자려는 남편을, 침대에서 떨어지거나 넘어질까봐 꼭 침대에 갇힌듯 있어야 하는 남편을, 넘어지기라도 할까봐 걷지 못할 때보다도 더 행동에 제약을 받는 남편을, 주는대로 먹지 않고 이게 무슨 반찬이냐고 궁금해하는 것이 간병사를 지치게 만든다는 말을 들어야 했던 남편을, 물이라도 달라고 요청하면 '요구사항이 너무 많다'고 항의를 들어야 했던 남편을, 나는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나는 남편에게 내가 없는 시간 동안 힘든 일이 있으면 참지 말고 나에게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하는 한편, 간병사들의 선의와 고마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남편이 그들에게 느끼는 공포나 적대감을 어떻게든 좀 더 부드러운 걸로 대체하고 싶었다. 남편은 여전히 아픈 사람이었고, 그가 자신에게 닥친 고통 이외의 것들로 더 힘들어지는 건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닌가. 나는 우리를 대하기 불편해하고 어려워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해보자고 설명했다. 그러면 남편은 금새 슬픈 얼굴이 되었고, 그런 남편을 보는 나는 미안했다. 그 상황은 이랬다. 남편이 고통에 처하자, 그를 돌보는 사람이 훨씬 더 부담스러워했고, 이 문제를 해결할 시스템이 부재하자, 이 문제에 수반되는 거의 모든 불합리는 가장 약한 남편이 떠안게 되었다. 너무 부당해서 숨이 막혔다. 하지만 남편에게 상황을 설명하지 않기도 어려웠다. 남편은 이제 의식이 흐릿하지 않았고,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느끼고 있었으니까.
남편은 스스로 괴로워했어도 누구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 적이 없고, 자세히 설명하면 볼 수 없어도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런 그에게 생리 현상을 '타인'의 기준대로 통제하려고 하거나, 어디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게, 마음대로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는 '당연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불가능한 것이 불가능하다고 사람들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간병사들이 느끼는 부담감은 그대로 혹은 더 크게 부풀려져서 남편과 나에게 전해졌다. 그들에게는 앞이 안 보이는 남편이 겪는 고통보다는, 만약 남편이 돌발적인 상황에 처해서 다쳤을 때, 본인들이 떠안아야 할 책임의 무게가 훨씬 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남편이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꺼려했고, 자신이 '계획'한 것 이외의 어떤 예외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부담을 느끼는 지점을 해결하려면 시각 장애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필요했지만, 그들에게 그런 내용은 닿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간병사가 느끼기에 간병사들의 처우란 늘 부족하고 차별적인 것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그들에게는 일이 간절했지만, 그 일로 인해 어떤 피해도 입지 않도록 '알아서' 조심해야 했다. 그러니 간병사에게 남편의 입장이나 상황, 그가 느낄 불편함과 고통을 자세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그러므로 자연히 수반되어야 할 돌봄에 대해 요구하는 나는, 매일매일 '불편한 환자'를 맡긴 '뻔뻔한 보호자'가 되었다. 그런 건 괜찮았지만(안 괜찮았다), 우리가 원하는 돌봄이 실현된 것도 아니었다.
하루 종일 병원에서 남편을 돌보던 내가 남편의 저녁까지 다 먹이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오는데도, 잠자는 그 몇 시간이 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별 수 없이 내가 병원에 있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저녁을 먹고 나면 간병사가 좀 더 쉴 수 있도록 (휠체어를 탄) 남편과 병원 곳곳을 산책했다. 그래도 늘, 내가 없는 시간이 걱정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간병사가 느끼는 부담은 단지 내가 간병사의 노동력을 절감해주는 것으로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남편이 션트 수술을 한 후로 퇴원해서 집에 돌아오는 날까지 하루도 마음 편히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퀭한 얼굴로 병원에 가면 더 퀭한 얼굴의 남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은 병원에 있는 일이 두려웠고, 나는 병원에 가는 일이 두려웠다.
이 이야기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두 가지 있다. 우선 이전까지의 남편은 병원에서도 소문난 '젠틀하고' '순한' 환자였다는 사실이다. 남편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남편을 가여워하는 동시에 좋아했다. 어쩌면 저렇게 아픔을 잘 참느냐고 칭찬했고, 불편한 내색을 하는 적이 없다고 칭찬했다. 남편은 물론 고통을 잘 견디는 편이고, 자신의 '욕구'를 쉽게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지만, 당시의 남편은 의식이 저하되어 있었기 때문에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었고, 설사 남편이 잘 참더라도, 그걸 자주 드러내서 칭찬한다는 건 자칫하면 "더 참아라, 더 참아라"하는 꼴이 돼버리는 일이 아닌가. 나는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저런 말을 하면 꼭 "말 못하더라도 아프겠지요. 차라리 아프다고, 불편하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네요."라고 덧붙였다. 사람들은, 때로 참, 잔인하다. "아픈 사람이 두렵고 비통한 마음을 잘 표현해서 칭찬받았다거나, 드러내놓고 슬퍼해서 칭찬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반대다. 웃지 않고 어두운 감정을 드러냈을 때 아픈 사람은 사과해야 할 것처럼 느낀다."
두 번째는 저 석달의 기간 중 3주 정도, 남편을 돌봐주셨던 어떤 간병사에 대한 이야기다. 늘 단정하고 조용한 말투를 쓰시는 분이었다. 사실 이 간병사는 기존의 간병사가 휴가를 가야 할 때나, 보호자가 부득이하게 간병사를 단기간 써야 할 때, 말 그대로 '대타'를 전문으로 하는 간병사였다. 우리와의 인연도 그렇게 생긴 것이었고, 나는 그분께 혹시 남편을 퇴원 전까지만 돌봐주실 수 없는지 여쭤보았다. 남편이 재활 치료를 통해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걷는 연습이 되어야 집에 갈 수 있을 터였다. 그 기간만이라도 벌어보자는 심산으로 여쭤본 것이었는데, 간병사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중국에서 본인 딸의 결혼이 예정돼 있어서 3주 정도만 가능하다는 말씀이었다. 남편과 나는 그 3주도 감사하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 3주는 남편도 나도 몸과 마음을 쉬는 기간이었다. 간병사는 남편이 거쳐야 할 과정을 충분히 이해해주었고, 잠깐이지만 자신이 남편과 어떤 노력을 해볼 수 있는지 가늠해주었다. 그 기간 동안 남편은 간병사와 동행하여 화장실에 비교적 자유롭게 갈 수 있었고, 혹여 한밤 중에 요의를 느껴도 간병사를 깨우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반찬과 국이 뭔지 자세히 설명해주었고, 남편은 혼자 궁금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분을 생각하면 어떤 가능성을 엿본 기분이 든다. '그래,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돌볼 수 있어.'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자신이 보이지 않게 된 사실로도 힘들어 했지만, (놀랍게도) 션트 수술 후의 저 기간 동안의 기억때문에도 많이 괴로워했다. 자신을 억압하고, 자신의 의지를 시험하던 사람들. 자신의 아픔이나 처지를 함부로 이야기하던 사람들. 무엇보다 자신이 고민 끝에 '부탁한다'고 말하면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던 사람들의 숨소리, 목소리가 남편의 마음을 아주 세게 할퀸 듯하다. 여기에 더불어 남편을 어린 아이 취급하거나, 단지 보이지만 않는 것인데 남편의 사리분별을 의심하는 듯한 말들도 남편을 괴롭히긴 마찬가지였다. 남편의 상처를 바라보며 나는, 자칫 인류애를 잃을 뻔 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어떤 말들은 잊히거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처음 들었을 때 그 충격 그대로 내 안에 남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기억 또한 남아 있다. 우리는 지금도 저 간병사를 이야기하곤 한다. 그럴 때면, 어두워진 마음에 반짝 하고 해가 든다. 그를 통해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아도 되었다. 그분의 선의와 존중이 얼마나 많은 것을 지켰는지, 그분은 다 알고 계실까. 반대로 내가 베풀지 않은 선의가, 지키지 않은 존중이 얼마나 많은 것을 빼앗는지, 그분들은 다 알고 계실까. 나아가 아픈 사람을 존중하고 그가 가진 개별성을 인정하는 것이 돌봄의 가장 기본임을 공유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회적/제도적 바탕은 언제/어떻게 마련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이 책에는 우리가 막연히 상상하느라 두려워하는 아픔의 민낯이 제법 자세히 드러나있다.
"치료가 끝난다고 질병과 함께 시작된 변화가 끝나지는 않는다. 위중한 질병을 앓고 난 후 삶은 예전에 있던 장소로 돌아가지 않는다. 의사들이 질병의 드라마를 독차지하도록 내버려두면 위험할 수 있다. 의사들은 자신들이 만족할 만큼 질환이 낫거나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본 후에 바로 떠나며, 그러면 아픈 사람과 주변인들은 그때까지는 인정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던 일들을 알아서 감당해야 한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프지만, 그건 예방주사 같은 것이다. 진짜 아픔을 막연히 두려워하고 거부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아파도 괜찮다고, 아픈 몸을 사는 일도 '완전히' 나쁘지만은 않다고 말해준다. 두려워하느라 허비하는 그 많은 경험과 시간을 아끼라고. 아픈 몸을 살면서도 내 인생은 이토록 충만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충만한 삶을 산다는 측면에서는 아픈 사람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보다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음을.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의지를 발휘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계속 확인하고 증명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건강이 필요하다. 반면 아픈 사람은 자신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자기 의지를 전혀 행사하지 않아도 세계가 이미 완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픈 사람은 자유롭다."
우리는 결국 모두 '아픈' 사람들이다. 꼭 어떤 심각한 질병을 겪지 않더라도, 끝내는 조금 아파야 죽게 될 것이다. 혹은 살면서 한 번도 아프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픈 사람들에게 보내는 차가운 시선, 불편한 시선은 결국 나에게 찾아올지 모르는 어떤 아픔에 대한 거부 반응에 불과한 건 아닐지. 아픔은 끝이라고, 아프면 다시는 삶으로 되돌아올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끊임 없이 아프지 않나 살피면서, 동시에 아픔을 거부하면서 살아야 하는 슬픈 자화상은 아닐런지.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픔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상황도 가리지 않는다. 우리는 '관리'를 통해 건강한 것이라 믿지만, 그저 운이 좋을 뿐이다. 그 말은 언제든지, 관리를 하더라도, 우리는 아플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게 진실이다. "병이 났다고 죄책감을 느낄 만큼, 아니면 건강하다고 자랑스러워할 만큼 나는 전능하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벌어지는 일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갈지 계속 모색하는 것뿐이다."
나 역시 '잠재적으로' 아픈 사람이며, 잠재적으로는 신체 어딘가가 불편해질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일 때, 우리는 아픈 사람이면서 동시에 돌보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게 '남의 불행'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나의 현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건 단지 내 불안을 자극해서 '지금 아픈'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려는 꼼수가 아니라 '아픔'을 거부하고 외면하려는 내 안의 무의식과 그 무의식으로 인한 '불안'을 보듬는 선순환이다. 나는 나의 불안과 '지금 아픈'사람 모두를 돌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환을 통해 내가 아프더라도 나 역시 돌보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언젠가 벌어질지 모를 일로 불안할 때는 차라리 그 일이 '언젠가는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아플까봐 두려워하기보다는 '언젠가는 결국 아플 것'이라고 받아들여 버리자. 그리고 새로운 내가 되자. 이건 기회다.
하지만 과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일까? 남편과 나는 병원이 두렵다. 신경외과와 안과 정기 검진을 꾸준히 받아야 하고, 드문드문 병원 외래에도 다녀야 하지만, 그런 날은 우리 둘다 완전히 탈진해버리고 만다. 병원은 남편과 나에게 트라우마적인 장소임이 분명하다. 그렇다. 우리는 아프고 싶지 않다. 여전히 아픔이 두렵다. 그건 우리가 아픔을 적극적으로 살고 있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몸으로 기억하는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설득하고 달랠 수 있지만, 그 고통은 선명하게 존재한다. 그러니 남편과 나에게 '언젠가는 결국 아플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그건 '우리가 또?'라고 반항하는 마음이 먼저 드는 일이다. 하지만 그 반항이 소용 없음을, 더 오래 우리를 괴롭히는 덫임을 알기에,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는다. 괴로운 마음을 들어준다. 가끔은 운다.
나와 남편이 걸어갈 길에 해가 비친다. 이제 비는 다 그쳤냐고? 아니, 비는 또 내릴 것이다. 하지만 분명 다시 해도 날 것이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이것뿐이다. 저것들을 거부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 어쩌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저 사실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할 뿐이라는 것. 그렇게 남편과 나는 아픈 몸을 산다.
덧 1. 내가 가장 좋았던 구절은 바로 여기다.
"돌보는 사람이 되는 것도 분명 하나의 기회다. 하지만 자신을 잃어버릴 위험도 있다. 돌보는 사람은 자신의 에너지와 욕구를 잃을 수 있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감각도 잃을 수 있다. 이런 위험은 아픈 사람보다 오히려 돌봄 제공자에게 더 클지도 모른다. 우리는 질병을 잘 모르며, 돌봄은 더 모른다. 아픈 사람의 경험도 부정당하지만 돌보는 사람의 경험은 더 완전히 부정당한다."
깊은 위로가 되었다.
돌보는 길을 걸어가는 모두를 위해. 당신들의 선택이 누군가를 살리고 누군가의 존엄과 아름다움을 지키고 있다는 걸 잊지 말기를. 온 우주의 무엇도 당신을 몰라주는 것 같을 때도, 당신 자신만은 꼭 당신을 알아주기를.
덧 2. 나는 남편이 병원에 있는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간병사들과 하루 종일 함께 생활했다. 내 남편을 돌봐주시는 분 뿐만 아니라 다른 환자분들의 간병사들과도 물론 함께였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환자 마다 서로 다른 상태와 상황, 고통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돌볼 수 있는 환경이나 인력이 제공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말하기 위함이었다. 단지 간병사 한 두 명의 불성실함이나 일탈을 묘사하고, 나아가 그것이 간병사들 일반의 일인 것처럼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오해가 있다면 그건 나의 표현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돌봄 노동을 하시는 분들이 가진 선의와 노고를 믿고, 존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