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희 Apr 14. 2022

그녀만을 위한 것이 아닌,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문제 의식을 갖기보다 수용하는 것이 익숙한 나는 오랜 시간 그 사실 때문에 컴플렉스에 시달렸다. 한국 사회에서 학창 시절을 모범생으로 보낸 사람의 치명적 결함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고, 이유야 어찌됐든 비판하는 기능이 덜 발달한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내가 느끼기에도 조목조목 따지고(그렇다고 내가 안 따지는 편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니까), 비판하는 태도가 좀 더 똑똑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막상 저런 컴플렉스 때문에 '비판적 사고' 같은 단어를 떠올리며 책을 읽으면 마치 비판이란 걸 한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더욱 버벅거리게 됐다.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런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섣부르게 비판하려고 애쓰지 말자. 내가 알아봐야 할 문제를 알아볼 수만 있으면 된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좀 더 편안했다. 무엇보다 '이쯤되면 날카로운 비판을 한 번 해줘야 하는데' 같은 유혹에 시달리지 않아서 좋았고, 내가 느끼는 감상을 '검열'하지 않아서 좋았다. 독서를 할 때도 내 방식 - 저자의 글쓰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우선 긍정과 수용의 자세로 대하는 것 - 이 좋다. 리뷰나 독후감을 쓸 때도 읽으면서 '별로'라고 생각했던 책을(그런 책이 많지도 않지만) 굳이 글까지 써서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내 마음에 아주 작은 울림이라도 준 책, 내가 새로운 걸 배우고 깨닫게 한 책, 나에게 공감과 지지의 언어를 가르쳐준 책을 기록하고자 한다. 나는 그게 좋다.


그런데 이번 책은 아니었다. 읽는 내내 나는 그야말로 '날이 서' 있었다. 아주 사소한 단어 하나, 접속사 하나에도 민감하게 내 감정이 움직였다. 아주 작은 표현이라도 '부적절하다'고 느껴지면 지체없이 그 문단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었다. 그 단어가 쓰인 맥락까지 따져가며 '비판적'으로 읽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풀렸다. 그걸 자주 반복했다. 나에게 없던 비판 능력이라도 생긴걸까? 드디어 나도 조목조목 따지고 비판하는 '똑똑한 독자'가 된 걸까? 아니, 물론 답은 아니다. 내 날카로운 감각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 책의 저자는 1999년에 미국에서 있었던 콜럼바인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의 주범인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인 수 클리볼드이고, 그녀는 지금 자기 아들이 어떻게 그런 큰 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적 읽기라는 게(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경험한 것이 학술적인 의미의 '비판적 읽기'와는 거리가 있겠지만), 참 피곤한 일이었다. 나는 끊임 없이 저자의 '진의'를 가려야 한다고 느꼈고, 이런 표현을 쓴 다른 '의도'가 있지는 않을까 우려해야 했고, 어떤 단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감시'하며 흘겨봐야 했다. 더 힘든 일은 그 다음이었는데, 저렇게 의심하는 상태로 400페이지가 넘는 애끓는 자기 고백과 처절한 실패의 과정을 읽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나는 나름의 방식으로 저 의심에서 벗어나면 다시금 본래의 내 모습 - 수용적이고 저자의 진의를 신뢰하는 독자 - 로 돌아와야 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감정이 요동쳤고, 나는 내가 아주 변덕스러운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초췌한 얼굴의 여자가 이제 막 면접을 보고 나오는 길. 그녀는 어렵사리 직장을 구한 모양이다. 핏기 하나 없던 얼굴에 어렴풋이 미소가 어리는가 싶은데, 그때 맞은편에서 오던 어떤 여자가 그녀에게 묻는다. "오, 좋은 일이 있나보지?" 그러더니 그녀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어렴풋이 웃던 그녀는 금방 코피를 흘리며 놀란 얼굴이지만, 막상 그녀를 때린 여자는 한술 더 뜬다. "너가 지옥에 갔으면 좋겠어!"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한장면이다. 면접을 보고 나오던 그녀는 케빈의 엄마 에바다. 에바의 아들 케빈은 학교 체육관에 아이들을 가둬놓고 학살했고, 자신의 아버지와 여동생까지 죽였다. 여전히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이 집안의 유일한 생존자 에바는 마을 사람들의 표적이다. 그녀의 집은 페인트를 뿌리거나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길 가다가 뺨을 맞는 일도 있을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할까.


더 충격적인 건 그 다음 장면이다. 뺨을 맞은 에바는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어떤 남성의 호의에 강력하게 거절 의사를 표시하며 말한다. "됐다고요! 내가 잘못해서 그러는 거예요!" 경찰에 대신 신고해주겠다던 남자는 소리치는 에바를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고, 에바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난다.


우리는 극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특히 그 범죄자의 나이가 어릴수록 '부모'가 대체 아이를 어떻게 키운 거냐, 고 묻는다. 그 질문이 가장 먼저다. 오죽하면 아이가 저렇게 '망가질 때까지' 몰랐겠느냐고. 그 부모는 부모의 자격도 없으며, 그 아이가 저런 죄를 짓는 악마가 된 것은 부모가 '잘못' 키웠기 때문일 거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는 저럴 리가 없어. 나는 좋은 부모이고, 저 사람들은 나쁜 부모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 뿐이야. 우리는 안전해.' 이 책은 그 모든 어리석은 부모에게, 그 모든 어리석은 질문들에, 그 모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뼈아픈 고백이다. 그녀는 지치지 않고 얘기한다. 나 역시, 내가 불행해질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노라고. 내 아들은 (놀랍게도) 전혀 문제가 없는 아이였다고. 아주 평범하고, 심지어 때때로 모범적이고 대부분 선량한 아이였노라고. 나는 아이를 사랑했고, 자주 안아주었고, 아이가 가진, 혹은 아이가 일으키는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려는 부모였노라고. 나의 이런 고백을 믿고 싶지 않겠지만, 정말로 사실이라고. 당신이 나의 고백을 믿기 싫어하는 그 이유 - 그러니까, '완전히 안전한' 사람이란 없다는 점 - 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우리 모두는 조금씩 위험하다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위험한 상태일지 모른다고.




나는 평소에 누군가를 손쉽게 판단하고 미워하는 일, 나아가 혐오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내 안에서 수시로 고개를 드는 날선 감정들과 언제든 결론을 내릴 준비가 돼 있는 나("그녀가 이래서 아들이 그랬구나"), 아주 작은 틈이라도 보이면 비집고 들어와 금새 나를 점령하려고 드는 '혐오'의 충동을 느껴야 했다. 황정은은 그녀의 에세이 <일기>에서 혐오란 가장 손쉬운 감정이라고 말했다.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간편하고 게으른 감정이라는 것. 그 문장을 읽을 때도 나는 물론 공감했지만, 이 책을 읽으며 여러 번 그녀의 문장을 떠올렸다. 나에게도 수를 비난하고 의심하는 일이 가장 쉬웠다. 그런 유혹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특히 그녀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을 거라는 생각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을 때까지도 불쑥 내 마음에서 떠올랐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투쟁한 대상은, 학살의 주범인 딜런 클리볼드도 아니고, 그런 자식을 낳고 길렀다는 오명 속에서도 '위기의 자녀'들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온갖 힘을 다 짜내는 수 클리볼드도 아니었다. 그 대상은 바로 나였다. 손쉽게 미워하고 손쉽게 악을 규정하려고 하는 내 게으름, 편견, 혐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끊임 없이 싸우고 뒤바뀌었다. 내가 옳다고 믿었던 가치들이 뒤집혔고, 내가 그르다고 믿었던 행동들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클리볼드가 말한 딜런의 정신적인 문제와 그로 인해 학살이 벌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이 독후감에서 다시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수가 거듭 말하고 있듯이, 그런 재연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범죄'를 부추기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중요한 건 범죄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딜런이 가진 정신적인 문제 - 우울증과 자살 충동 - 에 집중하면 자칫 딜런이 저지른 죄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느끼도록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수는 나와 다르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우울증과 자살 충동, 그밖의 다양한 정서 장애나 폭력적 성향 등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며, 인생의 한 시기에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일도 아니라는 걸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그녀는 부모로써 완벽하지는 않아도 최선을 다한다고 믿었던 자신의 어떤 부분이 딜런이 이런 악의 소용돌이로 빠져들때까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스스로를 무지하게 만들었는지 계속해서 파고든다.


그렇다면 나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수는 수의 입장에서 해야할 일을 했다면, 그 기록인 이 책을 읽는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 내 의식 속에 이 고민이 떠오르기까지 제법 노력해야 했다. 딜런의 사연에 매몰되거나, 수의 입장에 동요하거나, 단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요약하는 걸로는 부족하다는 걸 떠올리고,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느낀 게 무엇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손쉽게 판단하지 않겠다'던 말이, '쉽게 미워하지 않겠다'던 말이, '혐오하지 않겠다'던 말이, 모두 나에게 달려들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나에게 살인자의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느냐고 물어야 했고, 범죄자의 내면을 어디까지 알아야 하는 거냐고 물어야 했고, 이 끔찍한 사건으로부터 뭔가를 남기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무엇과 싸우고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적어야 한다는 걸 힘겹게 깨달았다.




"차에 짐을 다 실었을 즈음 이웃 사람들 몇이 로스트비프를 싸서 들고 왔다. 다른 이웃이 보낸 선물이라고 했다. 아마 저녁거리로 준비한 음식일 듯싶었다. 그날 종일 울었지만 이웃 사람들의 친절에 또다시 울음이 쏟아졌다."


"총격 사건 뒤 며칠도 안 되었을 때에 직접 색칠한 도자기 천사, 얼린 크림소스 치킨 요리와 비스킷, 위로의 카드가 들어 있는 상자를 우리 변호사가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모두 우리가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보낸 따뜻한 손짓이었다."


"총장은 내가 편안히 지낼 수 있게 배려하는 동시에 다른 교직원들이 내 존재에 지나치게 불편해하지 않도록 신경 썼다. 내가 복귀하기 일주일 전에 직원 전체에게 메시지를 보내 나와 함께 일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언제든 자기에게 찾아오라고 말했다. 직원들이 언론의 끝없는 질문공세에 잘 대처하도록 벌써 지침을 내려놓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 누구라도 찾을 수 있게 상담사도 배치했다."


"그 뒤 몇 달 사이에 희생자 가족에게서 편지 두 통을 받았다. 한통은 죽은 여자아이의 여동생이 쓴 것이었다. 우리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동생의 편지를 읽으며 나는 슬픔과 기쁨이 뒤범벅된 상태로 울었다. 그 후 열한 달 뒤 내 생일에, 학교 도서실에서 죽은 남자아이의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아버지는 동정을 표하며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나 자신과 여러 차례 싸워가며 겨우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나는 무엇을 쓰고 기억해야 할 지 몰라 황망한 채였다. 하릴없이 책을 뒤적거리면서 내가 표시 해 둔 부분을 다시 읽어보았다. 우연히도 클리볼드 가족에게 대가 없는 친절과 공감의 마음을 표현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나에게 물었다. '나는 저 사람들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내 이웃의 아이가 살인을 저질렀을 때, 나는 경황이 없을 그의 부모에게 따뜻한 음식과 편지를 전할 수 있을까? 그들 역시 자식을 잃은 부모일 뿐이라고 이해해줄 수 있을까? 수가 다시 직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고 조심하며 새로운 규칙들을 따를 수 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가족을 죽인 살인자의 부모에게 진심어린 편지를 쓸 수 있을까.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대답을 다시 한 번 삼키면서 나는, 아마도 현재의 나는 그러기 어려울 것이라는 걸 인정했다. 그 질문은 이런 뜻이라는 걸 안다. 무턱대고 그들을 믿어주고 이해해주라는 말이 아니라, 어떤 사건을 대할 때, 전체를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충격적인 사건을 단지 '개인'의 실패로 치부하고 그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일로 생각하고 그어져 있던 선마저 지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내 안에서 쑥스러운 듯, 묻는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그들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혐오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안되느냐고. 나는 다시 고민에 빠진다. 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떻게 클리볼드 가족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었을까. 내가 알던 다정하고 친절한 수가 가여워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수를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친절과 이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그들의 노력은 단지 수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수를 포함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나아가 편가르고 선을 긋고 혐오하고 나면, 그 순간 문제는 간단해질 것이다. 그건 아주 간편하다. 우선 '나'와 싸울 필요도 없고, '내 일'이 아닌 일로 속 앓이를 하며 고민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간편함이 반복되면 우리는 굳게 문을 걸어 잠그고도, 이중 삼중의 방범창을 설치하고도, 사설 경비 업체의 도움을 받고도,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알겠는가. 어제 주차하며 목례를 건넨 그 사람이 살인마가 아니라는 증거도 없지 않은가.


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단지 자신을 가여워서 이해해준 것이 아니라는 걸. 물론 그들의 친절이 딜런의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 역시 아니라는 것도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친절은 그녀의 실패를 '우리의 실패'로 끌어 안았다. 그들은 수가 슬퍼할 권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딜런의 악행 역시 용서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그 실패를 넘어 다음으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균형을 잃고 더 오래 헤매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사건의 정확한 실체를 이해하기보다는 '믿고 싶은 것'을 사실로 믿으며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질 위험성을 묵인할 수는 없으니까. 수에게 위로를 건넨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겪은 학교 폭력이나 괴롭힘, 자살 충동이나 자살 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했다는 수의 증언은 의미심장하다. 수의 아픔은 정말로 '수 만의 아픔'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딜런의 악행 역시 단지 딜런만의 악행으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수의 슬픔도, 또 수가 책임져야 할 문제도, 딜런의 악행도 모두 각자의 책임과 몫을 다 해야한다는 것. 우리는 그 몫을 지켜내며, 또 다른 실패를 방지해야 한다는 것.


수는 인정한다. 자신은 완전히 '실패'했다고. "네 아들이 한 일을 용서할 수 있느냐"는 오랜 친구의 질문에 수는 답한다. "딜런을 용서한다고? 내 자신을 용서하는 게 내 일이야." 그리고 덧붙인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하고 욕한다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나 자신에게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 전부를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고" 있었다고. 그건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씌우는 멍에였다고. 그 진실을 알고 그녀는 자신이 평생 동안 스스로를 의심하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게 될 것임을 깨닫는다. 딜런을 놓치던 그 순간을 곱씹으며 살게 될 거라는 걸 확신한다. 그래서 기어이 이 책을 썼노라고 말한다. 제발 당신은 이 지옥을 살지 말기를. 당신도 나처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안다고, 제발 내 말을 들어달라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우리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어서, 내 삶을 아끼는 마음에, 우리는 이것을 공격하는 어떤 시도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만다. 그 다음은 늘 보던대로다.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묻고 물어서 기어이 어떤 '문제'를 규정하고 그곳을 도려내려 드는 것이다. 무슨 방법을 써서든 내가 안전한지 확인하고 싶으니까. 하지만 어쩐지 그 위험을 도려낸 후에도, 말하자면 클리볼드 가족들을 공동체로부터 영원히 격리하고, 그들을 비난하고, 그들의 (잘 알지도 못하는) 양육 방식을 낱낱이 도마에 올려 난도질 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두려울 것이다. 어디선가 비슷한 사건이 또 벌어지면, 그때 우리는 우리가 틀렸다고 인정하게 될까. 혹은 아직도 위험한 사람들이 덜 격리된 거라고 말하게 될까.


어쩌면 두려워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건 아닐지. 더 최악인 건 두려움 때문에 가장 안 좋은 길을 택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함께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내 옆의 저 사람도 나와 똑같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해결하는 것 못지 않게, 당신과 내가 같은 두려움을 공유하고 있음을, 그러니 우리가 서로 싸우는 게 아니라 함께 걸어가야 함을 기억한다면, 좀 더 나은 길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이 거대한 공포와 막막한 두려움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서로의 손이 닿기에 우리는 이미 너무 멀어져버린 건 아닌지. 그 멀어짐 속에 누군가의 마음은 더 깊게 병들어버리는 건 아닐지. 상상 속에서도 선뜻 실천하기 어려운 일을 현실의 내가 과연 시작할 수나 있을지. 그러다 깨닫는 것이다. 손쉽게 판단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나아가 혐오하지 않겠다는 말은, 이 모든 공포와 막막한 두려움을 견디겠다는 말이었구나. 간단한 대답 대신 긴 침묵을 함께 하겠다는 말이었구나. 수많은 시행착오와 끝없는 연습을 반복하겠다는 말이었구나. 나는 겨우, 내가 한 말이 실제로 어떤 뜻인지 이해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기억하고자 여기에 적어둔다. 더불어 수 클리볼드, 그녀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위로와 지지의 말들을 나에게도 조금, 우리에게도 조금 나누어 주기로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모두 아픈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