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 <태평양을 막는 제방>
*이 시리즈는 소피 카르캥의 <글 쓰는 딸들> 에서 착안하였습니다. 그녀의 글에서 다루고 있는 매혹적인 세 작가의 작품을 읽고 독후감이면서 에세이이기도 한, 그녀들의 이야기이면서 모든 어머니와 딸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글을 써보았습니다.
그 문장에는 매혹적인 절망이 담겨 있었다. 가공하지 않은 다이아몬드, 혹은 흑진주였다. 그때까지 내가 모성에 관해 읽고 들은 것이라고는 자기희생적인 모성애, 어머니라는 불가결한 희생물을 포장하는 낙관적이고 이상주의에 젖은 숭고한 이미지들뿐이었다. (중략) 작가는 그런 포장을 집어치웠다.
-소피 카르캥, <글 쓰는 딸들> 중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마리 D.'
바다.
살을 파고드는 태양과 숨을 참게 만드는 무더위 속에 그녀는 바다를 본다. 그렇다. 바다는 거기 있다. 출렁이는 바다, 파도치는 바다, 소금기를 머금고 제방을 무너뜨리는 바다, 어머니가 불하받은 땅을 망가뜨려 버리는 바다. 하지만 그녀는 바다를 사랑한다. 그녀는 제방으로 가는 길목에 앉아 바다에 발을 담그거나, 바다에 빠져 헤엄치거나, 바닷바람을 맞는다. 그녀는 생각한다. 사랑하는 것을 미워하는 일에 대하여. 해치고 괴롭히는 사랑에 대하여. 왜 내가 사랑하는 바다를 나는 미워해야 하지? 왜 내가 사랑하는 바다는 우리를 해치고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을 빼앗는 거지? 어린 소녀였던 그녀는 질문을 품었을 것이고, 그 질문을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작가가 되었다.
사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을 미워하는 일에 대해 고민하게 된 건 바다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의 가족, 그러니까 그녀의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 그녀의 어머니, 그녀의 큰 오빠와 작은오빠가 그녀에게는 일찍이 사랑하지만 미워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녀는 미운 그들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들을 미워한다. 그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 앞에서 답답할 때면 그녀는 바다로 향하고 사랑하는 바다와 미워하는 바다를 보며 이해한다. 받아들인다. 바다가 밀려가고 밀려오는 것처럼, 어떤 일은 '불가항력적'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들은 내가 알기 이전에 이미 존재한다고. 예를 들면, 인간의 허약함 같은 것.
"바다는 나를 매혹하는 동시에 두렵게 하죠. (중략) 바다는 '내'가 무제한의 힘을 갖게 되는 곳이에요. 시선이 바다에 잠겨 들며,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다가 다시 되찾게 되죠. 세상의 끝에는, 지층을 뒤덮는 넓디넓은 바다뿐일 거예요. 하잘것없는 인간의 모든 흔적이 사라지게 되겠죠."
그렇게 오래 바다를 바다보다 집으로 돌아오면, 그곳에는 변함없는 것들, 그래서 안정과 권태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것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무책임하고 신경질적인 어머니와 부도덕하고 폭력적인 큰오빠, 작고 연약해서 오히려 자신이 지켜줘야 할 것 같은 작은오빠가, 숨 막히는 무더위와 가난, 권태와 절망이 그녀를 향해 아는 체 한다. 아몬드 모양의 눈을 가진 작고 가녀린 소녀는, 그 모든 것을 거부하지 않고 끌어안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아직은 그녀가 그곳에서 도망칠 어떤 방법도, 어떤 샛길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게 진짜 이유일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아직은 그 가족들이, 그 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 다른 방법을, 샛길을 찾아낸다. 아니, 샛길을 만든다. 그리고 그 샛길은 곧 가장 중요한 길이 될 테다. 그녀는 '글'을 쓰기로 한다. 가족 중 누구도 그녀의 글쓰기를 응원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애초에 그들에게 어떤 지지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까. "글쓰기는 늘 복수에서 비롯되"며, "글 쓰는 행위 뒤편에는 매번 하나의 재판이 있기 마련"이라는 걸. 그러니 글쓰기에 대한 타인의 인정 같은 건 필요 없다. "(글쓰기란) 하나의 삶을 현실 옆에 나란히 놓고, 점선의 형태로 끌고 가려는 욕망이랄까요? 하여간 신기하죠, 글쓰기를 향한 욕망은. . . . ." 그녀에게 어째서 글쓰기라는 길이 필요했느냐고? "달아나기 위해서. 현실의 삶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녀가 글을 쓰게 만든, 그 견디기 힘든 현실의 가장 큰 원인은 뭐였을까, 혹은 누구였을까. 많이 알려진 것처럼, 아마도 그녀의 어머니, 마리 도나디외의 역할이 가장 컸으리라. 소설 <태평양을 막는 제방>에서 묘사하고 있는 무책임하고 편집증적인 어머니, 아들에게만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 불가능한 일에 집착하는 현실감각이 없는 어머니, 딸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어머니, 부도덕한 그 어머니 말이다. 그녀가 많은 인터뷰에서 인정했듯이 특히 어머니와 큰오빠의 관계나 두 사람의 왜곡된 성향과 감정들은 얼마간 사실이었을 것이다.
돈 많은 조 씨와 십 대 소녀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를 다루는 이 자전적 소설의 전반부에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혼자 왔고, 농장주였고, 젊었다. 그가 쉬잔을 바라보았다. 쉬잔을 바라보는 그를 어머니가 바라보았다. 어머니도 쉬잔을 바라보았다." 이 얽히는 시선들이 그들이 소설 속에서 보여줄 부도덕의 기저를 이룬다. 오로지 '자신들이 잘 살기 위해' 쉬잔을 더 부잣집에 시집보내야 한다고 믿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말리지 않는 오빠 조제프, 그들을 막을 어떤 힘도 이유도 찾지 못한 쉬잔. 그들은 당연히 조 씨로부터 만족할 만한 대가를 받아내기 전에는 절대 쉬잔을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비치는 모습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쉬잔이 스스로 조 씨와의 관계가 '매음'이었다고 정의하는 장면에서는 슬픔의 탄식이 나온다. "쉬잔이 문을 열려는데, 마음대로 보라고 세상에 자기를 바치려는데 바로 그 순간에 세상이 그녀에게 매음을 시킨 것이다. 쉬잔이 손을 문고리에 얹은 채로 동작을 멈추었다. "당신은 쓰레기야." 쉬잔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조 씨로부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받아낸 쉬잔이 더 이상 조 씨를 만나지 않기로 결정하고, 어머니와 조제프 역시 이전까지와는 달리 쉬잔을 조 씨에게 보내지 않겠다고 결정하면서(물론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갈팡질팡했고, 만약 목걸이가 없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졌겠지만), 소설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인물들은 쉬잔이 조 씨로부터 목걸이를 받아낸 후로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변화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그리고 소설의 전반부를 읽는 동안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인물들이 변화해간다. 소설의 결말 역시 낯설다.
어쩌면 뒤라스는 이 소설의 2부를 위해 1부를 쓰지 않았을까. 뒤라스가 말하는 '하나의 삶을 현실 옆에 나란히 놓고, 점선의 형태로 끌고 가려는 욕망'이란 진짜 현실의 삶인 이 소설의 1부와 점선의 형태로 끌고 가는 삶인 이 소설의 2부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녀의 유년 시절이 어떠했는지, 누구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유년을 발 딛고, 기어이 자기 소설을 써낸다. 그녀가 <태평양을 막는 제방>, <연인>, <북중국의 연인>이라는 세 권의 소설에서 연거푸 자신의 과거를 '다시 쓰는' 것은 결국 그 시절을 '다시 사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점선의 형태로 다시 쓴 현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는 그 모습을 보기 이전에 뒤라스의 글이 담대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녀가 담대한 것은 그녀가 정의와 윤리를, 무결한 인간상을 그리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가족으로부터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부조리에 맞서는 온갖 '옳은' 말들로 가득한 글을 쓰지는 않는다. 대신 그녀는 마치 바다 앞에 앉아 있을 때처럼, 자신의 가장 취약한 점까지도 솔직하게 쓴다. 겁내고 소심한 자기 자신마저도 그녀는 쓴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자신마저도 그녀는 쓴다. 어머니가 자신을 때린 것을, 때로는 큰 오빠가 자신을 때리고, 어머니는 그것을 방관하거나 부추긴 것을, 혹은 그 반대였던 것을 그녀는 쓴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들 곁에 점선의 형태를 가진 어떤 삶을 슬며시 꺼내놓는다. 그 삶 역시, 대단히 정의롭고 윤리적으로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그녀가 원했던 어떤 지점들이 들어 있다. 잠 못 드는 밤에 홀로 상상하고 기대했을 누군가가, 바다 앞에 앉아 하염 없이 시간을 보내던 순간에 꿈꿨을 어떤 장면이 그녀의 이야기 속에 있다. 그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자신'이 되고, 그녀가 사랑하고도 미워한 사람들 역시 다시 한 번 새로운 '자신'이 된다. 그렇게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과 그들을 재탄생 시킨다. 그 지점이 그녀를 용감하게 한다. 그녀는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삶을 다시 살기 위해 글을 쓸 뿐이니까. 자신과 자신이 사랑한 그들을 다시 태어나게 해주려는 것뿐이니까. <태평양을 막는 제방> 2부에서 심지어 조제프가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며 끝내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키려고 애쓰는' 장면에서는 뭉클한 감정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뒤라스의 '현실'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했을, 하지만 늘 갈구했을 말과 행위를 해내는 '소설 속의 현실, 소설 속의 사람들.'
"글은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글쓰기는 매번 앞서의 문체를 깨뜨리고 새로운 문체를 창조하면서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묻게 된다. 그녀가 '그녀'가 된 것은 그녀를 고통 속으로 내몬 현실 덕분인가, 아니면 고통을 살아낸 그녀 자신 덕분인가. 쓰고 보니 이토록 무의미한 질문이 있을까. 당연히, 대답은 둘 다다. 하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이런 생각을 덧붙여보는 것이다.
그녀의 글이 이토록 담백하게 적나라할 수 있는 이유는, 설사 그것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 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허약할 수 있는지 보았기 때문은 아닐는지. 그녀는 스스로에게 감탄하는 대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읽어내고, 있는 그대로 기록함으로써 모든 현실을 껴안는다. 그녀에게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란 없다. 권태 부조리 모멸감 비열함 우울. 그녀는 그 모든 허약한 감정들을 인정한다. 그런 것쯤은 이겨내야 한다거나,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은 그녀 앞에서 힘을 잃는다. 대신 그녀는 그렇게 말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다. 바다처럼 깊은 눈으로. 그리고 대답하겠지. 아니, 그런 건 분명히 존재해. 인간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
어떤 부도덕함을 겪어낸 사람이 말하는, 부도덕함의 실체와 진실, 그 안에 담긴 인간성과 그것의 추락. 그 모든 비인간적인 행위들에 담긴 의미를 통찰해내는 투명한 시선. 그것은 단지 고통 '덕분'이 아니라 그 고통을 '살아내기'로 결심한 존재 덕분일 거라고. 비슷한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모두 다른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느냐고. 그렇다면,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상징하는 그녀의 어머니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아니, 더 정확하게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그녀의 어머니 마리 도나디외의 관계를 통해 세상의 많은 '엄마와 딸'은 무엇을 발견할 수 있나?
그것은 놀랍게도 '위안'이다. 우리 삶이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을 때, 온갖 비인간적이고 부도덕한 결정들을 반복할 때, 우리는 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야 하는 거라고. 우리는 모두 그저 '자신'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거라고. 그 싸움에는 어떤 도덕적인 잣대도 윤리 의식도 소용없노라고. 대신 바다 앞에 홀로 앉아 그 바다의 심연을 끝없이 바라보는 '자기 자신'이 있는 거라고. "인류의 문제점에 대해선 아무리 떠들어대봤자 소용없어요. 우리는 하루하루 자신과 끊임없는 투쟁을 이어가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어떤 도덕적 잣대도 윤리도 모범적인 인간성도 강조하지 않지만, 대신 묻는다.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장면은 어떤 것이냐고.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삶은 어떤 것이냐고. 당신의 고통(현실) 곁에 점선으로라도 놓아두고 싶은 삶은 어떤 것이냐고. 그녀 앞에서 가장 무능력한 단어라면, 책임이나 의무 같은 말일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라고? 오, 저런, 인간은 기계가 아냐.
그녀가 창조한 인물들이 매력적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들은 잘못하고 괴롭히고 망가뜨린다. 그들은 막돼먹었고 저열하며 싸움꾼이다. 그들은 물론 책임도 의무도 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삶을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라도, 그것이 아주 작은 걸음일지라도 기어이 어떤 한 걸음을 뗀다. 오랜 세월(어쩌면 평생처럼 느껴지는 시간 동안)을 걸고 제방을 쌓아오던 쉬잔의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에 그 제방을 쌓는 것이 소용없는 일이었고,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자신 역시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소용 없음을 무기 삼아 생명을 갉아 먹으며 유지되는 역겨운 제도에 돌을 던지고 싶었노라고. 그리고 자기 삶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그 제도의 하수인인 이들에게 실제로 돌을 던지겠노라고 경고한다. 그 경고의 실현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마지막 순간에 최후의 한 걸음을 뗐다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그들의 그 한 걸음을 응원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모두가 끝났다고 믿을 때, 홀로 서서 지키고 있는 사람. 그러면서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버리는 사람.
"그 시절에 대해 섬광 같은 기억들이 있어요. 하도 강렬해서 글로는 결코 형용할 수 없는.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자신의 고통을 직면하려 평생을 수고해왔고, 그 고통을 변명하기보다는 그 고통 다음에 올 것을 상상한 사람.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지 않고 자기 손으로 보여주려 한 사람. 그녀가 끌어안은 고통은 깊고 넓어서,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내 안의 고통이 공명한다. 그녀가 바라본 고통에는 어떤 꾸밈이나 핑계도 없다. 고통 그 자체로써의 고통만이 존재한다. 그녀는 고통의 민낯을 오래 들여다보았고, 나 역시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내 안의 어떤 고통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를 괴롭히던 책임과 의무가 하나씩 벗겨지며 날것의 내가 드러난다. 그 후에는 서서히 그 고통 대신에 내가 바랐던 것들이 흘러나온다. 처음에는 작은 샘물이었던 그것은 점점 큰 물줄기가 되고, 호수가 되고, 강이 되어 끝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는 그녀의 소설 속에서 결국 '나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오래도록. 두렵고 설레는 그 시간 속에 나는 또 다른 나를 마주할 것이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녀를 통해 전혀 새로운 나를 만났다. 어떻게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이미 저만치 가 있다. 그녀만의 바다를 찾으러. 그리고 나지막이 되뇌는 것이다.
"난 삶을 사랑해, 비록 여기 이런 식의 삶일지라도."
*""안의 문장은 아래의 책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소피 카르캥, 임미경 옮김, <글 쓰는 딸들>, 창비
마르그리트 뒤라스, 윤진 옮김, <태평양을 막는 제방>, 민음사
마르그리트 뒤라스, 김인환 옮김, <연인>, 민음사
마르그리트 뒤라스, 고종석 옮김, <이게 다예요>, 문학동네
마르그리트 뒤라스, 장소미 옮김, <뒤라스의 말>, 마음산책
장영은,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민음사
타니아 슐리, 남기철 옮김, <글쓰는 여자의 공간>, 이봄